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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빛영글 Mar 22. 2024

딱 한잔만 더 할게요

양가감정. 두 가지의 모순되는 감정이 공존하는 상태.
우울증이 오면 방어기전이 형성되고
행복 호르몬인 세로토닌과 도파민을 쥐어짜 내기에
이기고 싶은 마음과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동시에 생긴다.
그렇기에 절망스러운 시간이 계속될 것 같다가도
절망이라 생각했던 곳에 바람이 불기도 하는 것.
주말도 없이 월화수목금금금 일하며 결국 내가 얻은 건 마음의 병이었다.
어떤 날은 이제부터 나를 위해 살아보자 싶었다가
어떤 날은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었다.
그리고 어떤 날은 다시 일하고 싶었고
또 어떤 날은 계속 이렇게 아무것도 아닌 채로 살고 싶기도 했다.

- 드라마 '닥터 슬럼프' 중에서 -


드라마 속 하늘은 우울증을 앓고 있다. 고등학교 시절 커피를 마시면 화장실에 가고 싶어질까 봐 커피 가루만 입에 털어 넣으며 공부를 했고, 쓰러져 보건실에 누워있는 동안에도 단어를 외웠다. 성인이 되어 대학병원 의사가 되었지만 치열하고 고단한 삶은 나아지지 않았다. 덕분에 그녀가 얻은 것은 우울증.

우울할 틈도 없었고 그럭저럭 열심히 잘 지내고 있다 생각했기에 이겨내고 싶었지만 그냥 내버려 두고 싶기도 했고 사라져 버리고 싶기도 했다. 늘쭉날쭉한 감정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이 쉽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이미지 출처 : jtbc 닥터슬럼프 공식 홈페이지)


비단 우울증에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매년 새해가 되면 많은 사람들은 여러 가지 결심을 한다. 다이어트, 금연, 금주, 공부 등 각자의 상황에서 원하는 것들을 계획한다. 하지만 실제로 실천에 옮기는 사람 나아가 성공하는 사람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건강 혹은 미용을 위해 다이어트를 결심한다. 간헐적 단식, 저탄고지, 식단, 운동. 40년 남짓한 삶을 살아오며 다이어트에 대해 들은 게 많은 만큼 괜스레 건드려 보는 것도 많았지만 며칠 가지 않아 아이들 저녁 식사를 준비하며 무너져 버리기 일쑤였다. 당장 손 끝에 음식이 잔뜩 있음을 이겨내기가 힘들었다. 먹고 죽은 귀신은 때깔도 곱다 했으니 고운 돼지가 되어 죽겠다며 무너져 버린다.

이대로 살면 안 될 것 같았다, 노후를 위해 자격증을 따거나 공부를 좀 해야겠다 싶은 마음이 들어 검색창에 이것저것 자격증 따위를 검색해 보다 다음 날 늦잠이라도 자면 전 날 불타올랐던 불꽃은 이미 재투성이가 되어 현생에 수긍해 버린다. 당장 하루하루가 이렇게나 벅찬데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어 남아있는 잿더미 마저 발로 차 날려버렸다.


이런 것들 또한 양가감정이 아닐까. 그것이 뭐가 됐든, 단순히 의지력이 부족하거나 간절하지 못해서 일 건 분명했다.




언제였을까. 기억도 나지 않는 술자리에서 심하게 술을 마시고 흔히 말하는 ‘필름 끊김’을 경험했다. 아침이 되고 어쩌면 아침이 아니었을 수도 있겠다. 고개를 들면 눈앞이 뱅글뱅글 돌았고 고개를 숙이면 전 날 먹은 것들이 올라올 것 같았다. 틈만 나면 화장실에 들락거리며 변기와 우정을 쌓았다. 술이라는 글자나 식당에 붙어있는 술 사진만 봐도 술냄새가 나는 것 같아 울렁거렸다..

내가 또 술을 마시면 개’라고 생각했지만 개만도 못한 인간이 나였다. 망각의 동물이었다. 막상 한 모금 시작하니 또 들어가더라. 속을 쥐어짜는 듯했던 통증도 알콜이 켜켜이 쌓여가며 감각이 무뎌졌다. 젊었던 시절 패기였을까, 객기였을까. 그렇게 몸이 망가지는 줄 알면서도 들이부었다. 그렇게 습관이 되었다.


@픽사베이


흔히 첫 술은 어른들께 배워야 제대로 된 주도를 배운다고들 한다. 엄마는 특별한 날 잔을 부딪히기 위해 따라놓은 한잔에도 얼굴이 새빨게 졌고, 아빠는 술을 즐기지만 가르쳐주지 않았다. 수능이 끝나고 동년배들에게 배운 술은 그때의 혈관의 속도만큼이나 빠르고 강도가 높아 그 습관이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빠르게 마시고 금세 취하고 어느 순간부터는 술이 사람을 마시고 있는 격이었다. 식사를 하면 물을 마시듯 습관적으로 잔을 채우고 목구멍으로 넘겼다.

