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처럼 조금 일찍 출근한지라 여유 있게 커피를 마시며 오늘의 뉴스를 훑어볼 여유가 생겼다. 이놈의 경제는 좋아질 날이 없네, 아파트값이 다시 오르는 것 같은데 우리 집은 왜 안 오르나 하는 속 터지는 기사들 뿐이다.
“아리아, 살려줘.”
혼자 살고 계신 80대 어르신이 화장실에서 넘어져 움직일 수가 없었는데 주민센터에서 설치해 준 AI 스피커에 도움을 요청해 구급차가 출동했다는 기사가 눈에 띄었다. 어르신들의 말상대가 되어 주기도 하고, 약 드실 시간이라고 상냥하게 알려주기도 한다는 광고를 본 기억이 났다. 사람이 아닌 기계와 대화하고 살아야 하는 현실에 씁쓸하게 봤었는데 실제로는 꽤 도움이 되는구나 싶어 안도감에 커피를 홀짝인다. 따뜻한 온기가 온몸에 퍼지는 게 느껴지는 여유로움이 좋았다.
집에 있는 AI가 생각났다. 이름만 부르면 티비도 켜주고 채널도 찾아준다. 날씨를 물어보면 친절히 알려주면서 미세먼지 농도까지 알려드리냐고 되묻기도 한다. 계산도 척척 외국어도 척척. 거실 불도 꺼주고 노래를 틀어주거나 알람까지 울려줘 어느 하나 빠지는 데가 없다. 같은 걸 반복해 시켜도 짜증 한번 내지 않는다. 성실한데 친절하기까지 하다. 아이가 집에 왔을 때 인사라도 해주면 좋을 텐데 그건 조금 아쉽다.
일하는 엄마를 둔 김군은 초등학교 5학년이다. 키는 제법 자랐지만 겁이 많아 하교 후 집에 오면 엘리베이터부터 현관을 열고 들어가 온 집안에 불을 다 켜는 순간까지 엄마와 통화를 한다. 워낙 햇빛이 잘 드는 집이라 오후 2시가 조금 넘은 시간은 바깥처럼 밝기만 한데 안방부터 동생방과 본인 방은 물론 화장실 불까지 전부 켜고 나서야 안심이 된다고 한다. 아이가 학원에 간 후에 퇴근하고 집으로 출근한 엄마는 우선 커피를 한잔 내린다. 일을 시작하기 전에 커피 한잔 하는 게 국룰이니까 남은 일과를 위해 카페인의 힘을 빌려본다.
작은 집을 밝게 빛내고 있는 빈방들의 불을 끄는 것부터가 집안일의 시작이다. 이놈이 전기요금 무서운 줄 모르고 라는 질타보다는 혼자 있었을 아이가 얼마나 겁이 났을지 집에 있어주지 못함에 마음이 아려온다. 가끔은 AI에서 아이가 즐겨 듣는 노래가 무한 반복 재생되고 있다. 겁 많은 아이가 얼마나 무섭고 외로웠을까 싶어 마음이 무겁고 미안했다. 아이도 신문기사 속 어르신처럼 AI와 이야기를 나누었을까 궁금하기도 했지만 우선은 배고파하며 돌아올 아이를 위해 서둘러 좋아할 만한 반찬을 만든다. 아이에게 위로가 되어 주길 바라며 총총총 재료를 다듬는다. 커피 향이 반찬 냄새와 뒤섞여 집안이 따뜻해진다.
“안녕하세요, ㅇㅇ학원 김군이 담임이에요.”
바쁘게 반찬을 준비하던 손이 멈췄다. 지나치게 높은 텐션 덕에 굳이 소개가 없어도 누군지 뻔히 알 수 있는 목소리였다.
“김군이가 요즘 숙제를 안 해와요. 수업 태도랑 이런 건 여전히 좋은데 숙제를 안 해오는 게 반복되어 전화드렸어요. 바쁘시겠지만 한 번씩 집에서 확인 부탁드릴게요.”
무슨 일인가 싶었다. 숙제를 안 했다니 사춘기 반항 시작인가? 시간이 없는 것도 아니었을 텐데 뭐 하느라 그냥 간 걸까. 젖은 손을 무심하게 앞치마에 닦았다. 패밀리 링크를 열어 스마트폰 사용 시간을 확인해 보니 딱히 게임이나 유튜브에 빠져 그런 것도 아니었다. 어차피 평일은 1시간 제한이 걸려있던 터라 오래 사용할 수도 없었다. 걱정은 의심이 되고 의심은 불안이 되어 괴롭혔다. 김군이 도착하기까지 초조했다. 집에 오자마자 내렸던 커피는 입에 대지도 못한 채 차갑게 식어갔다.
“다녀왔습니다.”
“너 요즘 뭐 하느라 숙제를 안 해가서 학원에서 전화 오게 만들어?”
아뿔싸, 이게 아닌데. 가방도 내려놓지 않은 아이에게 오자마자 잔소리를 늘어놓을 생각은 없었는데. 아차 싶어 급하게 입을 틀어막아 보지만 이미 폭포수처럼 쏟아져나간 후였다. 그나마 다행인 건 아이가 더 눈치를 보고 있는 모양인 것 같았다.
“아니, 그게 아니라…”
아이의 입은 그간의 행적을 순순히 털어놓느라 바빴다. 아직 사춘기는 덜 온 건가 하는 안도감이 들자 아이의 변명이 귀에 들어왔다. 답은 간단했다. 티비를 보느라 숙제를 하지 않았던 것이다. 리모컨에 대고 ‘유튜브 틀어줘’, ‘브롤 방송 검색해 줘’라고 하면 원하는 게임 방송까지 척척 틀어주니 굳이 시간제한이 걸린 스마트폰에 연연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상황이 정리가 되었고 초범이었으니 잔소리와 맞바꾼 다짐 정도의 훈방조치로 마무리 됐다. 그제야 눈에 들어온 커피를 시원하게 들이마셨다. 따뜻하지 않으니 그저 쓰기만 했다. 커피가 아니라 맥주를 마셔야겠다 싶어 냉장고를 뒤적대다 남은 커피를 마저 마셨다.
이브가 뱀의 유혹을 핑계로 선악과를 따먹었듯이 잔소리쟁이 부모 없이 빈 집에 혼자 있던 김군에게 소파 위에 놓여있는 리모컨은 얼마나 달콤해 보였을까. 집안 전체 불을 켜놓는 것도 잊고 빠져들었다. 분명 약속과 다짐을 했지만 고작 초등학교 5학년에게 채널권의 자유를 이성으로 누르기는 쉽지 않았던 것이다. 5분만 봐야지 하며 누른 전원 버튼 덕분에 결국 김군의 꼬리가 엄마에게 다시 잡히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