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은빛영글 Feb 09. 2024

하늘에서 뛰어내리다.

손을 조금만 뻗으면 하늘에 닿을 것 같았다.

복작거리는 자동차 클랙션 소리가 어렴풋이 들리는 것도 같았고, 비눗방울을 부는 아이들의 웃음소리도 들리는 것 같았다. 산책하는 강아지들의 왕왕 거리는 소리와 사람들의 말소리가 아련하게 뒤섞여 발 밑 어딘가에서 아득하게 울려 퍼졌다.

언제였던가, 어딘가에서 봤던 것 같은 푸르름이 머리 위 가득 채워져 있다. 헤드셋을 끼고 있는 듯 웅웅대는 소리는 까마득해 한없이 고요하기만 했다. 이 세상에 혼자만 남은 듯한 침묵에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머리카락을 간질거리는 작은 바람에도 화들짝 놀라 쭈뼛거렸다.


하늘과 땅 그 사이에 남자는 서 있었다.

“준비되셨나요? 하나, 둘, 셋 하면 뛰어내리시면 됩니다.”

남자의 몸에 달린 안전장비에 줄을 걸며 무심한 듯 꼼꼼하게 확인하는 직원의 목소리에 쭈뼛 섰던 머리카락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혹여나 목소리가 떨리기라도 할까 애써 말을 아끼고 고개만 끄덕인다.



놀이동산에서 번지점프와 스카이 다이빙을 적당히 버무려 놓은 것 같은 놀이기구를 아내와 함께 이용한 적이 있었다. 멍석말이를 하듯 둘은 함께 둘둘 말려 엎드린 채로 공중으로 딸려 올라갔었다. 제법 높이 올라가 한눈에 놀이동산이 내려다 보일 때 옆구리 즈음에 달려있는 줄을 당기면 탁 소리와 함께 몸이 떨어지는 구조였다. 호기롭게 결제 한 아내는 어느새 덜덜 떨며 입과 눈을 가리느라 바빴고 몸이 떨어지는 순간 내지른 비명 소리는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와 놀이동산 가득 울려 퍼졌다. 창피함은 남자의 몫이었다.

유독 하늘을 좋아하는 아내였기에 함께 올라왔으면 좋아했겠다 싶었지만, 놀이동산 이후 자살하게 되더라도 뛰어내리는 건 하지 않을 거라는 이상한 말을 남겨놓은 아내는 당연히 함께 올라오지 않았다. 빼꼼 내려다본 곳 어딘가에 작은 점으로 박혀있어 보이지 않았지만 그곳에서 카메라를 들고 기다리고 있겠지 싶어 용기를 내 한걸음 내밀어 봤다. 양말 안에 숨겨져 있던 발바닥이 조금 촉촉해지는 것 같아 입이 점점 말라갔다. 다이어트라도 좀 하고 올걸. 달랑 줄 하나에 내 몸을 맡겨도 되나 싶어 메마른 입술만 할짝거렸다.


“발 밑 보시거나 주춤거리면 더 어려워요. 멀리 보고 뛰어내리시면 됩니다.”

말이 쉽지. ‘당신도 해봤나요?’라고 묻고 싶었지만 차마 뱉어내지 못했다. 갈라진 목소리로 겨우 빠져나온 “네”라는 대답에 직원이 겁쟁이라고 덩치값 못한다고 비웃을 것 같았다. 사실 그에게 관심조차 없었을 텐데 짧은 시간 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헤집어 놨다. 사람이 공포심을 느끼기 시작하는 높이라던데 이보다 조금 더 높으면 차라리 아무런 생각이 없을까 궁금했다.


직원의 안내에 따라 한걸음 한걸음 앞으로 갈수록 허공과 점차 가까워졌다. 어느새 발바닥이 더 이상 갈 곳이 없어지자 탁 트인 하늘에 머릿속이 비워졌다. 아무것도 없었다. 보이는 것도 들리는 것도 없이 하늘 앞에 홀로 서 있음에 평온해졌다. 속 시끄러운 모든 것들이 사라져 한없이 고요했다.

