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딴방> 30주년 개정판 기념, 신경숙 작가님 북토크
평일 저녁 7시 반, 신논현역 사거리 한 복판에 우뚝 솟은 교보타워 23층, 신경숙 작가님의 북토크가 열리는 곳으로 향한다. 강남대로 한 복판을 걸어가며 훈훈했던 늦가을의 밤공기나 크고 화려한 매장들의 불빛, 바쁘게 오가는 사람들의 모습 속에서 잠시 이질감을 느끼지만 곧 두근두근 설레고 말았다.
보통의 날이라면 저녁을 먹고 주방을 정리한 뒤 소파에 앉아 무탈했던 하루에 안도하며 한숨 돌릴 시간. 해가 지면 동네 밖으로 잘 나가지 않는 내가 이 안락함을 포기하고 복잡한 시내로 나가다니, 괜스레 두근댄다. 모처럼 기분 좋은 일탈이다. 가족들 저녁으로 카레 한솥 끓이고 나왔으니 발걸음도 사뿐사뿐.
연말이 가까워오니 올해 읽은 책들을 돌아보게 됐다. SNS에 하나씩 기록해 두었던 이 다독의 기록들은 나를 끊임없이 여러 모양으로 다독여주는 소중한 아카이브가 되었다. 몇 줄 채 안 되는 이 짧은 기록과 생각들은 내 마음속 씨앗이 되어 좋은 말과 생각들로 자라나도록 끊임없이 싹을 뻗었다. 비록, 마음 밭이 거칠고 황량하여 쉬이 푸르러지지 않는다는 게 문제였지만.
어떤 책이든 여러 모양의 유익이 있을 텐데, 올해 나에게는 무슨 책이 가장 유익했을까. 나의 삶 어떤 한순간에 꽂히고 말았던 책은 무엇이었을까. 일상의 쾌락이든 자아성찰이든 감동과 눈물이든, 배움과 통찰이든, 무수한 유익 중에서 무 뽑듯 하나 쑥 뽑아내기란 도무지 쉽지 않았다. 그러다 발견한 것이 신경숙 작가님의 <외딴방> 30주년 개정판 기념 북토크 소식이었다. 순간 올봄에 읽었던 <외딴방>이 떠올랐다. 회색 벽돌같이 마냥 무겁던 그 책을 읽으며, 왜 이 책을 지금에야 읽게 되었나 싶은 안타까움과 그래도 이제라도 읽게 되어 다행이란 생각이 교차했었다.
북토크 이후, 사인을 받기 위해 줄을 서있는 동안 출판사 직원이 나눠준 포스트잇에 어설프게 내 이름을 썼다. 본명 석자를 쓸까 필명을 쓸까 고민하다 독자로서 팬심으로 찾아온 자리이니 내 이름 석자를 썼다. 그러다 갑자기 왠지 숨겨둔 필명이 아쉬워서 찍찍 세줄을 긋고 얼른 '다독임' 세 글자로 바꾸었다. 그리고 얼른 짧은 메모를 덧붙인다. 제 안의 외딴방에 빛을 비춰준 책-이었다고.
이름을 지우고 왜 다시 썼냐고 묻는 작가님에게 수줍게 말씀드렸다.
"글쓰기 플랫폼에서 쓰는 필명이에요. "
세상에, 한국 문학의 거장 앞에서 필명-이라고 말하는 게 얼마나 불경스러운가. 멋쩍게 사인을 받는 어색한 순간에 잠시, 작가님이 써 내려가는 글자들을 보다 갑자기 뭔가 한마디를 하고 싶었는데 생각도 않은 엉뚱한 말이 나왔다.
"저희 아버지가 최근에 알츠하이머 판정을 받으셔서 마음이 힘들었는데, 작가님 책 <아버지에게 갔었어>를 읽고 많이 위로가 되었어요."
이 한마디를 내놓는 잠깐의 몇 초, 순식간에 눈물이 한가득 차올랐다. 작가님은 잠깐 사인을 멈추고 한참 지긋이 바라보시더니,
"그 책이 나오고 3개월쯤 있다가 우리 아버지는 돌아가셨는데... 인생이라는 게 참..."
작가님도 지난 감정이 올라오셨는지 더 말씀을 잇지 못하셨지만, 눈빛으로 다독여주신 그 짧은 순간의 내 감정은 글로 도무지, 쓸 재간이 없다. 자꾸만 눈물이 쏟아져서 고개만 꾸벅하곤 도망치듯 후다닥 내려왔다.
"인생이라는 게 참..."
작가님이 끝에 맺지 못한 말은 무엇이었을까.
사실 내가 요즘 무척이나 찾고 싶은 답이다. 책을 통해 누군가의 인생을 훔쳐보며, 멀게는 수백 년 전부터 현재, 상상 속 미래까지 시공간을 넘어 무수한 타인의 삶을 자꾸만 들여다보는 게 꼭 그 답을 찾으려고 애쓰는 것만 같다. 아빠가 점점 안 좋아질 것 같은 슬픔에, 엄마에 대한 안쓰러움과 걱정에, 앞날에 대한 막연한 불안과 걱정, 지난날의 후회와 자책, 아이들이 쑥쑥 커가는 아찔한 속도에서 느껴지는 멀미, 방향도 속도도 제멋대로 뒤섞인 알 수 없는 혼란한 지금에서 어떻게든 중심을 잡아야 했으므로.
애초에 약 처방 같이 똑 떨어지는 하나의 답이란 없을 거란걸 알면서도 자꾸만 찾아 헤맨다. 그러다 어설프게 깨달은 것은 지금 이 시간들을 잘, 후회 없이, 최선을 다해 살아내는 것이 답에 가장 근접한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이 역시 애매모호하고 난해한 답이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