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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빛영글 Jan 13. 2024

우리 딸 시집가면  아빠는 누구랑 맥주 마시지?

위치 추적 장치라도 달아놓은 걸까. 아파트 입구에 들어설 때면 귀신 같이 가방 속 깊은 곳에 아무렇게나 쑤셔져 있는 휴대폰에서 진동이 느껴진다. 역시나 퇴근하는 딸에게 맥주 피쳐를 주문하는 아버지의 전화였다.

"딸, 뚱땡이 사 올 거지?"

한 두 정거장만 더 가면 경기도에 진입하는 서울 끄트머리를 부여잡고 있던 사무실에서 서울을 가로질러 반대쪽 경기도에 있는 집까지 소요되는 시간은 1시간 40분. 딸이 약속이 없는 건 또 어떻게 아셨는지 시간을 계산하고 있던 것 마냥 아파트 입구 편의점을 지나기 전에 꼭 전화벨이 울린다.


아버지가 늦는 날은 딸이 전화를 한다. 그날이면 아버지는 뚱땡이에 오징어까지 사 들고 오신다. 급하게 따라 넘쳐버린 거품을 조금이라도 놓칠까 다급히 입을 대는 두 사람을 보며 부녀가 아주 똑 닮았다고 눈을 흘기는 어머니의 목소리를 안주 삼아 잔을 부딪힌다. 뭐 얻어먹을 게 없을까 싶어 나이 많은 강아지도 힘겹게 의자에 뛰어 올라와 한껏 애교를 부린다. 식탁에 마주 앉은 두 사람은 딱히 이야기를 공유하지는 않았다. 아버지가 어머니 몰래 맥주잔에 슬며시 소주 한잔을 섞으며 딸에게 윙크를 날린다. 한잔 가득 털어 넣고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뚱땅대며 기타를 치기 시작하면 티비를 보던 어머니는 조용히 다가와 오징어 다리 하나를 입에 물고 티비 볼륨을 높인다. 딸은 멍하니 티비를 보다 책을 읽다 휴대폰을 만지작 거렸다. 소란스럽고 한가롭다.




아들 딸 구별 말고 하나 낳아 잘 기르자던 시절 셋이나 낳고 키웠는데 첫째는 일찍부터 독립하고 막내는 제일 먼저 결혼해 떠나고 나니 집에 남은 자식은 달랑 하나뿐이다. 제일 먼저 뛰쳐나갈 것 같은 자식이 가장 오래 부모의 곁을 지키고 있다. 분명 자식들이 자라면 빈자리는 커지는 게 순리겠지만 가끔은 그 적막감이 견디기 힘들다.

워낙 바쁘던 부모님이었던지라 모임이며 일이며 등의 이유로 늦는 날은 남은 딸 홀로 식탁을 지킨다. 빈 식탁에서 밀려드는 고요함이 딸을 집어삼킬 것 같아 덜컥 겁이 날 때도 있었다. 딸이 늦는 날 여전히 각자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을 아버지 혹은 어머니의 모습을 생각하며 홀로 잔을 채웠다.



마지막까지 공간을 채우고 있던 딸도 자리를 떠날 준비를 시작했다. 멀지 않지만 그렇다고 가깝지도 않은 곳에 신혼집을 계약하고 보통의 사람들과 같은 순서를 밟았다. 딸이 떠나는 것은 아쉽지만 많이 늦지 않게 떠남에 부모로서 할 일을 제대로 하고 있는 것 같아 홀가분하기도 했을 것이다.

사실 딸이 데려온 남자가 처음부터 맘에 쏙 들지는 않았다.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것 같은데 벌써 내 딸을 데려가려 하다니 믿어도 되는 놈인가 싶어 찬찬히 훑어봤다. 차를 가져와서 술을 못 마신다던 샌님 같은 막내 사위만 보다 대리기사를 부르면 되니 한잔 달라고 서글서글하게 웃는 예비 큰 사위와 소주 한잔 주거니 받거니 하다 보니 이 녀석 제법 괜찮은 남자 데려온 것 같아 기분이 좋아진다. 평소 애정하는 동네 횟집에서 그렇게 달큰하게 취했다.


예비 사위는 큰 사위가 되었고 식탁 마주 앉아있던 큰 딸은 사라져 의자만 덩그러니 남았다. 빈 의자를 보며 유리컵 가득 꾹꾹 눌러 맥주를 마셨다. 덜 씹힌 오징어가 목구멍에 걸린 건지 턱 하고 맥주가 한번 쉬었다 내려갔다.




부모님이 외출하신 날에도 퇴근 후에 집에 오면 반겨주던 강아지가 있었다. 나이가 제법 들어 가끔은 인사보다 잠에 더 충실했지만 덕분에 온기가 있었다. 늘 바빴던 남편이었기에 신혼임에도 딸은 차라리 회사 사람들과 저녁도 먹고 맥주도 한잔하고 들어오는 걸 택했다. 신혼집 문을 열면 낯선 동네, 낯선 집 가득한 차가운 공기가 무겁게 내려앉았다. 덜컥 밀려드는 냉기에 새삼 강아지도 외로웠겠구나 싶어 미안한 마음에 슬리퍼를 질질 끌고 집 앞 편의점에 가 습관적으로 뚱땡이 맥주를 하나 집어 들었다가 내려놓는다. 혼자 마시기에는 조금 양이 많아 캔으로 향하던 손은 주춤대다 다시 뚱땡이를 향했다. 바로 앞이 편의점인 건 정말 마음에 들었다.


힘겹게 뚜껑을 비틀어 따고 나니 거품이 가득 올라왔다. 채 닦아내지도 못했는데 적막한 식탁을 요란한 휴대폰 벨소리가 가득 채웠다.

“여보세요.”

키친 타월을 급하게 뜯어 넘쳐 난 거품을 닦으며 받은 전화는 아버지였다.

“... 큰딸 없으니 같이 술 마실 사람이 없어서 외로워.”

밀크 쉐이크처럼 하얀 거품이 가득한 맥주잔에 입을 대며 한 모금 삼켰다. 굵고 가득한 탄산이 목구멍에 한번 걸렸다가 온몸에 스며 들어갔다. ‘우리 딸 시집가면 아빠는 누구랑 맥주 마시지?’ 프러포즈받았다는 딸에게 건넨 아빠의 인사가 떠올랐다.

“엄마한테 술을 가르쳐 봐요.”

함께 웃으며 전화를 끊었다. 고요함에 밀려드는 외로움은 아빠에게서 전해져 온 그것이었나 보다.



(이미지 출처 : 언스플래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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