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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빛영글 Feb 02. 2024

라면과 와인이 주는 위로

결국 터져버렸다. 비닐봉지에 넣어둔 음식 쓰레기처럼 꾹꾹 눌려있던 불쾌한 감정들을 담은 말들이 누르고 누르다 보니 주둥이 한쪽이 터져 손 쓸 틈도 없이 마구 새어 나왔다. 어쩌면 스스로 봉지를 더 찢어냈는지도 모르겠다. 나보다 30살이나 어린아이에게 쏟아 낸 날카로운 말들은 결국 내게 돌아와 오물을 뒤집어쓰고 마음이 쿡쿡 쑤셨지만 이미 뱉어낸 후였다. 

굳이 상황에 대한 변명을 하고 싶지는 않다. 어차피 나의 그릇의 크기 문제였고 이미 쏟아져 나온 그것들은 던진 내게도 받은 아이에게도 그리고 지켜보고 있던 다른 아이에게도 상처로 남았을 뿐이었다. 참 못났다. 

결국 이렇게 헤어지고 나면 하루종일 마음이 찝찝하다. 꼬리를 자르고 도망간 도마뱀의 꼬리가 다시 자라나듯 집에서 다시 만나면 평소처럼 인사하고 지내겠지만 그 꼬리의 형태가 원래 있던 것 과는 조금 다른 것처럼 우리의 마음에도 흉이 남아있겠지 싶어 불편하다. 

‘조금만 더 참을걸. 그 한마디는 하지 말걸. 아침부터 그러면 안 되는 거였는데.’

주절대는 내면의 외침은 듣는 이가 없어 속에서만 시끄럽게 울려 퍼졌고 애꿎은 키보드만 요란하게 두들겨댔다. 평소 하지 않던 실수의 연속까지 더해진다. 다행히 소소한 것들이라 금세 해결이 가능했지만 그 시간 동안 다른 업무는 늦춰질 뿐이었다. 해결되면 후련해야 하는데 밀려드는 자괴감에 불쾌함이 얹어져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기분 안 좋은 일이 생기면 ‘얼마나 좋은 일이 생기려고 이렇게 액땜을 하는 거야.’라고 정신 승리를 할 마음의 여유조차 없음에 한탄했다.



출근 전에 돌려놓은 식기세척기 안의 그릇들은 퇴근 후에야 제 자리를 찾아간다. 주방 한편에 미뤄 두었던 빈 통들의 존재감이 유난히 거슬려 성큼성큼 의자를 밟고 올라 선반을 열고 제자리를 찾아준다. 분주한 마음에 한 번 삐끗했을 뿐인데 태풍의 눈 한가운데 있듯 요란한 소리를 내며 빈 통들과 물건들이 개수대에 쏟아져 내렸다. 하루종일 쌓여있던 큰 한숨이 깊은 곳에서부터 빠져나왔다. 

“이런 날은 뭘 하면 안 돼.”

스스로를 다독이며 밟고 올랐던 의자에 등을 기대고 주저앉았다. 아침에 뒤집어쓴 오물들이 여태 남아있는 기분이 들어 천천히 모든 것을 멈췄다. 머리카락을 부여잡고 있던 두 손은 힘이 빠져 툭 내려앉았다. 눈을 감고 언젠가 들었던 명상 수업 때처럼 나의 들숨과 날숨에만 오롯이 집중을 했다. 괜찮다. 괜찮다. 스스로 되뇌었다. 

‘띠로롱’

세탁기는 눈치 없이 꼭 이럴 때 종료 알림음이 울린다. 그래도 괜찮다. 엉켜있는 빨래 따위 조금 늦어도 괜찮다. 지금이 아니어도 괜찮다. 오르내리며 배에 가득 채워졌다 빠져나가는 공기를 느끼며 스스로를 토닥였다. 

창 너머로 보이는 하늘의 구름이 분홍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제법 내려앉은 하얀 덩어리들은 눈치 없이 솜사탕처럼 크고 사랑스러운 색을 풍기고 있었다. 상냥한 빛깔에 괜스레 차갑게 비어있는 마음을 가득 채우고 싶어져 몸을 일으켰다.



비어있는 냄비에 물을 가득 채워 가스레인지 위에 올리고 요란하게 일렁이는 파란 불꽃을 보며 라면 봉지를 뜯고 수프부터 뿌렸다. 냄비 안은 금세 뜨거운 붉은색으로 가득 채워졌다. 급하지 않다. 

냉장고 안에 남아있는 와인을 꺼내 마개를 열고 맥주잔에 콸콸 부어 반쯤 채웠다. 편의점 할인행사 때 샀던 비싸지 않은 와인을 제 자리가 아닌 곳에 채워놓고 보니 왠지 떨어져 나온 퍼즐 조각 같음에 나를 보는 것 같아 마음이 일그러졌다. 맞은편까지 볼 수 있는 투명한 유리잔은 붉은 묵직함이 허공에 떠있는 듯했다.

화산이 터지듯 뜨거운 기포가 냄비 바닥에서부터 치열하게 치고 올라오는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다 면을 넣었다. 건조하기 이를 데 없던 바짝 말라붙었던 그것들은 빠알간 혀를 날름 대는 국물에 빠져 조금씩 몸을 불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검붉은 투명한 잔을 입에 가까이 댔다. 알싸한 향에 코 끝이 찌릿해져 냉큼 한 모금 삼켰다. 밍밍한 것 같기도 하면서 텁텁하기도 했다. 입 안 가득 채워지는 검붉음의 무게는 달콤하고 씁쓸해 빈 공간이 없었다. 

“오늘도 수고한 나를 위해”라고 읊조리며 머리채를 쥐어뜯어 캔을 뜯고 벌컥벌컥 들이켜는 맥주에게 들러붙은 찌꺼기를 씻어 내리며 ‘캬!’를 내뿜을 수 있는 청량감이 있다면, 흔들리는 잔의 일렁거림에 묵직하게 흔들리는 와인에는 빈 껍데기뿐인 몸뚱이를 채워주는 무게감이 있었다. 그래, 너는 그래서 이렇게 핏빛 같은 색을 내고 있는 것이로구나. 이렇게 내 안을 채워주며 위안을 주는구나. 당도나 무게감 같은 거 잘 모른다. 그저 이렇게 대접받는 듯한 묵직함에 바짝 날이 서 있던 마음이 풀어진다.


와인을 마셨으니 내일 아침에는 두통에 시달리겠지. 그래도 괜찮다. 종일 텅 비어있던 헛헛함이  따뜻하고 묵직한 것들로 채워진다.



(이미지 출처  @unsplash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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