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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빛영글 Jan 20. 2024

흐린 날엔 밀가루를 먹어야 합니다.

부침개에는 막걸리가 빠질 수 없죠

비 오는 날을 싫어하지 않는다. 하지만 비 오는 날 나가는 건 싫어한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돈 벌려면 나가야지. 어제 치킨집에서 결제 한 카드값을 생각하며 무조건 큰 우산을 집어 들고 나선다. 비의 양은 상관없다. 비 오는 날 젖는 게 가장 싫다.

비 오는 날은 오른쪽 발이 꼭 젖는다. 때로는 양쪽 다 젖는 날에도 먼저 시작되는 건 언제나 오른쪽 발이다. 신발이 젖을 정도의 비를 맞은 것 같지 않은데, 어느새 축축함이 느껴져 불쾌하다. 정형외과에서 한쪽으로 몸이 기울어져 있다고 했었는데 그 탓인가 싶어 괜히 허리를 곧추세우고 똑바로 앉아본다. 왼쪽으로 기울어졌다고 했던가? 오른쪽이었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쨌든 오른발부터 젖는다.


균형

한번 생각났더니 종일 머릿속에 맴돈다. 화장실 거울 속에 삐딱하게 서있는 나를 보며 양치하다 괜스레 양쪽 발에 무게중심을 균형 있게 잡아보려 뒤뚱거려 본다. 안 좋은 건 알지만 쉽게 고치지 못하는 다리 꼬는 습관에 어깨도 등도 뻐근한가 싶어 괜히 팔을 들어 올려 몸을 쭉 늘려본다. 자리에 돌아와 앉자마자 다리를 꼬고 턱을 괸 채로 마우스에 손을 갖다 댄다. 하, 나란 인간. 책상 밑으로 발가락을 꼼지락거려 본다. 양말은 얼추 마른 것 같은데 운동화는 얼마나 말랐을까 내려보려다 차가운 소리를 내며 창에 부딪히는 빗줄기에 궁금하기를 멈췄다. 퇴근 전까지 제발 그쳐라.

땅바닥에 담담하게 고여 있던 빗물이 마주 오는 버스가 거칠게 밟고 가는 바람에 파도가 되어 덮쳐왔다. 운동화는 이미 수습 불가 상태가 되어 발끝이 시려온다. 이쯤 되면 조심스레 걷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어져 발걸음이 과감해진다.



갑작스레 쏟아져 내린 빗줄기를 피해 건물에 튀어나온 간판이나 어닝 따위의 품을 파고들었다. 짧게나마 우산이 되어줄 법한 것들을 찾아 징검다리 건너 듯 뜀박질했던 어느 어린 날의 여름이 떠올랐다. 건물과 건물 사이의 거리는 촉촉이 젖어가기에 충분해 머리 위로 들어 올린 책가방 따위가 무색하게 교복을 적셨다. 땀인지 빗물인지 뒤섞인 채, 문을 두들겨 아침잠을 깨워 학교에 함께 다녔던 이름만 기억나는 친구와 마주 보고 씨익 웃었다. 에라 모르겠다. 그냥 젖자고 뛰어다녔다. 처음 한걸음이 조금 어려웠을 뿐 그 후는 차라리 후련했다. 하얗게 내리던 비는 집에 거의 도착했을 때 거짓말처럼 그쳤고 현관 앞에 탈수 안 된 빨래처럼 서 있던 나의 교복과 운동화만 남았다. 균형이나 뒷 일 따위 생각지 않고 냅다 질러버릴 수 있던 무모한 용기에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비 오는 날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을 테지만 비 오는 날 무척이나 센티해지는 사람도 많다. 해를 보기 힘든 구름 가득한 하늘 밑에 비를 맞고 있을 한낱 인간인지라 부족한 일조량에 의해 호르몬 분비량이 달라진다고 한다. 예전에 라디오였나 어느 인터넷 페이지였나 비 오는 날은 사람들이 햇빛을 보지 못해 해를 보고 자란 음식을 몸에서 필요로 하는데 그중 하나가 밀가루라고 했다. 만들어진 습관이라 생각했었는데 이렇게 그럴싸한 이유가 있었다니. 정말 이런 이유로 비 오는 날 사람들이 부침개를 그리워하는 걸까 싶어 글을 쓰기 전에 검색해 봤다. 손가락 몇 개만 움직이면 정보가 우수수 쏟아져 내리는 무심한 초록색 검색창이 새삼 경이롭다.

비가 내리는 날은 생체리듬을 조절하는 멜라토닌은 증가하고 기분이나 수면과 같은 신경전달을 담당하는 세로토닌은 줄어든다고 했다. 특히 밀가루에 세로토닌이 많이 들어있다고 한다. 내 몸 안에 균형을 맞추기 위해 밀가루를 필요로 하다니. 뭔가 과학적으로 기름 지글지글한 부침개를 먹어도 된다고 허락해 주는 것 같아 죄책감이 줄어든다.


오른 발만 젖지 않으려 꾸역꾸역 허리를 바로 세우고 가방과 우산을 왼쪽 오른쪽으로 번갈아 들며 균형을 맞추었고, 젖어버린 오른쪽 신발을 왼쪽과 균형을 맞추려 열심히 말렸지만 버스의 한방에 시원하게 깨져버렸다. 반항조차 할 틈 없이 젖어버린 바지와 운동화를 내려다보며 호르몬의 균형을 위해 저녁에는 부침개에 막걸리를 먹어야겠다 생각하다니 어쩔 수 없는 호르몬의 노예인가 싶었지만 충분히 흡족했다.

꾸덕꾸덕 젖은 운동화가 마트에 들러 막걸리와 부침개가루 부추를 집어 든다. 지나간 자리에 흐른 빗물은 다른 이들의 신발에서 흐른 빗물과 뒤엉켜 부지런한 마트 관리인의 걸레질에 흐트러졌다. 오른쪽만 젖으면 어떻고 오른쪽부터 젖으면 어떠한가. 비록 내 몸의 균형은 깨져 있지만 호르몬의 균형은 맞춰질 테니. 은근하게 달궈진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고 꾸덕꾸덕한 물을 들이붓는다.


내 몸의 로토닌이여 가득 채워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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