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 블루베리 한 팩, 바나나 한 송이
모처럼 날이 좋아 걷고 들어오는 길에 마트에 들렀다. 길가에 나란히 있는 두 매장 중 ㄴ브랜드를 갈까, ㄹㄷ슈퍼를 갈까 잠시 고민하다 가성비 본능에 이끌리어 ㄴ브랜드로 향했다. 매장 입구에서 손짓하는 칠레산 생블루베리가 한 팩에 7500원. 냉동 블루베리를 입이 퍼레지도록 먹는 아이들 얼굴이 떠올라 한 팩을 집어든다. 마침 가격이 2900원까지 떨어진 바나나 한송이까지 사들었다. 총 10,400원, 오랜만의 과일 쇼핑이다.
언젠가는 마트에서 가격 고민 없이 과일을 마음껏 담는 사치를 누려보고 싶다. 특히 겨울딸기나 여름 복숭아, 가을 샤인머스캣 같이 눈을 뗄 수 없지만 선뜻 손이 가지 못한 비싼 과일들로만 한가득. 한번 집어 들었다가도 흠칫하는 가격에 내려놓고 말았던 숱한 나날들이 마침내 엄한 사치를 부리고픈 희한한 욕망으로 표출되는 걸까. 그러면서 만능식재료 고기, 급히 간식으로 때우기 좋은 냉동식품들은 별 고민 않고 담아대는 모습은 또 뭔가 앞뒤가 맞지 않는다. 같은 돈이라면 몸에 좋은 과일을 사는 게 백번 지당하거늘, 나는 왜 과일을 사는데 이토록 박한 것인가.
아무래도 내가 과일을 많이 먹는 편이 아니어서일 수 있겠다. 그러다 보니 애들에게 부지런히 챙겨 먹이지 못하고, 깨끗이 씻어 손질하는 그 일은 또 왜 그리 번거로운지, 이 게으름도 구매를 망설이는데 한 몫할 터다. 그나마 방울토마토는 껍질을 벗기거나 자를 필요 없이 씻기만 하면 되니 가장 많이 산다. 귤도 알아서 까먹으니 즐겨 사는 품목 중 하나. 이것들도 그나마 가격이 많이 올라 안 먹은 지 꽤 됐다.
가끔 어디서 과일을 받아오는 경우는 초반엔 잘 챙겨 먹지만 얼마 후 냉장고에 방치된 채로 형체를 알 수 없는 모습으로 마주할 때도 있다. 그럴 때 한없는 밀려오는 죄책감은 저릿하기만 하다. 과일을 통한 비타민 섭취는 건강에 중요하다는 걸 알면서도, 당장 눈앞에 멀쩡히 건강하게 돌아다니는 가족들을 보면 그 의무감이 잠시 흐려지고 만다.
또 다른 이유는 부담스러운 과일 값 때문이다. 특히 복숭아와 딸기, 천혜향 같은 과일은 덥석 통 크게 집어 들지 못한다. 한참 심사숙고한다. 몇 알 되지 않는 것들이 돈 만원 훅 넘어가니 장바구니에 쉬이 담지 못한다. 우리 가족이 제일 좋아하는 과일은 사과인데 작년에는 집에서 거의 구경을 못했다. 금사과라 불릴 만큼 가격이 천정부지로 올라 사다 먹을 엄두가 나지 않았으니까. 사과는 껍질째 깨끗이 씻어 사등분하고 씨도 도려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즐겨 먹는다. 맛도 맛이지만, 새콤달콤한 향을 음미하며 아삭하게 한입 베물 때 건강이 풀 충전된 듯한 그 느낌이 좋다. 작년엔 제철 과일이 워낙 비싸 오렌지 같은 수입 과일을 많이 먹은 것 같다. 오죽하면 알리에서 필리핀산 망고까지 주문해 먹었을까.
아이들이 집에 와서는 엄마가 오랜만에 사 온 과일을 보고 눈을 휘둥그레한다.
- 갑자기 생 블루베리? 먹을래. 먹을래. 얼른 씻어주세요~
알알이 씻어두니 아이들 입에 들어가기 바쁘다. 역시 내 입보다 아이들 입에 들어갈 때 만족스러우니 내 입은 벌릴 틈이 없다. 남편도 블루베리를 좋아하지만, 내가 직접 챙겨 주지 않으면 굳이 나서서 먹지 않는다. 아이들이 순식간에 먹어치우리란 걸 알고 있으므로, 본인 입보다는 애들 입에게 양보한다. 자식이 먹는 것만 봐도 배부르다는 우리 부부의 모양새는 흡사 흥부네 같다.
과일 값 비싸서 못 사 먹겠다고 앓는 소리 하기 전에 나의 소비 습관을 문득 돌아본다. 밖에서 습관처럼 사 마시는 커피 서너 잔만 줄여도 맛있는 과일들 넉넉히 살 텐데, 또한 배달이나 외식 대신 수고롭더라도 집밥으로 몇 끼 더 챙긴다면 식비야 얼마든지 절약되는 것인데 과일 코너 앞에서는 항상 망설이게 된다.
오랜만의 생과일에 눈을 반짝이며 달려드는 아이들을 보며, 과일 한 알의 가성비를 따진 나의 이율배반적인 태도를 반성했다. 건강에 보탬이 되고 산뜻한 미각의 기쁨을 위해서라도 더러 과일도 사다 먹일 것을. 과일 값이 비싸서 못 사 먹는다는 것은 궁색한 핑계일 뿐, 한껏 게으름과 편의성에 치우친 잘못된 소비 감각이 문제였다.
이제라도 몸의 건강을 위해 제철의 과일들을 간간히 챙겨 먹이는 습관을 길러보겠다. 그리고 커나갈 아이들만 생각할게 아니라 함께 나이 들어가는 남편의 건강도 챙겨줘야겠다. 기왕이면 노화방지를 위한 항산화 효과가 높은 과일들로다가. 알고 보면 남편은 포도를 좋아하는데 세척 난이도 '상'이다 보니 늘 장바구니 이에서 입구 컷을 당했다.
내 입보다 아이들 입에 먼저 들어가는 과일들을 보노라면 기억의 한 귀퉁이에 젊었던 나의 엄마가 떠오른다.
내가 초등학생 일 때, 엄마는 오랫동안 식당에서 홀 서빙 일을 했다. 식당에서 휴식 시간마다 직원들이 먹는 음식 중 간혹 수박, 배 같은 과일 나오면 엄마는 꼭 우리 몫을 포일에 싸서 가지고 왔더랬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서는 늦은 밤까지 엄마를 기다리던 어린 남매에게 그 과일들을 한입 가득 넣어주었다. 그 맛이 그토록 좋았었는지 시원하고 달큼했던 맛은 아스라한 추억으로 남아 있다. 당시 수박 한 통. 배 한알의 가격이 얼마였는진 모르겠다. 비싸서 잘 못 사 주니 그렇게라도 먹이고 싶었던 건지, 혼자만 맛있게 먹기엔 집에 있는 자식들이 눈에 밟혔던 건지, 엄마는 그 번거로운 수고를 기꺼이 하였던 것이다.
나도 내 엄마의 사랑만큼은 못되더라도, 우리 가족에게 제철 과일을 맛보는 즐거움을 주고, 상큼한 자연 미각의 경험을 누리며 건강을 챙기는 데에 소홀하지 말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