그나마 다행인 건지 심하게 취한 날 아니고서는 사람들이 크게 눈치채지 못했다. 얼굴이 벌게진다거나 비틀거리지도 않고 제법 멀쩡해 보인다고도 했다. 어쩌면 함께 취하고 있기에 눈치채지 못했을 수도 있겠다. 심지어 취한 친구들의 뒷수습까지 해내고 뚜벅뚜벅 걸어 나갔으니  스스로도 괜찮다 싶었던 것 같다.

어느 순간 술을 마신 다음 날 더듬어 보면 기억이 드문드문 나는 경우가 늘었다. 길거리에서 잠들거나 전봇대랑 치고받고 싸우지는 않았지만 눈 떠 보니 샤워까지 마치고 잠옷을 입은 채로 곱게 누워 있었다. 오소소 소름이 끼쳤다. 블랙아웃인가. 혹시나 싶어 평소에 한 번씩 맨 정신에 있었던 일들도 떠올려 보지만 술자리가 아닌 곳에서 나눈 대화들도 완벽히 기억나지 않는 걸 보면 반드시 술 때문은 아닐 거라고 믿고 싶었나 보다. 그래, 사람이 하루에 나눈 모든 대화나 상황을 기억하면 인간미 없지. 그럼에도 술을 마시고 싶은 정신승리였다.

최근 알게 된 주사가 있다. 술에 취하면 그렇게 약속을 잡는다. 어쩐지 정신을 차리고 보면 휴대폰 일정표에 기억나지 않는 일정이 추가되어 있었다. 한숨이 푹푹 나온다. 자제하지 못하는 스스로가 한심하고 이러다 정말 알콜성 치매 노인으로 늙어버리는 건 아닐까 걱정도 됐다. 그나마 다행인 건 술을 마신 다음날이라고 해서 일상에 지장을 주는 경우는 거의 드물었다. 억눌려 있던 본능이 술의 기운을 빌려 뭘 그렇게도 하고 싶었나 보다. 참고 미뤄뒀던 욕망들이 그렇게 튀어나오나 보다.




그럼에도 평소와 비슷한 시간에 기상을 하고 분주한 아침 시간을 보내고 아이들을 각자의 자리로 보낸 후 사무실 자리에 앉아 커피도 마시고 정상적으로 업무도 한다. 이상한 나라의 바쁘게 뛰어다니는 시계 토끼처럼 바쁜 워킹맘의 하루를 보내고 어둑어둑한 저녁에 되면 식탁 의자를 끌어당긴다. 힘없이 끌려 나오는 의자는 너덜너덜한 지금의 내 모습 같다.

‘치익’ 소리를 내며 하얀 거품이 뽀얗게 올라오는 맥주 캔에 빨대를 꽂아 넣으며 오늘도 열심히 살아온 스스로를 토닥여준다. 하루 중에 가장 행복한 시간이고 열심히 산 나에게 주는 선물 같은 시간이고 휴식이며 습관이다. 도저히 포기하고 싶지 않은 시간이다.

맥주의 탄산이 만들어 낸 트림이 빠져나오며 생긴 틈 사이로 한숨이 터져 나온다. 이유야 어찌 됐든 좋지 않은 습관이라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어느새 잔뜩 불어 난 옆구리살과 뱃살을 한쪽 손으로 꽉 쥐어보며 반대손에 들고 있는 맥주 캔을 꽉 쥐어 찌그러뜨렸다. 비어버린 맥주캔은 힘없이 구겨져 버린다. 마음이 불편하다. 청량감이 식도를 훑고 지나간 자리에는 허탈함만이 남아있다. 꼬깃한 옷주름과 결혼반지가 더 이상 들어가지 않는 굵어진 손가락은 찌그러진 맥주캔 같아 괜히 심통이 났다.


@언스플래쉬


동료들과 저녁을 먹으며 반주를 걸치고 온 남편이 마누라가 좋아하는 타코야끼를 사 왔다며 은색 포장지에 들어있는 작은 상자를 꺼낸다. 칭찬받고 싶어 하는 강아지의 눈빛을 하고 있는 덩치 거대한 그의 배는 숨 쉴 때마다 크게 요동쳤고 입에서는 소주 냄새가 풍겼다. 결혼 전에도 제법 컸던 배가 이제는 정말 터질 것만 같아 보였다.

한 움큼 잡혀있는 뱃살을 덜어내기 위해서라도, 조금 더 건강한 정신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술을 줄여야 함은 분명하다. 하지만 현생에 치여 위로받고 싶은 마음은 이것마저 못하게 하면 견딜 수 없을 것도 같다. 양가감정이든 비겁한 자기 합리화든 어떻게 불러도 좋다.


그와 마주 앉아 타코야에 곁들일 맥주를 꺼냈다.




(대문 이미지 출처 :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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