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까지 해야 하냐고 아이가 티비 좀 볼 수 있는 거 아니냐고 김군의 엄마를 힐난할 수도 있겠지만 엄마 입장에서는 최선이었다. 나름의 루틴이 있었기에 그 시간을 티비에 빠져 보내고 나면 학원 다녀온 후의 일정이 꼬이기도 했고, 워낙 자극적인 영상을 좋아하는 아이가 무엇을 봤을지 걱정이 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렇게 평화롭게 마무리 지어지나 싶었던 어느 날. 조기퇴근을 하고 현관문을 열어 깜짝 놀래켜 주려 했는데 아이를 정말 깜짝 놀라게 하고 말았다.
아침에 숨겨 놓았던 리모컨이 아이 손에 들려있고 아이는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학원이고 뭐고 마주 앉아 이야기를 했다. 반 친구들에게 상황을 이야기했더니 셋톱 박스버튼으로 리모컨을 찾는 방법을 알려줬다고 한다. 기가 막히고 어이가 없어 실소만 새어 나왔다. 이 똘똘한 녀석들. 뛰는 엄마 위에 나는 아이들이었다. 그렇다고 당하고 있을 수는 없었던 엄마는 리모컨을 가방에 넣고 출근하기 시작했다.
카페에서 커피를 주문하려고 지갑을 찾으러 가방을 뒤적거리다 반짝반짝 빛을 내는 리모컨이 보여 자괴감이 밀려들어왔다. 별거 아니라고 말할 수도 있었지만 이게 다 일하는 엄마인 자신의 잘못 같았고 아이와의 관계가 틀어지는 건 아닐지 걱정도 되었다. 가방 안에 어지럽게 엉켜있는 물건들처럼 지금은 모든 게 다 엉망 같았다. 회사 일에만 신경 쓰기도 벅찬 시기였는데 집안일이 회사까지 쫓아와 괴롭히고 있었다. 괴로움에 커피를 포기하고 신경질적으로 가방을 닫아 버렸다.
아이들이 아침 식사를 하는 동안 엄마는 집에 혼자 있을 아이가 학원 가기 전에 먹을 간식을 준비했다. 출근 준비 만으로도 바쁜데 아이들 아침식사에 간식까지 챙겨야 함에 오늘도 커피는 한 모금뿐이 마시지 못한 채 싱크대에 흘려보냈다. 머릿속을 복잡하게 하는 모든 것들도 그렇게 흘려보내고 싶었다. 둘째는 돌봄 교실에서 간식도 먹고 오기에 안심이지만 돌봄 교실 대상이 되지 못하는 첫째는 스스로 간식도 챙겨 먹고 시간 맞춰 학원을 가야 한다. 고학년도 분명 돌봄이 필요한데 받을 수 없는 현실이 안타까워 새벽배송을 통해 신선한 과일이나 좋아하는 빵을 준비한다. 떡은 혹시라도 목에 걸리지 않게 작게 잘라 놓는다. 아직은 불이나 전자레인지 사용을 알려주지 않아 아이의 간식은 따뜻할 수 없어 늘 미안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아이가 간식을 먹는 양이 줄었다. 냉장고에 뚜껑도 열지 않은 간식통이 그대로 있는 걸 보면 과일이 질렸나 싶어 고민이 됐다. 나름 다양하게 준비한다고 생각했는데 싶어 억울하기도 했지만 따뜻한 간식을 챙겨주지 못함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검색창을 열고 워킹맘 초등아이 간식을 맘카페에 검색해 봤다. 다들 상황이 비슷함에 위로를 받았다. 방학이 코 앞이라 점심도 준비해 놓고 나가야 함에 머릿속이 시끄러웠다. 누가 옆에서 계속 떠들고 있는 기분이라 지끈대는 머리를 손으로 꾹꾹 눌렀다.
어라? 이거 기분이 아닌데? 분명 다들 잠들어 있어야 할 시간인데 거실에서 소곤대는 소리가 들린다. 이상하다. 돌아보니 남편은 옆에 누워 코를 골고 있었다. 무섭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해 한참 고민하다 잠든 남편을 의지하며 소리 없이 방 문을 열고 나갔다. 어두워야 할 거실이 번쩍번쩍거렸다. 작은 덩어리가 소파 위에 웅크리고 알아듣기도 힘든 정도의 소리만 간간이 새어 나왔다. 정체를 확인하고 나니 슬슬 뒷목이 당겨왔다. 과감하게 스위치를 누르고 낮은 목소리로 이름을 불렀다.
“김군아.”
갑자기 밝아진 거실의 온도차에 눈이 적응하기도 전에 아이의 얼굴이 창백해지는 게 선명하게 보인다. 놀란 아이만큼이나 당황한 엄마였다. 분명 리모컨은 안방 가방 속에 잠들어있었는데 길고양이처럼 살금살금 들어와 꺼내간 걸까. 채 묻기도 전에 굳은 얼굴의 엄마를 향해 이실직고하는 아이였다.
AI에게 티비를 틀어달라고 하고 유튜브를 보고 있었던 것이었다. 밤 잠 제대로 자지 못한 채 방학기간 점심 메뉴를 고민하고 있는 동안 도시락을 먹을 아이는 짜릿한 일탈을 하고 있었다. 밀려드는 허탈함에 후회할 말을 뱉어낼 것 같아 호흡을 했다. 이럴 때는 명상 수업받은 게 도움이 되는구나. 우선은 아이를 재워야 했다. 내일 이야기하자며 잔뜩 얼어버린 아이를 이불과 함께 방에 들여보냈다. 아이는 금세 잠이 들었지만 엄마는 도통 잠이 오지 않았다. 출근하면 쌓여있을 일더미를 생각하니 진작 잠이 들었어도 부족했는데 뒤척대기만 한다. 세상 태평하게 코를 골며 자고 있는 남편을 보고 있으니 아까 진정시켰던 마음에 화가 끓어 올라 발로 차버릴 것 같아 거실로 나왔다.
적막함으로 가득 차있었다. 겁 많은 아이가 어둠 속에서 빠져나와 인공지능 앞에 쭈그리고 앉아 속삭였을 모습을 상상했다. 왜 이렇게 된 걸까 생각하다 보니 다시 머리가 지끈지끈거려 차라리 커피를 한잔 내리기로 했다. 이미 잠 자기는 글렀으니 정신이나 깨워보자 싶었다. 문득 언제부터 커피를 마시기 시작했나 하는 의문이 들었다. 분명 점심시간 이후에 커피를 마시면 밤에 잠이 오지 않아 오전에만 한 잔 마셨던 기억도 있는데, 어느 순간 하루에 세 잔은 우습게 마시고 있었다. 언제부터인지가 뭐가 중요하겠나, 하루를 버티는 힘이고 생명수였다. 아이의 온기가 사라진 소파에 앉아 커피를 홀짝이며 한참을 생각했다. 어둑했던 거실이 조금씩 밝아지고 있었다. 젠장, 아침이다.
어느새 식어버린 커피잔을 내려놓고 인공지능 앞으로 다가가 앉았다. 한참을 마주 보다 조용히 서랍을 열어 공구를 꺼냈다. 비장한 마음으로 신중하게 인공지능을 분해했다. 잔해를 상자에 예쁘게 담아 서랍 깊은 곳에 봉인시켜 버리고 식어버린 커피를 마저 마셨다. 커피가 참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