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출이자 대신 선택한 것
집도 가성비를 논할 수 있을까. 지역과 크기에 따라, 입지와 주거환경에 따라 천차만별인 집의 가치는 무엇을 기준으로 가성비를 따질 수 있을까. 일반적으로 최소한의 비용을 투자해서 시세 차익을 노리든지, 초기에 분양을 받아 낮은 금액으로 안정적 매입을 하든지 하는 여러 방법들이 있을 것이다.
우리 집의 경우 둘 다 해당되지 않았다. 앞선 글에도 언급했듯이, 돈을 불리는 부지런함보다 극안정적 성향이 높은 우리는 재테크에도 느려 그냥저냥 각자의 월급으로 쳇바퀴만 돌려댔다.
결혼 3년 차, 출산과 더불어 짐도 늘어나니 17평의 신혼집이 좁아지기 시작했다. 넓은 평수로 옮기고 싶은데 무섭게 오르기 시작하는 전셋값에 덜덜 떨다 알게 된 것이 장기전세주택. 서울시에서 20년간 주변 시세보다 낮은 금액으로 안정적 주거를 지원해 주는 제도였다.
일단 전세 보증금은 생각도 않고, 경쟁률이 높은 중소형 평수대신 과감하게 대형 평수를 지원했다. 덜컥 붙어버린 기쁨은 잠시, 곧 돈이 문제가 됐다. 대출이란 방법도 있었을 텐데 당시에는 외벌이 상황에서 이자 갚을 엄두가 나지 않았던 것 같다.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다가 대안으로 시부모님과의 합가를 떠올렸다. 시부모님이 사시는 집에 전세를 놓고, 그 보증금으로 우리 전세금에 보태는 일종의 전략적 가정 합병. 대출 이자 대신 무모하게 시댁 합가를 선택한 것이다.
그때 "단칸방에서 살더라도 니들끼리 살아라"던 친정엄마의 말을 들었어야 했는데. 이 후회는 살면서 불쑥불쑥 고비가 찾아올 때마다 내 마음을 할퀴어댔다.
아무리 넓은 새 아파트여도 시부모님과 들어가니 기쁨과 감사는커녕 불편함만 가득했다. 싸게 새 집에 들어왔지만 가성비며 가심비며 뭐고 간에 그저 다시 돌아가고 싶었다. 아무리 좋은 시부모님이라도 같이 사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독립해 가정을 일군 자녀가 원가족 부모와 산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닌데 멋모르고 그렇게 여차저차 적응하며 살아갔다.
아무튼 두 아이를 수월하게 길렀으며, 차곡차곡 돈을 모은다는 것이 그나마 합가를 정당화시키고 살아가는 버팀목이었다 해야 하나. 같이 사는 동안 시부모님은 손주들의 사랑스러운 성장기를 함께 지켜보셨고, 이기적이지만 나도 할 만큼 했다고 생각한 것 같다. 그 뒤로 빠른 시일 내에 분가했다면 더할 나위 없는 완벽한 계획이었겠지만, 인생지사 새옹지마.
몇 년 후 아버님이 소천하시고 오래 지나지 않아 어머님은 갑작스럽게 암 선고를 받아 고된 투병을 하셨고, 같이 사는 내가 보호자의 역할을 하게 됐다. 어머님이 호전되실 무렵에는 곪아터진 내 우울증의 불씨가 부부 갈등으로 이어지며 마른 장작 타듯 번져 나갔다. 한동안 살얼음판과 폭풍 같은 시간들을 지나 마침내 극적인 분가를 할 때까지, 참으로 지리멸렬했다.
결국 잠깐 살다 분가하겠다는 처음 계획과 달리 합가는 7년 반이 지나서야 끝났다. 여전히 대출은 남았지만, 모두를 위해 경제적 합병을 종료하며 2019년 여름쯤 온전한 독립 만세를 외쳤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어머님은 암을 기적같이 극복하셨고 마침내 건강하게 완치되셔서 본가에서 편안한 노후를 누리고 계신다. 그리고 우리는 같이 살던 때보다 적당한 물리적, 심리적 거리를 유지하며 사이좋고 편안하게 왕래하고 있다.
인간의 삶은 생애 주기마다 다양한 과업을 거치며 배우고 성숙한다. 결혼 후 가정을 이룬 뒤에는 완전한 독립을 이루어야 하지만 우리는 선택적 의존이라는 문제가 있었다. 마음은 독립했다 한들, 한쪽 발은 애매하게 걸친 기이한 독립. 부모의 재산이 넉넉하여 지원받아 한번에 이사를 갔다면 문제가 없었을까. 글쎄, 그래도 살아가면서 겪는 또 다른 모양의 문제와 마주했을 수도 있다.
부모의 든든한 후원을 받아 집을 사고, 일찌감치 부동산에 눈을 떠 재산을 불리고, 시세 껑충껑충 아파트를 분양받은 이들을 보면 당연히 부럽다. 우리도 부지런히 알아보고 요령 있게 재테크를 했어야 했나 하는 후회는 늘 있다.
하지만 내 선택을 후회하거나 안쓰럽게 바라보는 내 시선이야말로 나를 가장 가난하고 초라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분가 후에야 깨달았다. 모은 것, 불린 것 없이 제자리라고 신세한탄만 하기엔, 우리 가정은 그 후 평안했고 행복하고 앞으로도 잘 살 것이라 확신하므로. 정신 승리까진 아니고, 미래에 대한 불안과 걱정이 없다면 그것도 당연히 거짓말이겠다. 그래서 마른 수건을 물 짜듯 아끼며 살다가도, 충동적 소비를 하다가도 우리 형편에 맞게 중심을 잡으려 노력한다. 그래서 가성비주의자의 삶을 선택했다.
여전히 우린 대한민국에 버젓한 집 한 채 없다. 그 대신 2033년까지 안정적으로 거주할 수 있는 넓은 아파트가 있다. 대출 이자대신 시댁 합가를 선택하며 혹독한 수업료를 지불한 집이다.
이 집에서의 삶은 단순 명료하다. 부유하지 않아도 성실하고 부지런한 삶을 사신 부모님처럼, 우리 부부 또한 자녀들에게 본을 보이며 살도록 노력할 것이다. 물려줄 재산은 없지만. 제 스스로 행복하게 밥벌이하며 살아갈 수 있는 정서적 기반과 온전한 사랑만은 넘치도록 채우리라 다짐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