명품 가방대신 나라야 가방
지난달 방콕여행을 다녀온 기념으로 엄마에게 가방을 사드렸다. 면세점의 명품 가방이 아니라, 태국 전통 브랜드 나라야 가방. 왕리본 장식으로 유명한 이 브랜드는 태국에 온 이들이라면 기념품으로 주저 않고 마구 사 담는 가성비의 끝판왕이다. 이것저것 사게 되는 개미지옥 같은 이곳은 크고 작은 가방부터 파우치와 지갑, 머리끈과 스카프 등 상품도 디자인도 다양하다. 무엇보다 가격까지 매우 착해 좀처럼 쉽게 빠져나올 수 없는 곳이다.
그곳에서 나도 엄마에게 줄 가방 하나를 샀다. 기념품이랍시고 엄마에게 드릴 것을 하나 사니 홀가분하게 숙제를 끝낸 기분이었다. 이래도 되는 걸까. 여행에 함께하지 못한 미안함을 고작 이 가방 하나로 퉁쳐도 될까.
해외여행을 갈 때면 늘 부모님에게 미안한 마음이 앞선다. 평생을 쉼 없이 일만 하느라 변변한 여행은 물론이고, 단 한 번도 해외에 나가보지 않아 여권조차 만들 일이 없었던 우리 부모님에게 "여행 다녀올게"라는 말을 꺼낸다는 것. 그건 마치 맛있는 음식을 앞에 두고 나만 혼자 다 먹겠다는 얌체 심보 같았다. 오죽하면 이번엔 슬그머니 몰래 다녀올까 하는 생각이 들었겠는가.
이런 연유로 나는 도둑고양이처럼 몰래 여행을 가고 싶다. 아직 해외여행을 모시고 가지 못했다는 부채감 때문에. "너네만 해외여행 가냐"라고 쏘아 말하는 부모가 아니고, 되려 얼마라도 송금하며 "맛있는 거 사 먹어라" 하는 애틋한 부모이기 때문에.
이번에 방콕에 가니 노부모부터 어린 손주까지 3대가 놀러 온 대가족들에게 유난히 눈이 갔다. 한겨울에 이국의 뜨거운 풍광을 즐기며 맛있는 음식을 먹는 노부부의 모습을 보노라니, 칠십의 나이에도 여전히 쉬지 못하는 내 부모가 떠올랐다. 은퇴 후 넉넉하고 편안한 노후를 즐기는 여생이 아닌, 도무지 끝나지 않는 노동의 굴레에 매인 삶. 이런 부모님의 삶을 안쓰러워하면서도 이제는 편히 쉬면서 자식들에게 기대시라고 말할 자신도 능력도 없는 나. 같이 좋은 데로 여행 가자고 필사적으로 설득할 자신도 솔직히 없다.
작년엔 칠순을 핑계로 여행을 가자고 마음을 굳게 먹어봤지만, 선뜻 내켜하지 않는 부모님을 완곡히 설득하지 못하고 또 미루고 말았다. 혹여 자신들이 부담이 될까 싶어 여행을 고사하는 그 마음을 알면서도 "안 가도 괜찮다"라는 부모의 말에 나는 그냥 속은 척했다. 기약 없이 "다음에 가자"는 엄마의 말에 못 이기는 척하곤 또 미루고 말았던 것이다.
이 가성비 가방 하나로 나는 방콕여행의 면죄부를 대신하는 꼼수를 부려본다. 선물이라도 챙겨서 미안함 혹은 죄책감을 달래 보려고. 모시고 왔더라면 좋아하셨을 걸 알면서도, 모른 척 넘어간 나의 못남을 서둘러 덮어버리기 위해서. 그리고 매장에서 엄마가 좋아할 법한 스타일의 가방을 찍어서 골라보라며 카톡을 보냈다. 최대한 상냥하고 친절하게.
연거푸 쏟아지는 문자에 엄마는 어리둥절해했다. 마음이 급해 빨리 골랐으면 하는 나의 마음과 달리, 엄마는 꽤 신중했다. 크기, 모양, 색깔 두루두루 살피며, 방콕의 화려한 쇼핑몰이 아닌 방구석 휴대폰 화면에서 엄마는 쇼핑을 즐겼다.
- 많기도 하다.
- 검은색도 예쁘네.
- 그건 너무 작지 않나.
한참을 고민하다 마침내 결정을 내렸는데 마지막 질문은,
- 안 비싸? 였다.
정말이지 하나 안 비싼 이 가방은 240밧, 한국 돈으로 10,400원이었다. 포장도 가격처럼 아주 얄팍하기 그지없었다. 고급진 더스트백과 하드케이스 대신, 납작하게 접혀 달랑 투명한 비닐 폴리백에 담겨 왔다.
이번에 가방을 고르며 딸과 엄마로 살아가는 내 이중적인 모습을 철저히 마주 했다. 내 자식들에게는 좋은 옷이라도 기꺼이 사주고 싶은 마음인데, 몇 곱절은 헌신한 부모에겐 왜 지갑을 열기 어려운 것인가. 내 수중에 돈이 많고 소유가 넉넉했더라면 거침없이 명품 가방을 안겨드렸을까. 생각으로는 그럴 수 있겠다 싶지만 자신할 수 없다. 또 모르는 척 은근슬쩍 넘어갔을 수도 있다.
나라야 매장에서도 여전히 나는 이기적인 자식이어서 가장 좋은 것을 사 드리지 못했다. 그저 아기자기하고 예쁜 것을 좋아하는 엄마를 떠올리며 괜스레 미안한 마음에 열심히 골랐을 뿐이다. 엄마가 크기를 가늠할 수 있도록 손바닥도 대보고, 손으로 들어가면서 최대한 성심성의껏.
지난주 모처럼 만난 엄마에게 가방을 드렸다. 무척이나 마음에 들어 하던 엄마의 얼굴을 보니 후회가 된다. 다른 디자인으로 몇 개 더 살걸, 진짜 그거 얼마나 된다고.
차마 미안한 마음을 내보일 수는 없어서 맛있는 장어덮밥도 사드리고, 헤어지는 길에는 아빠랑 먹으라고 백화점 지하에서 비싼 빵도 사서 안겨 드렸다. 잠깐의 외출에 몇 만 원 휘청거리는 지출을 했으나 마음은 캐시백처럼 차오른다.
함께 여행가지 못하고, 더 좋은 걸 사드리지 못했다는 나의 마음은 부모님을 다시 만날 수 없는 그날에야 사무친 후회가 될까.
올봄에는, 저 가방을 들고 꽃구경이라도 모시고 가볼까. 말뿐이기만 한 거창한 해외대신 일단은 비행기를 탈 수 있는 제주라도, 아니면 엄마의 고향인 저 멀리 남쪽 바다가 있는 곳으로.
다음날, 엄마가 가방 고맙다고 밥 사준다는 카톡이 왔다. 끝까지 찡하네. 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