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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께 용돈 받기

어떤 마음으로 받을 것인가

by 다독임

그저께 아침, 휴대폰에서 은행 입금 알림이 울렸다. 30만 원. 남편의 생일에 맞춰 친정 엄마가 보낸 용돈인데, 사위의 계좌번호를 모르니 딸의 계좌로 대신 송금한 것이다. 네가 직접 봉투에 담아 전해주라는 당부 전화도 이어 왔다. 뭘 이렇게 많이 보내냐며 타박하는 딸에게, 그래도 엄마 아빠가 아직은 벌 수 있으니 조금이라도 줄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했다.


매년 가족 누군가의 생일이 돌아오면 주말에 다 같이 모여 밥을 먹는데, 어쩌다 시간을 맞추지 못할 때는 이렇게 용돈 송금으로 두루뭉술 넘어간다. 결혼한 후론 매년 명절이나 생신마다 양가 부모님들께 용돈 봉투를 드리지만, 나와 남편의 생일 때만큼은 우리가 공식적으로 용돈을 받는다. 남편 회사의 보너스처럼 신나게 받는 기분은 아니지만 애써 좋은 척, 생일 용돈만큼은 군소리 없이 받는다. 이 용돈을 받을 때만큼은 아주 잠깐, 지난 한 시절 건재했던 부모님들을 느낀다. 어릴 때 돼지갈비 집에서 통 크게 외식시켜 준 아빠가 생각나고, 중학생 때 백화점에서 둥근 코 단화를 사 주던 젊은 엄마의 모습이 떠오른다.


넉넉한 형편에서 나오는 돈이 아닌 걸 알기에 생일 용돈을 받는 마음은 불편과 부담, 미안함 어디쯤이다. 명절에 드렸던 용돈을 다시 되돌려 받는 느낌이라 받는 손이 영 민망하다. 은행을 통해 그 돈을 받을 때는 도로 이체하고 싶지만 차마 그러진 않는다. 어떤 마음으로 그 돈을 주는지 알고 있으므로 어쩔 수 없다. 봉투를 받으려 내미는 손이 선뜻 뻗어지지 않아 몸을 비비적 대면서 구시렁대는 말도 덧붙인다. "뭘 이렇게 많이 넣었어. 안 주셔도 된다니까"


칠십 넘어서도 경제 활동을 한다는 것은 건강하다는 방증이기도 하지만, 여가처럼 소소하게 하는 일과 생계를 위한 일의 성격은 분명 다를 터다. 택시 운전을 하고 청소 일을 하는 것은 그 연세에는 분명 고단하고 힘든 일일 텐데, 생계의 방편이므로 그만둘 수는 없다. 오히려 일을 할 수 있음이 다행이고 감사하다는 그 모습에 나는 안쓰럽고 안타까우면서 한편으로 안도한다. 정기적으로 생활비를 챙겨 드리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자식에게 일정 부분의 부담을 덜어주기 때문이다. 그 철없는 안도의 마음은 때로는 죄책감이 되어서 설날과 추석, 생신 때가 되면 일부러라도 봉투를 두툼하게 채우려 노력한다. "뭘 이리 많이 넣었냐. 애들 한참 돈 들어갈 때고 너네도 빠듯할 텐데."라는 말은 늘 듣는 레퍼토리다.

크게 병원 신세 질 일 없던 부모님은 몇 년 전 실손 보험을 해지했다. 매달 내는 수십 만 원의 보험금이 부담이었을 것이고, 그 돈을 차라리 저축하는 게 낫겠다며 선택한 방법이었을 것이다. 당시 그 마음이 이해되면서도 별일 없길 바랐는데 이제야 병원비에 대한 부담을 맞닥뜨리게 되었다. 여러 검사와 외래를 오가며 부담될 그 비용에 대해 부모님은 별 내색 않지만, 지켜보는 마음이 영 편치 않다. 일단 나는 몸으로 때우는 방법을 택했다.


요즘의 주된 업무는 병원에 동행하는 일. 앞장서서 큐알 코드를 찍고 들어가 아빠와 미로 같은 병원 구석구석을 익숙하게, 진료 안내문을 들고 각 단계를 착착 이행하는 것이다. 의사의 말을 하나 놓치지 않으려 애쓰고 앞으로의 치료 방법과 계획, 일정에 대해 부모님께 다시 쉽고 친절하게 설명하는 것이다. 병원 일정 챙기느라 바쁜 딸에게 미안해하는 엄마 아빠 앞에서 툴툴대지 않고, 다음 만남을 기약하며 웃으며 헤어지는 것이다. 그전에, 한술 더 떠서 저 멀리 지방에서 병원에 오는 이들에 비하면 우리는 정말 쉽고 편하게 다니는 거라며 싫은 내색을 하지 않는 것이다.


어제 병원에서 신경외과 의사는 내년 2월에 본인은 해외연수를 간다며 다른 의사에게 아빠를 연계해 주겠노라 했다. 어서 알츠하이머 치료도 시작해야 하는 우리의 조급만 마음과 달리 그는 느긋하고 무심했다. 그나마 크기가 작은 양성종양이고 별 증상이 없으니 일단은 추이를 지켜보는 게 어떻겠느냐며 진료를 마무리했다. 다음 주에 연계받은 새로운 의사를 만나러 와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지만, 당장 수술을 권하지 않고 지켜보자는 소견, 우리의 사정을 알고 빠른 시일로 예약을 넣어준 간호사, 급기야 병원이 근거리에 있다는 것조차 감사하기로 한다. 이렇게 수시로 병원 올 일이 생기니 올해 수업 시수가 적었던 것조차 어쩌면 다행이었다.

앞날에 대한 걱정을 미리 당겨하지 않으려 한다. 예전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 인생은 절대 계획대로 되는 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최악인 것 같았으나 돌아보니 최선이었던 것도 있었고, 지나고 보니 버릴 것 없던 시간들이 살면서 수두룩했었다. 내가 언제 이렇게 아빠와 아무렇지 않게 일상의 대화를 나눌 시간이 있었던가. 어제는 저녁마다 엄마와 걷기 운동을 시작한 아빠를 엄청 칭찬해 드렸다. 병원을 오가며 대화를 나누는 이 시간들, 언젠가 그리워질 소중한 추억이 되리라 생각하고 싶다.


글의 사진을 고르려고 휴대폰 갤러리를 훑어보다가 한 사진에서 눈길이 멈췄다. 한 달 전쯤 나의 상황을 알고 보내준 작가님의 떡케이크였다. "좋은 일만 생길 거야" 그 여덟 글자에 얼마나 눈물이 쏟아졌는지. 때로는 이렇게 예기치 못한 따뜻한 위로의 마음에서 해낼 만하다고, 해낼 수 있을 거라고 용기를 내어본다.


자전거 뒤에 나를 태우고 집까지 앞자리를 지키던 아버지가 지금은 지팡이에 의지해 걷는 것도 힘겨워 보일 만큼 약해진 노인이 되었다는 게 실감이 안 날 때도 있어. 고맙다. 너 덕분에 아버지에 대해 생각을 해볼 수 있었어. <아버지에게 갔었어_ 신경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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