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말이야, 사실 지금 살고 있는 동네에 친구가 별로 없어. 특히 함께 술잔을 기울일만한 친구 말이야. 그렇다고 하나도 없는 건 아니지만, 아무리 그래도 매일 불러낼 수는 없잖아. 그들도 나도 현생을 살아야 하니까. 애데렐라의 삶이랄까. 그렇다고 다른 동네에는 친구가 많냐면, 그것도 아니야. 분명 예전에는 일주일 중 일곱 개의 밤 동안 잔을 부딪쳐줄 이들이 있었던 것 같은데. 어쩌면 그건 꿈이었는지도 모르겠어. 달콤한 낮잠을 자고 일어난 것처럼, 작은 아이가 잔뜩 만들어낸 비눗방울이 터져버린 것 처럼. 모든 게 있었는데 사라졌거든.
그래서 혼자 마시는 날이 많아.
그래서 싫으냐고? 그렇지만은 않아. 꾸역꾸역 전화부를 뒤져 약속을 만들어 내려 애쓰지 않아도 되거든. 내 예상보다 길어진 상대의 말을 차마 중간에 끊지 못해 막차 시간을 떠올리며 발을 동동 구를 필요 없어. 무한 반복 중인 그의 이야기에 휴대전화 화면을 반복해 바라보며 시간을 확인하는 일이 얼마나 피곤한데. 그게 또 티 나게 하면 안 되거든.
한 잔에 한 잔을 더 하고, 또 한 잔이 추가되고. 몇 잔이나 마셨더라, 어느새 주량을 훌쩍 넘겨 생각대로 움직여지지 않는 다리 때문에, 전봇대에 꾸벅 인사를 할 필요가 없는 건 당연한 일이야. 오늘따라 피곤하네, 싶으면 그냥 침대에 바로 누울 수 있잖아. 늘어나는 뱃살은 덤이지만. 분위기를 맞추다 감당할 수 있는 것보다 많은 것들 품에 안은 위장이 놀라 괴로워하기 전에 끊을 수도 있고 말이야. 무엇보다 비싼 안줏값을 감당하기에 내 지갑은 퍽 얇거든.
그래서 집에서 간단하게 잔을 채우는 날이 많아졌어. 이제는 꽤 익숙해지기도 했고, 편하기도 해.
그런데 말이야, 날이 추워져서 그런 걸까. 집에서 마시는 캔맥주의 차가움이 싫어졌어. 지난여름 동안 더위에 녹아버릴 뻔했던 내게 위로가 되어준 금속의 차가움이, 피부에 닿는 순간 오소소 소름이 돋기도 해. 작은 돌기 하나하나에 이름을 붙인다면 고단함, 피곤함, 그리고 외로움 정도일까.
인간이란 참 간사하지. 더위를 씻어준다고 좋아하더니 이제는 춥다고 별로래. 맥주를 전자레인지에 돌릴 수도 없고. 난감해. 아무리 그래도 난 맥주가 가장 좋거든.
그래도 처음 한 모금의 불편함만 넘기면, 그 후로는 괜찮아지더라. 감각이 조금씩 무뎌지는 그런 느낌, 혹시 아나 모르겠어. 꿀렁꿀렁 목젖을 흔들고 넘어간 그것들이 혈관을 타고 내 몸을 훑고 지나가는 것처럼, 발끝부터 시작되는 무뎌짐이란 녀석은 종일 날이 서 있던 신경을 토닥여줘. 수고했어, 이제 쉬어, 라고, 말하는 것처럼. 그 기분이 제법 괜찮더라고. 오늘 하루에 대한 위로 같아서 말이야.
술 마시는 데 핑계가 참 많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냥, 나의 마음이 그렇다는 것뿐이야.
그래도, 아무래도, 역시. 사람들과 함께하는 술자리가 좋아. 특히 집이라는 공간을 벗어난 곳에서 말이야. 내가 준비할 필요도, 정리해야 할 필요도 없으니 우리는 서로에게 조금 더 집중할 수 있거든. 특별한 이야기가 오가지 않아도 괜찮아. 안 그래도 퍽퍽한 세상인데, 조금 가볍다면 차라리 더 좋아. 조금씩 흐트러져 가는 그의 모습에 나의 속도를 맞추기도 해.
머리가 점점 무거워질수록 집에 돌아가야 할 일이 걱정이겠지. 테이블 위에 쌓여가는 빈 병과 잔을 보며 떠오르는 가격 따위 내일의 내가 알아서 하겠지. 걱정 따위 잠시만, 잠시만 덮어두고 그저 순간의 설렘을 즐기면 그걸로 충분해.
배가 적당히 부르고, 조금씩 취기가 오르면 걷는 것도 좋은 방법이야. 달아오른 볼을 식혀주는 서늘한 공기는 결국 두 볼의 색을 더 진하게 만들어주겠지만, 그만큼 웃음에도 관대해지거든. 한없이 가벼운 이야기도, 별것 없는 찰나의 순간도 슬로우모션처럼 각인되어 오랜 여운을 남겨줄 거야. 마치 사춘기의 그들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