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산(庐山)에 와서 회의 참석중이던 펑더화이는 이 같은 회의 분위기와 진행 상황에 대해 매우 우려했다. 아래는 당시 펑더화이의 비서가 회고한 말이다.
"회의 시작 후 일주일이 지나자 펑총(彭总)의 정서가 뚜렷하게 변했다. 웃는 일도 적어지고 소조 회의에 참가하는 일도 줄었다. 수시로 답답한 표정으로 복도를 거닐었다. 하루는 내게 '요 며칠간 소조 회의가 정말로 재미없었다. 가고 싶지 않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내가 소조 회의에서 말한 의견들이 회의 간보(简报)에 하나도 실리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도 적지 않은 문제들을 말했는데 간보에서는 볼 수가 없다'라고 불쾌한 기색으로 말했다."
고민하던 펑더화이가 7월 12일에 마오의 숙소인 메이루(美廬) 별장으로 찾아갔으나 경위들이 주석이 이미 잠들었다며 막아서며 제지했다. 그러나 마오의 방에 불이 켜져 있는 것을 본 펑더화이가 밀치고 들어가려 하자 경위들이 다급하게 다시 펑의 앞을 막아서며 사정조로 양해를 구했다. “주석이 매우 특수한 손님을 만나고 있는 중이라서 아무도 들여보내지 말라고 했다”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듣고 펑은 ‘이렇게 비밀리에 만나는 사람이 누굴까?’ 하는 의문을 품은 채 단념하고 숙소로 돌아왔다.
징강산 시절, 마오쩌뚱과 허즈전
허즈전
그날 저녁 마오의 방에 있었던 사람은 마오가 징강산에서 부부의 연을 맺은 허즈전(賀子珍, 1909~1984년)이었다. 당시 루산에서 멀지 않은 장시성(江西省) 수도 난창(南昌)에 살고 있던 허즈전을 마오가 장시성 제1서기인 팡즈춘(方志純)에게 지시하여 은밀하게 루산으로 데리고 오게 한 것이었다. 허즈전은 마오가 징강산에서 토박이 토비 세력을 설복·회유하면서 생존 거점을 만들던 시절에 이미 그 지구의 여성 빨치산 혁명운동가로 활기차게 활동하고 있었고, 마오를 헌신적으로 돕고 연애를 하고 부부의 연을 맺었다. 그 후 '대장정'까지 함께 하며 극심한 고난의 세월을 겪어냈으나, 옌안(延安)시기에 마오의 바람기로 관계가 극심하게 소원해져서 모스크바로 떠났고, 그사이에 상하이에서 여배우로 활동하던 장칭(江青)이 옌안으로 와서 산동성 동향인 캉셩(康生)의 주선으로 마오에게 접근하여 마오와 결혼하게 된 것이었다. 오랜만에 허즈전(賀子珍)을 만난 그날 저녁, 마오의 기분과 심사가 그리 좋았던 것 같지는 않다.
펑더화이
만언서(萬言書)
펑더화이는 숙소로 돌아온 후 문득 자신의 생각을 글로 정리해서 전하자고 생각했다. 그래서, 자신의 인생을 반전, 몰락시켜 버린 그 편지, 즉 이른바 「만언서(萬言書)」를 쓰게 된다. 펑은 그 동기를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나는 좌(左)의 문제가 더 엄중하다고 생각했다. 우(右)의 문제도 있었지만 그것은 단지 개별적이거나 극소수였다. 그래서 좌의 문제를 바로잡지 못하면 계획공작을 진전시킬 수 없고 국민경제의 발전 속도도 필히 늦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회의에서 내가 이러한 문제들을 제기하면 일부 사람들의 사상적 혼란을 야기할 수 있을 테니 그래서 주석에게 직접 의견을 전하자고 생각했다."
이틀 후인 7월 14일에 펑더화이는 자신이 쓴 그 편지를 마오의 비서에게 전달했다. 실제 글자 수 3600여 자인 소위 '만언서(万言书)'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958년의 기본 건설에서 일부 항목들이 너무 과도했고 조급하게 추진되었고 자금을 분산시켰다. 인민공사의 소유제 문제와 구체적 업무 추진 과정에서 약간의 혼란과 결점과 착오가 출현했다. 전 인민의 강철 대제련(大炼钢铁) 추진 과정에서 작은 용광로를 너무 많이 만들고 운영해서 물력과 재력 등 자원을 낭비했다. 수업료를 지불했다고 할 수도 있으나 실(失)도 있고 득(得)도 있다."
펑더화이
펑더화이는 이어서 어떻게 경험과 교훈을 총결할 것인가라는 문제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첫째, 과장과 허풍이 보편적으로 만연했다. 일련의 문제들은 실사구시 부족으로 인한 것이다. 과장, 허풍, 거짓 보고가 각 지구와 각 부문에 만연했고 그것이 초래한 일련의 믿기 어려운 ‘기적’들을 신문들이 보도했다. 이는 당의 위신에 중대한 손실이다. 당시 각 방면의 자료들을 보면 공산주의가 금방 도래할 수 있다며 적지 않은 동지들의 뇌를 과열시켰다.
둘째, 소자산 계급의 광열성(狂熱性)이 우리를 쉽게 좌경 착오를 범하도록 했다. 일련의 ‘좌(左)’ 경향이 상당 정도로 발전해서 한걸음에 공산주의로 뛰어 들어가려는 사상 경쟁이 과열되면서, 장기간 형성되어 온 당의 군중노선과 실사구시 작풍이 뒤로 밀려났다. 사상 방법에서 전략성 배치와 구체적 조치, 장기적 방침과 당면 현안 처리 절차, 전체와 부분, 대집체와 소집체 등의 관계가 뒤섞였다. 등가교환 법칙을 너무 빨리 부정했고 '밥 먹는 데 돈은 필요 없다'라는 공동식당제를 너무 빨리 제시했다. 경제법칙과 과학 규율이 부정된 것은 모두 일종의 좌경(左傾) 착오이다. 비례를 잃은 결과, 각 방면에서 긴장을 야기했고 공업과 농업 간, 도시의 각 계층 간, 그리고 농민 계층 간의 관계에 영향을 미쳤다. 따라서 정치적 성격을 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