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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빛영글 Feb 23. 2024

임신한 며느리에게
술을 권한 시어머니의 속사정

몸을 바닥에 바짝 붙여 한 걸음씩 다가가는 모습은 느리게 보였지만 지나치게 신중하다. 상대에게 제 존재를 들켜서는 안 됐기에 단 한 번의 호흡이나 눈 깜빡임 조차 조심스럽다. 며칠을 굶다 겨우 발견한 것은 무리를 벗어난 얼룩말 한 마리. 암사자의 몸은 노련한 구렁이처럼 다가갔다. 

“탁!” 

아뿔싸, 미쳐 보지 못한 나뭇가지를 밟아 낸 작은 소리가 고요한 허공을 가득 채웠고 얼룩말은 고개를 드는가 싶더니 바로 달리기 시작했다. 고민할 여유 따위 없이 암사자도 따라 뛰었지만 제 아무리 암사자라도 얼룩말의 뛰는 속도를 따라잡기에는 거리가 너무 멀었다. 눈앞에서 놓친 먹잇감에 얼마나 분했을까. 




임신하면 신맛이 당긴다는 이야기가 내게는 해당되지 않을 줄 알았다. 섬광처럼 머릿속에 떠오르는 자두는 시간이 지나도 좀처럼 사라지기는 커녕 입안에 침샘을 자극했다. 마트나 재래시장에 자두가 그 자태를 드러내기에 조금 이른 시기였다. 레몬도 아니고 오렌지도 아니고 하필이면 자두라니! 한겨울은 아니었지만 아무리 인터넷을 뒤져도 집 근처 과일 가게나 마트를 뒤져도 자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먹을 수가 없으니 욕망은 더욱 불타올랐다. 평소에 그렇게까지 찾아 먹지 않았던 것임에도 지금 당장 먹지 않으면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은 간절함까지 생겼다. 

혹시나 싶어 퇴근길에 들른 백화점 식품관을 정처 없이 헤매다 크고 작은 과일들을 한 데 섞어 놓은 과일 바구니 옆에 아담하게 놓여있는, 채 빨갛게 달아오르지도 못한 수줍은 자태가 눈에 들어왔다. 암사자가 얼룩말을 향하듯 투명한 플라스틱 상자 안에 오밀조밀 모여있는 그것들을 조심스레 향했다. 생명수 들어 올리는 듯한 경건한 움직임에는 짜릿한 희열이 가득했다. 


@ unsplash


탁 소리와 함께 나뭇가지가 밟히듯 작은 눈이 번쩍 떠졌다. 십여 년 전 당시 다섯 개 합쳐 내 손바닥만큼의 크기도 안 되는 작은 것들은 심봉사의 눈도 뜨게 할 가격이었다. 딱 봐도 아직 익지도 않아 떫을 것 같은 고작 다섯 개의 가격이 개당 5천 원 꼴이라니. 아무리 내가 임산부라도, 아무리 이거 하나 사 먹는다고 해서 가게가 휘청거릴 금액은 아니라도, 아무리 백화점 식품관이라도 납득할 수 없었다. 한참을 망설이다 내려놓는 움직임에 봉긋 솟은 배가 무안했고 손끝은 민망했지만 그게 맞다고 생각했다.

집에 돌아와 부은 다리를 주무르며 다시 생각해도 허탈함은 지워지지 않았다. 얼룩말을 놓친 암사자의 마음도 그랬을까. 그거 하나 못 사 먹나 싶다가도 그 가격은 아니지 않냐며 정신 승리를 반복하다 까무룩 잠이 들었다.




아이가 없는 맞벌이 부부의 주말 아침은 부지런한 시어머니의 요란한 벨소리에 시작되었다. 한껏 게으르고 싶었지만 시어머니의 부름에 쉬엄쉬엄 준비를 하고 느릿느릿 시댁에 향했다. 부풀어 오른 배가 시댁에 들어서면 손대면 터질까 한없이 귀하게 대해주셨다. 장남의 첫 손주였으니 설레기도 하셨던 것 같다. 잔칫날이 아님에도 한 상 가득 차려 주신 밥을 삼키는 배의 꿀렁거림을 보며 감격스러워하셨다. 기대에 부응하듯 부푼 배를 한껏 내밀곤 했다.

