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현대사(37)-대약진 대실패(5)
1958년 허난성 전체의 양식 생산량은 실제로는 281억 근이었으나, 당시 허난성 제1서기 우즈푸(吴芝圃)는 중앙에 702억 근이라고 허위 과장 보고했다. 그 다음해인 1959년에는 성의 양식 생산량이 다시 전년 대비 23% 감소하여 217억 근으로 줄었으나 우즈푸는 오히려 전년도에 허위로 부풀려서 보고한 생산량에 다시 30% 증가한 1000억 근 생산했다고 중앙에 보고했다.
지방 행정단위 중 가장 상위 층차(層次)인 성 위원회 제1서기의 수준이 이 정도였으니 그 아래 층차의 행정단위와 기층 단위 간부들의 수준과 행태도 대략 짐작할 수 있다.
문제는 이같이 허위 과장 보고한 양식 생산량 기준에 따라 국가에 납부해야 하는 양식의 양이 대폭 증가하여 실제 양식 총생산량의 40% 이상이 되었다는 점이다.
1960년에는 실제 양식 생산량이 전년보다 다시 18% 감소한 177억 근이 되었고, 농민 중에 아사자가 속출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우즈푸는 신양지구 서기로부터 당지 농민이 굶어 죽었다는 상황 보고를 받은 후에 이렇게 말했다. “중국 역사상 어느 왕조에서나 기근 때에는 사람이 서로 잡아먹는 상황도 발생했다. 농민이 굶어 죽는 것이 그리 대수로운 일은 아니다.”
성 위원회는 국가에 납부해야 할 양식을 거둬들이기 위해 농민에 대한 양식 징수 지표를 정하고 하부 행정단위로 하달, 시행하면서 ‘반만산(反瞒产), 즉 생산량을 속이지 말자는 운동을 전개했다.
기층 농촌의 간부들은 할당받은 목표량을 채우기 위해서 농민들이 생존을 위해 숨겨둔 식량을 찾아내려고 공권력과 공안 무력을 사용해서 농민들을 묶고, 매달고, 때리고, 가두고, 밤잠을 안 재우고 고문하고, 집을 헐어 부수고, 거리로 끌고 다니면서 조리돌리기 등 온갖 잔인한 짓들을 하면서, 그 같은 행패를 ‘반혁명 투쟁’ 또는 ‘반우파 투쟁’을 하는 것이라고 당당하게 떠벌였다.
기실 중국 농민들 입장에서는, 장구한 역사 기간 동안 당해온 수탈과 행패에는 익숙한 상태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번에 붉은 완장을 차고 나타난 자들은 이전의 지주나 마름들과 또 달랐다. 이들은 농민들을 잔인하게 수탈하면서도 "사회주의 혁명과 당을 위해서’라면서 매우 당당하고 거리낌 없이 행동했다.
이 같은 상황 속에서 가련한 중국 농민들은 수확한 곡식 중 생존에 필요한 최소량의 양식조차도 남기지 못하고 뺏긴 후에 굶주리고 초근목피로 연명하다가 부종병(浮肿病)에 걸리고 굶어 죽었다. 이제는 열심히 농사를 지어본들 생존에 필요한 양식조차 남기지 못하고 강탈당하고 굶주려야 하는 국가 노예 처지가 된 것이다. 이 같은 상황에서 농민들의 생산에 대한 의욕과 적극성이 급속하게 저하되었고, 설상가상으로 가뭄, 메뚜기 떼 등 자연재해까지 겹치면서 농업 생산량이 더욱 빠르고 극심하게 줄었다.
그런데도 허난성 위원회는 여전히 과다 생산 목표를 책정하고, 중앙에 식량 생산량 실적을 거짓으로 부풀려서 보고하고, 하층 농촌 조직과 단위에는 "식량을 숨기는 것은 반혁명"이라고 몰아세우면서 더욱 많은 식량 징수를 독촉했다.
현 위원회 간부들이 할당량을 채우기 위해 농민들을 때리고, 조리돌리고, 가두고, 집을 부수고, 가축을 뺏어가는 일이 일상이 되었다.
이 같은 횡포와 굶주림을 피해 외지로 나가 유랑, 구걸하는 농민들이 증가하자 신양지구와 허난성 위원회는 각 촌의 길목 입구 등에 무장한 보초를 세우고 관할 구역 내 촌민들이 외지로 나가려는 것을 통제하고 불응할 경우에는 사살까지 하였다.
그 결과 슬픈 농민들은 허난성 신양지구에서만 100만여 명이 굶어 죽었고, 성(省) 전체 아사자 수는 200만~300만 명에 달했다. 중국 역사에서 농민의 처지란 늘 비슷했지만, 중공 통치하 대기근 시기의 중국 농민들은 더욱 슬픈 처지에 있었다.
1958년 11월에 허난성 미현(密縣)에서 굶어 죽은 농민 사례가 최초로 보고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중국 전국의 기근 상황이 드러나기 시작한 것에 불과했다. 굶주리며 부종병에 걸리고 결국에는 죽어간 농민의 수가 갈수록 증가했다.
후에 중공중앙에서 파견한 조사팀의 조사 결과 보고에 의하면 수많은 촌락에 인적이 끊겼고 허난성 광산현에서만 20만여 명이 굶어 죽었고, 심지어는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은 참상도 있었다.
이 같은 신양지구의 참상은 비교적 일찍 드러나고 폭로되었을 뿐이다. 그 시절에 식량 부족과 아사자의 발생은 중국 전국에서 보편적인 현상이었다.
1958∼1962년 대약진운동 기간 중 중국 전국에서 이른바 "비정상 사망자", 즉, 굶어 죽은 백성 숫자가 약 3000만∼5000만 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이 중 쓰촨성만의 아사자 수가 1200만 명으로 추산되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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