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현대사(38)-대약진 대실패(6)
이어서 1954년에는 헌법을 제정하면서 ‘공동강령’과 함께 자신이 주장했던 ‘과도기로서의 신민주주의 단계론’을 완전히 폐기해 버렸다. 그리고 ‘사회주의 건설 총노선’을 채택하고 소련보다 더 빠르게 사회주의 건설을 추진해 짧은 기간 안에 영국과 미국의 생산량을 따라잡고 추월하겠다며 ‘대약진(大躍進)’, ‘단번 도약’과 같은 구호를 내걸고 인민공사화 운동을 밀어붙였다.
그러나 그 결과는 대실패였다. 중국정부의 공식 관방 기록에서도 대약진과 인민공사화 운동에 대해서는 ‘사회주의 건설 노선을 탐색하는 과정 중의 엄중한 실책’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즉, 객관적 경제발전 규율을 무시하고 주관적 의지와 노력을 과대평가했고, 과다 지표, 맹목적 지휘, 허풍과 과장 풍조 및 공산풍(共产风) 등의 착오가 난무한 결과 공업과 농업생산, 그리고 전체 국민경제에서 축적과 소비 간의 비율 균형을 극심하게 파괴했다고 지적·비판했다.
마오는 왜 당초의 신민주주의 단계라는 구상을 대약진과 인민공사화 운동으로 바꾸고 조급하게 밀어붙였을까? 마오의 생각을 바꾸게 한 자신감의 배경은 첫째, 한국전쟁의 승리와 이 전쟁 기간 중 진행된 공산당 독재체제의 공고화로 인한 자신감 고조, 둘째, 국방 역량의 강화와 토지혁명투쟁을 포함한 각종 사회주의 개조 운동의 순조로운 추진, 재정 상황 호전, 국영경제 및 사회주의경제 요소 증가 등 국내 형세의 호전, 셋째, 세계 자본주의 진영 내 모순 증가 등 유리한 국외 환경 등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정치가의 윤리를 ‘신념윤리’와 ‘책임윤리’로 구분한 막스 베버의 구분 기준으로 보면 (마오쩌동과 같은) 이 같은 정책결정 스타일은 전형적인 신념윤리에 속한다. 베버는 신념윤리를 신봉하는 생디칼리스트(syndicaliste)들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순수한 신념에서 나오는 행위가 나쁜 결과를 가져온다 하더라도, 이들은 그 책임을 자신의 행위가 아니라 세상 또는 타인들의 어리석음 탓으로 돌린다. 심지어는 인간을 어리석게 창조한 신에게 돌릴지도 모른다."
마오는 ‘인민의 행복한 생활’을 실현하기 위해서라고 말하면서, 정작 수많은 인민들을 굶주림 속으로 내몰고 굶겨 죽이는 결과가 초래될 일을 밀어붙였다. 이 같은 확증편향과 소시오패스적 성격은 마오쩌동뿐만 아니라 거창한 이념을 들먹이면서 새로운 사회구조를 구축하겠다고 주장하는 혁명 이론가와 정치가 등에게서 자주 볼 수 있다. 마오는 늘 ‘인민과 사회주의혁명을 위해서’라는 명분을 내걸었지만, 실제 실천 과정에서는 그와 상반되고 역행하는 행동을 거리낌 없이 밀어붙였다. 그리고 그 정도가 갈수록 심해졌다.
그는 늘 각 건설사업 항목을 좀 더 빨리 진행하고 싶어 했다. 가장 빠른 속도로 중국의 낙후한 경제, 빈약한 물질 기초, 피동적 국면을 돌려세우고 싶어 했다. ‘신중국’ 정권 출범 초기에 경제가 수년 연속 고속 성장하자 그만 냉정을 잃고 조급한 마음으로 대약진과 인민공사화 운동을 발동했다. 그는 수억의 전국 인민을 동원하여 혹독하게 일하면 수년 또는 십수년 후에 영국을 추월하고 미국을 따라잡을 수 있다고 확신한 듯하다.
오늘 대다수 중국 인민들과 우리는 그러한 마오의 확신과 시도는 애당초 실현 불가능했고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고 여긴다. 그러나 당시에 마오는 ‘일이란 사람이 해내는 것이므로, 중국 인민의 열정으로 짧은 시간 내에 전국의 경제와 문화 건설을 비약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고, 머지않아 번영·부강한 중국을 실현할 수 있다’고 굳게 믿은 듯하다.
그러나 객관적 조건과 자연 규율, 경제 규율을 무시하고 의욕만 넘쳐서 과도히 높게 설정한 대약진을 밀어붙인 결과, 일순간에 전국 도처에 ‘1무(亩)당 식량 생산량 1000근, 1만 근’ 같은 허풍 ‘기적’을 달성한 현들이 연이어 출현했다.
이와 함께 강(钢), 철(铁), 석탄 등 주요 광공업 산품의 생산량도 두 배 이상씩 증가했다는 허풍, 과장 보고가 연이어 올라왔다. 마오쩌뚱을 비롯한 중공중앙 간부들은 흥분하고 뇌가 과열되기 시작했고, ‘영국을 추월하고 미국을 따라 잡자’는 목표 달성 시점을 부단히 앞당겼다. 가령, 영국 추월 시점을 15년 후에서 10년 후로 당겼고, 다시 7년 후로, 또 다시 5년 후로 당겼다.
대약진과 함께 농촌인민공사화 운동을 추진한 지 불과 수개월 만에 중국 전국의 수억 농민은 소유한 토지는 물론 가축, 농기구들까지 모두 ‘공공(公共)’에 내놓아야 했다. 심지어 지방에 따라서는 농민의 주택, 놋쇠 솥 및 생활용품도 ‘공산주의로 가는 과도(过渡) 기간 중의 공(公)’이 되었다.
그러나 객관적 경제 규율과 토지 소유에 대한 농민의 열망을 무시하고 농민들을 집단노역에 동원해서 농사를 방치하게 한 이 운동은 대실패했고, 그 결과는 처참했다.
불과 1~2년도 안 되어서 전국적인 대기황(大饑荒)이 나타났고 ‘비정상 사망자’로 기록되는 아사자 수가 급증했다. 그 많다던 양식이 도대체 모두 어디로 가버렸단 말인가?
아무튼 ‘기적적 식량 증산’ 같은 건 애당초 있지도 않았다는 사실을 일반 백성들이 알게 되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농촌 기층의 불량배, 건달 등까지 포함된 붉은 완장을 찬 자들이 인민공사화 추진 등 급진적으로 결정된 당 중앙의 결정과 의도를 관철하겠다면서, ‘첫째 공평, 둘째 조정(一平二調)’, ‘큰 공장, 통 큰 운영’ 등 중앙에서 하달받은 구호를 외치면서 경작제도와 경작 기술을 개정한다는 등 법석과 소동을 떨어댔지만, 식량과 면화와 식용유 등 작물 생산량이 (증가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역대 최대 폭으로 감소했다.
공업 생산에서도 판을 과도하게 크게 벌이고 의욕과 욕심을 부리며 난잡하게 항목을 정했다. 과도하게 강철 증산을 강조했으나 오히려 종합 경제 균형이 파괴되었고 기타 산품의 생산 환경도 심각하게 교란되었다.
또한 적지 않은 규정과 제도들을 폐지한 결과 기업 관리 분야에 혼란을 조성했고 그 영향으로 경공업과 중공업 모두 심각하게 훼손되어 생산량 수치가 수직으로 떨어졌다.
중국현대사 #중국공산당사 #대약진 #농촌인민공사 #모택동_마오쩌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