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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빛영글 Mar 08. 2024

밥상에 치킨이 사라지는 날

주방에서 전투적으로 움직이던 움직임을 멈췄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 벽에 걸린 시계를 슬쩍 봤다. 하루가 48시간이거나 내 몸이 4개쯤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일 비슷한 시간에 걸려오는 진동은 학원 수업이 끝나고 집에 온다는 아이의 전화였다. 피곤함과 배고픔이 휴대폰 액정 밖으로 통통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엄마 오늘 저녁밥 뭐야?"

"밥이랑 미역국이랑 콩나물이랑..."

"치킨 먹고 싶은데."

뚝. 제 할 말만 하고 끊어버리는 건 아빠를 쏙 빼다 닮았다.



그놈의 닭. 후라이드 치킨, 양념 치킨, 순살 치킨, 간장 치킨, 마늘 치킨, 찜닭, 닭꼬치, 삼계탕, 닭 죽, 닭가슴살 샐러드, 닭 한 마리 칼국수, 닭볶음탕, 치킨 너겟, 심지어 계란말이, 계란찜, 계란 프라이까지. 새삼 닭은 정말 위대하다. 퇴근 후 열심히 준비한 수고로움이 갓 만들어진 반찬과 함께 식어가는 걸 보며 마음과는 다르게 손가락은 배달앱을 열어 아이의 주문을 이행한다.

"닭한테 미안하지도 않니?"

"어른 되면 노랑통닭 사장님이 될 거야!"

입에서 닭똥 냄새 풍기며 내뱉은 말에 기름진 아이의 입술은 치킨으로 답한다. 번들거리는 입술은 쉴 새 없이 움직이느라 바쁘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캔 맥주를 꺼내왔다.




결혼 전 아빠는 가끔 아파트 입구에 있던 치킨집에서 양념 치킨 한 마리를 포장해 오셨다. 접시에 덜어져 밥상에 올라온 양념치킨은 빨갛고 꾸덕한 양념이 밴 채로 겨울날의 입김처럼 뽀얀 김을 뿜어냈다. 각자 좋아하는 부위를 한두 조각 먹고 남은 양념치킨은 다음 날 전자레인지에 돌려야 먹을 수 있는 반찬으로 전락했다.

뜨거운 흰쌀밥에 들러붙은 달큰한 양념은 밥그릇을 싹싹 긁어먹게끔 해주었다. 치킨 자체보다 양념이 더 좋았던 것도 같다. 지금처럼 배달 문화가 활발하지도 않았던 때라 어쩌면 치킨은 제법 귀한 음식일 수도 있었을 텐데, 일찍 독립한 오빠를 빼고 네 식구가 한 마리를 다 먹지 않았던 걸 보면 치킨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을 수도 있겠다.

그러니 평생 먹었던 닭 보다 애들 키우며 먹은 닭이 더 많을 수도 있겠다.



배달은 커녕 음식을 포장해 오는 경우도 없던 것 같다. 30여 년 전 매끼 집밥은 당연했다. 급식 세대가 아니다 보니 고등학교 때는 저녁 도시락까지 싸들고 다녀야 했기에 하루 세끼 집밥을 먹는 셈이었다.

그런 우리 가족도 한 달에 한 번, 아빠의 월급날에는 외식을 했다. 동그란 드럼통 위에 놓인 원형 테이블을 가운데 놓고 다섯 식구가 둘러앉으면 누구 하나 짝꿍 없이 혼자 있을 필요 없이 공평했다. 한산한 가게에는 사장님이 틀어 놓은 뉴스 소리만 요란하게 떠들어 댔다.

연탄불이 뿜어대던 새빨간 열감은 불판을 달구고 둘러앉은 얼굴까지 일렁일렁 달궈 주었다. 분홍빛 두툼한 고기에 뿌려진 굵은소금은 몸이 달아오르면 어디로 튈지 몰라 구워지는 내내 긴장이 됐다. 앞뒤로 뒤집어 가며 고기가 익어가고 한 점씩 입에 넣기 좋은 크기로 잘려가는 모습을 세 아이의 여섯 개의 눈동자가 지켜봤다.

밥에 올려진 고기 한 점 입에 물고 기름진 입술로 소주 한잔 들이키던 아빠의 모습이 생각난다. 무슨 이야기를 했을까 기억이 나지 않는다. 배부르게 먹고 나면 지기름을 온몸에 뒤집어쓴 채로 그 냄새를 뿌려대며 집으로 돌아왔던 기억만 남아있다.

원형 테이블에 둘러앉아 튀어 오르는 소금을 피하던, 하루 세끼 집밥을 먹던 꼬맹이들은 어느새 자라 각자의 삶을 살아내느라 더 이상 집밥을 먹지 않았고 아빠의 월급날에 함께 고깃집을 가지 않았다. 어쩌면, 양념치킨을 사 온 날은 아빠의 월급날이었을 수도 있겠다. “아빠가 치킨 사 오신다니까 일찍 들어와.”하던 엄마의 전화는 집밥으로의 초대장이었을 수도 있겠다.



갓 튀겨낸 치킨의 껍질은 기름을 적당히 먹은 바삭한 과자 같다. 뽀얀 속살에서 피어오르는 연기에 버무려진 촉촉한 다리살은 통통해 입을 가득 채워줬다. 곁들여진 차가운 생맥주는 식도를 훑고 내려가던 뜨거운 온도를 식혀 주었다.

치킨을 맥주집에서 술안주로만 먹던 나의 밥상에도 치킨이 반찬처럼 올라왔다. 원형 테이블에 둘러앉았던 다섯 식구는 각자의 식탁에 있을 것이다. 사각 식탁에 빈자리 없이 나란히 두 아이는 전투적으로 치킨을 집어먹고 마주 앉은 남편과 나는 소주와 맥주를 꺼내 각자의 잔을 채워 기름진 입술로 들이킨다.


언젠가 아이들이 자라면 각자의 지갑에서 각자의 자리에서 치킨을 시켜 먹을 테고 우리 집 식탁에 더 이상 치킨 냄새가 나지 않는 날도 올 것이다. 더 이상 닭에게 미안해하지 않아도 된다. 비어버린 식탁에 홀로 앉아 캔을 따고 있을 수도 있겠다. 그 언젠가의 엄마처럼, 아빠처럼 아이들에게 전화를 걸어 집밥으로 초대하는 날도 올 것이다. 가득 채워져 보글보글 거품이 올라오던 맥주가 목구멍에서 콱 막혔다.


조금은, 천천히 왔으면.



(이미지 출처 : 픽사베이 & 언스플래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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