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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빛영글 Feb 16. 2024

100세까지 살라고?

조선 하이볼

“나도 힘들어 죽겠다고!!”

식탁을 주먹으로 쾅 내려 찍으며 외치는 목소리가 들렸다. 비명에 가까운 소리에 새벽 시장 경매장처럼 북적대던 가게의 소음이 잠잠해졌다. 무슨 일이 있었기에 그렇게 힘들어 죽겠다고 온몸으로 말하고 있었을까. 두 사람 사이에 놓인 여러 개의 술병만이 여자의 주먹질에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고, 마주 앉은 남자는 무거운 한숨만 토해냈다.




“나 부정맥 있대.”

“뭐가 있어?”

옆 테이블을 향하고 있던 안테나가 맞은편에 앉아있는 일행에게로 돌아왔다.

“당뇨도 조금 있다나 봐.”

기계적으로 잔을 채워주려던 손이 멈칫했다.

“의사가 가족력 있냐고 물어보더라고. 생각해 보니 외할머니도 당뇨였고 친할아버지는 중풍이었거든. 우리 아빠도 협심증으로 스텐스 시술받았는데 내가 멀쩡하면 그게 더 이상하겠더라고.”

덤덤하게 말하는 목소리에 멈칫하던 손이 내려놓은 술병은 옆테이블 사람들의 것처럼 미세하게 떨렸다. 죄를 지은 게 아니었음에도 괜히 고개를 들기 어려웠다.

“뭐 당장 어떻게 될 정도는 아니고. 뻔한 이야기지만 술, 담배, 커피는 끊어야 할 것 같아.”

덧붙이는 목소리가 뱉어낸 씁쓸함이 빈 잔가득 채워졌다.

꼴꼴꼴 술병을 빠져나오는 소리는 맞은편까지 가지 못한 채 내 앞에 비어있는 투명한 잔으로 뛰어들었다. 군데군데 맺혀있는 거품을 쓸고 지나가며 채워지는 모습을 말없이 지켜봤다.


@pixabay


늦은 오후 시간에 카페인이 몸에 퍼지면 밤새 뒤척이는 나와 다른 체질의 그녀였다. 혹 그녀의 집에 초대받는 날에는 커피잔을 들고 돌아다니며 물처럼 마시는 모습본 적이 있다. 함께하는 술자리에서는 흡연실을 찾아 헤매던 모습도 익숙했다. 낮술로 시작한 날엔 그 횟수도 더 많았다. 술을 못 마시는 건 아닌 것 같은데 한잔만 마셔도 붉은 와인의 빛깔처럼 얼굴이 벌게지는 체질 때문에 늘 한잔에서 멈추던 20대의 그녀는 ‘빨개진 얼굴은 곧 원래의 피부색으로 돌아온다’며 한잔이 두 잔, 세잔으로 늘어났다. 이제 나이도 있는데 이왕 마실 거면 좋은 술을 마시자며 메뉴판에서 소주나 맥주보다는 백세주나 복분자 산사춘 따위를 찾아 주문했다. 술인데 몸에 좋은 게 있냐고 웃는 일행들과 한 병을 거뜬히 비우고 이모님을 부르며 빈 병을 흔들어대는 40대가 되었다.




“끊는다고 당장 드라마틱한 변화가 생기는 것도 아닐 거야. 그렇지만 알면서 아무것도 안 하고 싶진 않아. 내 삶에 대단한 애정이 있는 것도 아니고 딱히 오래 살고 싶은 생각도 없지만, 내 자식들 앞에서 돌연사하고 싶지는 않거든.”

‘게으름은 질병’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던 그녀답다. 자투리 시간이 생기면 운동이며 독서를 꾸준히 하는 부지런한 그녀답다.

몸 어딘가 안 좋다 하면 자연스럽게 따라붙는 의사의 조언에는 반드시 ‘술, 담배, 커피’ 삼총사를 끊으라는 말이 들어 있다. 몸에 안 좋다는 건 다들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전부를 하지 않는 현대인은 오히려 찾기 힘든 그 삼총사. 하루를 마무리하며 가볍게 채워 넣던 알콜 한 모금조차 허락되지 않는다면, 이제 그녀의 하루는 무엇으로 위로를 받아야 할까. 찰랑대는 잔을 무겁게 들어 올려 내 안에 털어 넣었다. 그녀 대신 나의 얼굴이 벌게졌다


@pixabay


“우리 나이쯤 되면 약 안 먹는 사람이 없어.”

약국 한 번 갈 때마다 알록달록한 약을 몇 달 치 씩 받아 드는 어르신들은 머쓱하게 말한다. 앞만 보며 달려가던 경주마 같던 그들의 삶에 종이봉투에 채 들어가지도 못해 토해져 나오는 약만 남았다니 안타까움에 억울하기까지 하다.

진 시황제는 불로장생의 약을 찾아 헤맸고 우리의 전래동화에서도 늙지 않는 샘물이 등장한다. 갖은 약초를 때려 넣고 백세까지 살라고 기원하는 술도 있다. 식당에 붙어있는 메뉴판에 유독 비싼 가격을 뽐냈고 초록 빛깔의 소주병과는 달리 병의 모양조차 고급스럽고 기품 있어 보였다. 길을 가던 선비가 나이 든 사람을 매질하는 젊은이의 모습을 보고 길을 멈춰 호통을 쳤는데, 알고 보니 백세주를 마셔 늙지 않은 아버지와 마시지 않아 늙어버린 아들이었다나 어쨌다나.


경제 활동을 왕성하게 하고 있었을 아저씨들이 호기롭게 백세주를 시키는 모습을 보던 옆테이블의 20대 학생들은 오십세주를 시켰다. 동동주나 막걸리를 담았을 법한 노르스름한 주전자에 소주 한 병과 백세주 한 병을 쏟아 뚜껑을 닫으면 오십세주가 되었다. 술 주제에 좋은 거 넣었다고 백세까지 살라고 하는 건지 우습기까지 했지만 오래전부터 이어 온 장수와 젊음에 대한 욕망 따위를 비웃듯 오십 세로 깎아버린 젊음들은 오십 세 따위 까마득히 먼 이야기일 거라 생각했을 것이다.



뭣도 모르고 하라는 대로 달리던 10대, 치열하던 20대, 방황하던 30대를 지나 지쳐가는 40대의 삶을 살고 있는 지금의 우리는 ‘100세 시대’, ‘재수 없으면 200세 시대’라는 말이 두렵기까지 한데 말이다. 경제적으로도 안정되어야 하고, 건강도 뒷받침되어야 하고, 오래도록 할 수 있는 일이 모두 뒷받침되면 비로소 안심하고 백세를 기대할 수 있을까?


그녀와 헤어지고 돌아서는 길에 마트에 들렀다. 20여 년 전 옆테이블 아저씨들처럼 이제는 백세주 따위 가뿐히 시켜 먹을 수는 있겠지만 함께 있었음에 그럴 수 없었다. 낡은 주전자를 꺼내 그녀의 속상한 마음까지 담아 우리의 건강한 오십 세를 위해 마셔야겠다.



(대문 이미지 출처 :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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