남자는 망설임이 없었다. 하늘에서 산으로 호수까지 이어지는 남자의 시선에 따라 도미노가 쓰러지듯 '하나, 둘, 셋, 번지!'라는 구령 소리에 맞춰 남자의 몸이 툭 떨어졌다.



지금껏 복작거렸던 많은 생각들은 뛰어내린 곳에 두고 온 듯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바닥에 가까이 가는가 싶더니 하늘을 향해 다시 튀어 올랐다. 남자의 몸을 잡아 끄는 줄의 춤사위에 맞춰 허리가 바짝 당겨져 욱신 거렸다. 위로 아래로 흔들리는 몸을 따라 흔들리는 거꾸로 매달린 세상이었다. 아내와 처음 만났던 날 마셨던 새파란 칵테일처럼 청량한 색을 띤 하늘은 남자의 움직임에 따라 방향을 바꾸었다. 그래, 이 하늘의 푸르름은 그 칵테일을 닮았다. 사람들은 거꾸로 서있었고 땅이 머리 위에 하늘이 발 밑에 있었다. 하늘을 밟고 서 있는 기분에 나쁘지 않았다.


오르내리던 몸의 속도는 점점 줄어들었고 반동도 점차 작아질 때쯤 다시 똑바로 설 수 있었다. 남자의 커다란 몸을 믿고 맡겼던 굵은 줄은 탯줄을 끊어내듯 몸에서 떨어져 나갔고 하늘을 밟았던 두 발은 다시 땅을 딛고 섰다. 안전 장비를 툭툭 떼어내는 또 다른 직원은 위에 있던 그처럼 무심했다. 기계 같은 목소리로 수고하셨다는 인사말을 건네는 그를 돌아서니 점이었던 가족들이 형체가 되어 멀리서 뛰어오고 있었다.




“아빠 진짜 멋있어!”

엄지 손가락을 추켜올린 아이의 재잘거림에 귀가 소란스러워져 땅 위에 있음이 실감 났다. 휴대폰 속 동영상을 보여주는 아내의 눈은 남자를 조금 멋지게 보고 있는 것 같아 으쓱했다.

첫맛남에 칵테일바에서 마주 앉아있던 남자를 바라보던 그때의 표정이 떠올랐다. 뭐랄까. 처음에는 날이 있던 눈빛에 달콤한 칵테일이 스며들어갈수록 경계심을 스르륵 풀어가던 모습이 남자의 어린 시절 언젠가부터 마당에 드나들던 길고양이를 닮은 것도 같았다. 사실은 맥주를 더 좋아한다던 아내는 테이블에 놓인 칵테일을 홀짝홀짝 잘도 마셨다. 예쁜 모양의 칵테일 잔이 하나씩 늘어갔다. 사실은 소주를 더 좋아하는 그는 운전을 핑계로 무알콜 칵테일을 주문해 분위기만 맞춰줬다. 맥주를 좋아하던 그녀가 아내가 될 줄은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은 그녀를 위해 퇴근길에 편의점에 들러 좋아하는 맥주를 사다 준다. 아이들의 바나나우유와 초콜릿우유도 하나씩 늘었다. 묵직한 비닐봉지는 언뜻 남자의 삶의 무게 같았지만 함께 마셔 비워 버리면 작은 바람에도 날아갈 버릴 비닐이라 괜찮았다.

바짝 말랐던 입 안은 그제야 침이 돌기 시작했다. 꿀꺽 넘기는 촉촉한 침의 촉감이 반가웠다. 애써 덤덤한 척 가족들의 손을 잡고 거꾸로 있던 세상을 벗어났다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오늘은 내가 쏠게!”

파란 칵테일을 홀짝홀짝 마시던 붉은 입술이 물었다.

“목마르다. 상큼한 칵테일이 땡기는데, 오늘은 모처럼 둘이 나갈까?”

"싫어! 우리도 같이 가자, 아빠!"


어쩌면 하늘이 발 밑에 있던 게 정상이 아니었을까 싶었지만 아무려면 어떠한가. 발 밑에 느껴지는 단단함 위에 우뚝 설 수 있음을.


(이미지 출처 : 픽사베이 & 언스플래쉬)

이전 07화 라면과 와인이 주는 위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