배가 터질 듯 솟아오를 때쯤 과일 접시를 들고 오셨다. 더 이상 들어갈 공간이 없음에도 임산부는 무조건 잘 먹어야 한다며 꾸역꾸역 후식까지 들고 오셨다. 옆구리가 찢어질 것 같은 포만감에 무거운 몸을 일으켜 바로 앉았다. 


@ unsplash


냉면 그릇에 산더미처럼 쌓아 올린 그것은 자두였다! 한겨울 눈사람 만드는 아이들의 볼처럼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며칠 동안 마음속으로 들었다 놨다 애타게 만들었던 그 녀석들이 눈앞에 심지어 가득 쌓여 있었다. 

붉은 자두 더미를 향해 먼저 손을 내미는 남편의 손등을 찰싹 때려 움직임을 멈추는 시어머니의 손놀림은 암사자 머리 위로 태양을 가릴 듯 날개를 활짝 핀 독수리 같았다.

“임신하면 신 게 당기고 그러는 거야. 나도 얘 임신했을 때 그렇게 신 게 당겼는데 니 시아버지가 한 번을 안 사주더라고. 그게 여태까지도 기억에 남더라. 임신했을 때 섭섭하게 하면 그거 평생 간다. 그러니까 잘해 줘.”

“요즘 자두 비싸지 않아? 얘도 며칠 전에 백화점 갔다가 비싸서 그냥 왔다던데.”

“엄청 비싸지. 며칠만 지나면 더 싸지겠지. 그때 또 사줄 테니까 많이 먹어.”

며느리 앞으로 넘칠듯한 자두 그릇을 밀어주시는 시어머니는 입맛을 쩝 다시는 덩치 큰 아들 앞에 다른 그릇을 내미셨다.

“넌 방울토마토나 먹어.”

갈 길 잃은 수사자의 발걸음은 머쓱함에 방울토마토를 향했다.




술을 즐기시는 시어머니는 함께 술을 한잔 할 수 있는 이가 며느리로 들어와 좋다고 하셨다. 물론 아들도 딸도 술을 잘 마시는 편이지만 새 식구와 함께하는 것은 또 다른 기분이었나 보다. 나의 아빠가 술 잘하는 사위를 맞이했을 때의 기분과 비슷할 수도 있겠다. 

시댁 밥상에 반주는 기본이었다. 사람 좋아하는 어머님 댁에는 손님이 많이 오는 편이었기에 김치 냉장고는 거의 술창고 수준이었다. 아들 딸 며느리 그리고 세포분열 중인 손주까지 도란도란 모여 앉은자리에 보글보글한 된장찌개와 배추전 그리고 제육볶음까지 더해졌으니 어머니의 술창고는 조심스레 문을 열어 뽀얀 막걸리를 내보냈다.


“냄새라도 좀 맡아보자.”

사실 임신 사실을 알고 난 후부터 놀랍게도 알콜에 대한 갈증은 칼로 잘라낸 듯 사라졌다. 한 잔, 두 잔 들어가는 알콜에 목소리가 높아지는 사람들을 지켜보는 재미도 쏠쏠했다. 분위기에 맞춰 코 끝을 찌르는 알싸한 향이라도 맡아보자며 재미 삼아 막걸리 잔에 코를 박고 있는 며느리의 모습에 마음이 짠하셨던 걸까. 시어머니는 한참을 초조하게 바라보다 굳은 결심을 한 듯 조용히 한 잔을 건네주셨다.

“막걸리 한 모금 정도는 괜찮아. 그렇게 먹고 싶으면 스트레스받지 말고 조금만 마셔.”

꿀꺽, 마른침을 삼키며 얼떨결에 받을 뻔했다.

“한 모금에서 끝나지 않을 것 같아서요.”

며느리의 대답에 모두들 웃음을 터뜨렸다. 그네들의 얼굴에 번져가는 취기처럼 붉은 자두빛 사랑이 스며들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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