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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빛영글 Mar 15. 2024

‘아무거나’ 먹으면 좀 어때요

안주 고르는 건 어려운 일이에요

아무거나’라는 메뉴가 있었다. 짜장면도 먹고 싶고 짬뽕도 먹고 싶은 사람들을 위해 짬짜면이 만들어진 것처럼, 치킨도 먹고 싶고 떡볶이도 먹고 싶지만 마른안주나 과일안주도 먹고 싶은 사람들을 위해 태어난 것인가 보다. 특히 여러 명이 함께할 때는 아무거나 만큼 훌륭한 안주도 없었다. 각자의 취향을 맞출 만큼 배려가 깊지도 않았고, 모든 것을 주문할 만큼 지갑이 두툼하지 않던 그때의 우리에게 ‘아무거나’는 무척이나 소중했다.

한 때 길거리 포장마차에 파는 닭꼬치는 비둘기 고기라는 루머가 있었다. 비슷한 이야기로  호프집에 파는 ‘아무거나’는 손님들이 남기고 간 안주를 모아 되파는 것이라는 지저분한 루머도 따라다녔다.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알콜에 목이 마른 청춘들에게 먹고 나서 게워내거나 다음날 싸버릴 안주보다 당장의 갈증을 해결하는 일이 급했으니 망설임 없이 ‘아무거나’를 주문하고 기본으로 제공해 주는 새우깡을 씹어대는 동안 미리 만들어 둔 것처럼 빠르게 나온 ‘아무거나’의 자태는 테이블을 꽉 채웠고, 우리들은 그 앞에 앉아 맥주잔을 꽉 채워 속을 채웠다.




무엇을 하든 사전에 꼼꼼하게 계획을 세우고 실행하는 리더 같은 성향을 J라고 하던가? (별자리나 혈액형 운세가 전부였던 나는 MBTI가 어렵고 검사조차 귀찮기만 하다.) 이끌기보다 따르는 것이 더 편했던 성격 덕분에 J의 성향을 가진 친구들이 주변에 많았고 그들이 하자는 대로 하는 게 마음이 편했다. 나를 보며 입에 맥주만 물려주면 군말 없이 따라다니기 때문에 함께 하는 게 편하다던 파워 J형 동기가 대신 짜주는 일정대로 여행 다니는 것도 즐거웠다. 지금에야 생각해 보니 귀염둥이 막내도 아니고 믿음직한 첫째도 아닌 흐리멍텅한 둘째로서의 삶이 만들어 놓은 결과물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한 살 한 살 나이가 먹어가며 스스로 결정해야 하는 일이 많아졌다. 직접 알아보고 비교하고 스스로 결정해야 했다. ‘월급쟁이로는 답이 없다.’라든가 ‘사업을 해야 한다.’라는 어느새 어른이 되어버린 ‘아무거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있던 그들의 말에 동의할 수 없었다. 따박따박 나오는 월급을 받으며 그저 시키는 대로 하는 일이 차라리 마음이 편했다. 리더로서 받는 스트레스 따위 알고 싶지도 않았고 스스로 개척해 나아간다는 것도 선택에 따라오는 책임감의 무게를 감당해야 하는 것도 지레 겁먹고 발을 빼곤 했다.

쓰고 보니 겁쟁이였고 비겁했다.



동시에 J들이 부러웠나 보다. 늘 당당하게 리드하는 그들의 계획성과 행동력을 보며 누구도 아닌 스스로가 손가락질하고 한심하게 여겼다. 낯선 사람들 틈에서 신발 앞코만 땅에 박고 있는 자신이 답답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네 번째 발가락이 휘어 다른 발가락 밑에 겹쳐져 있어 많이 걸으면 발톱이 파고 들어가는 나의 발을 보며 ‘닮을 게 없어 이런 걸 닮았니.’라고 속상해하던 엄마처럼 놀이터에서 다른 아이들 틈에 쉽게 끼지 못하고 멀뚱멀뚱 바라만 보고 있는 아이들은 다듬어지지 않은 돌 같은 나를 닮아 그런가 싶어 속상하기도 했다. 메뉴판에서 조차 먹고 싶은 걸 골라내지 못하는 모습이 떠올라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렇지만 나와는 달랐다.

학기 초에 빼곡히 적어내야 하는 ‘학생 기초 조사서’에 ‘저희 아이는 수줍음이 많아 나서는 것을 어려워합니다.’라고 적어낸 것이 무색하게 학급 회장선거에 출마하고 부회장 당선이 되었다는 작은 아이를 보며 놀랐다. 3학년 때는 달랑 1표만 받고 화려하게 탈락한 큰 아이는 매년 매 학기 도전했고 5학년 6학년 부회장을 맡았다. 이렇게까지 권력욕이 있는 아이들이었나 갸우뚱했다. 어쩌면 나보다 낫다는 생각도 들었다. 놀이터에서 하염없이 다른 아이들을 바라보던 부끄럼쟁이의 타고난 천성은 바뀌지 않을 수도 있지만 노력 같은 걸로 어느 정도 보완은 가능한가 보다. ‘이런 성격 아니었는데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바뀐 것 같아요.’라는 주변 엄마들의 말도 비슷한 맥락일 수 있겠다.



핫한 술집이라고 찾아간 곳에서도 시그니처 메뉴보다는 어디서 먹어도 비슷한 맛이 나는 안주라든가 평소에도 마시는 뻔한 생맥주를 주문하는 편이다. 새로운 것보다 익숙한 것에서 편안함을 느낀다. 여전히 커다란 메뉴판을 내게 들이밀며 안주를 골라보라고 하면 ‘난 이런 거 잘 못 골라’하며 손사래를 친다. 이제는 찾기 힘든 ‘아무거나’가 그리워 시원한 생맥주만 고르고 기본으로 제공된 과자만 씹어댄다.


비록 ‘아무거나’를 대체할 메뉴조차 고르지 못하는 손일지라도 뭐 어때. J들만 가득한 세상에 평화를 위해 나 같은 사람도 존재하는 거지.



(이미지 출처 : 언스플래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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