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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초의 교육 불안, 72만 원 그림책 전집

가성비가 아닌 엄마만족

by 다독임 Feb 22.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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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년 전, 첫째 아이 출산 후 모유수유 다음으로 의욕을 다진 분야는 바로 교육. 그저 뒤집기와 되집기에 골몰하며 굴러다니는 6개월의 아기를 향해 말이다.

그러고 보니 요즘 뜨거운 화제인 4살 제이미 맘(개그우먼 이수지) 떠오른다. 4살 아이를 수학학원 원어민 영어학원에 보내 제기차기 과외를 알아볼 만큼 앞뒤 안 가리는 열정적 의욕. 물론 마음만 그랬다는 거다. 또한 클레어가 아닌 지퍼 달린 수유복이라는 복장 차이도 있고.




당시 하루종일 집에서 젖먹이 아이와 씨름하며 대화할 사람 없던 시기에 해사한 얼굴로 나를 찾아온 이가 있었으니 바로 ㅇㅈ그림책 영업사원이다. 비슷한 시기에 출산한 지인의 소개로 아무 의심 없이 집으로 맞아들였는데, 그녀는 아기의 창의력 발달 그림책의 교육적 가치를 설파하는 사람이었다. 초보엄마의 힘듦을 이해하고 공감하며 우리 아기의 미래에 대한 청사진을 그려주는 그분에게 나는 마음의 빗장을 단숨에 열어젖혔다.


영사님에게 건네받은 팸플릿에는 시기별로 구비해야 할 각종 전집들이 총망라되어 있었다. 오감발달, 자연관찰, 생활인성 등 주제도 다양한 전집 목록을 보니 아이 교육에 대한 욕심이 서서히 피어나기 시작했.

영업사원이 6개월 꿀민이에게 추천한 것은  따끈따끈 갓 출시된 아기감각그림책 전집이었다. 각종 놀이교구와 인형, 커다란 집책과 각종 CD, 다양한 모양책으로 구성된 그 전집은 자그마치 72만 원.

그녀가 다녀간 뒤, 여기저기서 물려받은 오래된 전집들로 채워진 우리 책장을 보았는데 당시 그렇게 초라해 보일 수 없었다. 바야흐로 아이 교육에 대한 태초의 불안이 시작된 것이. 뭣도 모르는 초보엄마의 과한 욕심과 걱정이 꿈틀꿈틀.


-저것이 우리 아기의 창의력을 키울 있을까, 

-아기의 예술적 감각을 심으면서 정서적 안정과 즐거움을 줄 수 있을까.

-지금 안 읽어주면 안 될 것 같은데. 당장 필요할 것 같은데.


그날 이후 전집을 사겠다는 단호한 결심이 섰지만, 일단 남편과의 상의가 필요했다. 하지만 아내의 퇴직 이후 외벌이가 막막했을 남편에게 72만 원 얘기를 꺼내기란 쉽지 않았다.

아기의 오감을 자극하며 창의력을 키우고 정서적 즐거움과 안정을 줄 그림책 전집, 명분이야 충분했지만 가격이 문제였다. 초가성비주의자 남편을 설득하기도 전에 예상대로 남편은 무시무시한 금액의 그 책을 꼭 사야겠냐며 시큰둥했다. 그러나 전집을 사고 싶어 끙끙대는 내가 안 돼 보였기 때문이지 그 역시 아들바보 초보아빠였기 때문인지, 결국은 간절한 바람대로 구입에 성공했다.


팸플릿에서 본 화려한 구성 사진과 달리 막상 들여놔보72만 원어치의 무게감은 없었다. 원래 물건이란 것이 내 소유가 되길 갈망할 때 가장 가치 있어 보이지 않은가. 아무튼 돈값은 해야 한다는 강박에 매일매일 입이 닳도록 읽어주고 책으로 놀아주시작했다. 들려주는 이야기에 까르르, 그림을 짚으며 옹알옹알, 팝업북을 조작하며 눈이 반짝반짝. 아이의 반응 하나하나에 감격하며 나의 선택을 의심치 않았다.


- 어쩜 이렇게 좋아할까. 사기를 정말 잘했어.

- 비싼 거라 마감이 확실히 다르네. 모서리가 둥글어서 다칠 일도 없고.

- 물고 빨면 어때. 무해한 콩기름 인쇄라는데.


아이가 기고 걸어 다닐 때까지 부단히 읽어주었던 그 전집은, 그 후 세 살 터울 둘째와 친구의 쌍둥이 자녀에게까물림되며 오래오래 훌륭한 값어치를 했다. 이렇게 쓸모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72만 원은  여전히 머릿속에 남아있을까. 육아에 찌들어 초췌하고 짠내 풀풀 나던 나의 모습이 떠올라서, 혹은 통 크게 서너 질을 구입한 또래 엄마에 대한 선망과 부러움 같은 복합적 감정들어딘가에 숨어 있었나 보다.




아쉽게도, 얼마 지나고 보니 싸고 좋은 책, 가성비가 하늘을 찌르는 책들은 널리고 널렸음을 깨달았다. 내가 산 전집대기업 마케팅과 기획력, 브랜드 퀄리티라는 후광이 분명 있었지만 가성비를 따진다면 글쎄.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면 사지 않을 것 같다. 

수년 전 그토록 사고 싶어 했던 것도 그저 엄마의 자기 위안과 만족을 위한 행동이었음을 이제는 안다. 아기는 엄마의 편안한 품과 낭랑한 목소리 만으로도 충분했을 텐데.  

하지만 후회하지 않는다. 그 일을 계기로 나는 유아전집에 눈을 떠 유명하고 가성비 좋은 각종 전집 목록을 꿰뚫게 됐고, 중고거래와 되팔기를 통해 큰돈 들이지 않고 다양한 책들 읽어 주었으니. 또한 그림책을 통해 책 육아의 세계로 자연스레 진입했고, 덕분에 꿀민이는 누구보다 책을 좋아하는 아이로 자라났다.


지금 돌아보면, 당시 전집 영업사원의 부추김과 설득은 마치 요즘의 선행 불안과 비슷한 느낌이다. 사지 않으면, 하지 않으면 우리 아이만 뒤처질 것 같은 이유 모를 불안. 그것을 덜어내는 것이 올바른 교육을 실천하는 첫 단추라는 것을 지금도 되새긴다. 


글을 마무리하며, 그 시절 책뿐만 아니라 아기옷, 아기용품, 장난감, 교구들을 조금이라도 싸게 사보겠다고 허리띠 조르며 애쓴 그 시절의 초보엄마에게 토닥토닥 다독임을 건네고 싶다. 


"비싼 옷, 좋은 장난감이 뭐가 중요해. 각박하게 살았어도 애들 이렇게 건강하고 행복하게 잘 자랐잖아. 잘 키운 거야" 하고.






대문그림_ 스마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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