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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빛영글 Dec 23. 2023

나의 묫자리가 있는 곳에서부터

매실주

남자와 여자는 결혼을 약속했다.

누가 봐도 프러포즈를 위해 만들어진 뻔한 장소에서 특별할 것 없는 뻔한 프러포즈였지만 여자는 이유를 알 수 없는 눈물을 흘렸다. 그런 여자의 두 손을 꼬옥 잡은 남자는 재밌게 잘 살자고 속삭였다. 눈물을 닦아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의 체온이 오고 가는 두 손에서부터 따뜻한 행복 같은 것이 번졌다.

프러포즈만큼 결혼 준비도 뻔했다. 가장 먼저 양가 부모님이 함께 어색하게 인사를 하며 식사를 했다. 안타깝게도 예비 시아버지 자리는 공석이라 남자의 동생이 빈자리를 채웠다. 남자의 아버지는 그가 대학을 졸업하기도 전에 사고로 돌아가셨다. 그날따라 빈자리를 크게 느꼈을 어머니를 다독이는 그의 커다란 어깨가 유난히 작아 보이고 안쓰러웠다. 아마도 어머니만큼이나 오늘만큼은 아버지가 보고 싶었으리라.


조금 빠듯하게 날을 받아온 남자의 어머니 덕분에 준비는 다소 급했다. 어차피 해야 할 일이라면 조금 빠르게 움직이는 것도 나쁘지는 않았다. 날짜가 정해지니 가능한 곳이 몇 군 데 남지 않아 그중 몇 곳을 둘러보고 계약을 진행했다. 공장에서 찍어내듯 하는 결혼은 싫다고들 했지만 벗어날 여유나 열정은 조금 부족했기에 여느 예비부부들처럼 찍어내듯 준비를 했다.

누구나처럼 조금의 삐걱거림도 당연했다. 아무래도 30년을 넘게 다르게 살아온 두 가정이 합을 맞추는 과정이 쉽지는 않았다. 자식의 배우자가 될 사람에게 돈 봉투를 던진다거나 커피를 쏟아붓는 막장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삐걱삐걱 대며 덜그럭 대며 시간은 굴러갔다.




약속된 그날을 며칠 앞둔 어느 날, 남자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아빠한테도 인사드리자.”

당연히 가야지 뭘 그렇게 어렵게 말을 하냐며 웃는 여자가 고맙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했다. 가장 가까운 주말에 어둠이 채 걷히기도 전에 두 사람은 남자의 아버님을 모신 곳으로 조용히 떠났다. 남자의 어머니가 챙겨준 전이며 과일이며 정종을 가득 담은 바구니만 뒷 좌석에서 달그락 거릴 뿐이었다.


두 사람이 출발한 경기권에서 남자의 아버지를 모신 곳까지는 어둠이 걷히지 않은 이른 시간 풀 악셀 논스톱으로 달려야 4시간이 조금 넘는 거리였다. 여태 성묘를 간다 해도 30분에서 1시간 사이 거리였던 여자는 그 시간이 길고 지루했다. 명절마다 이 거리를 오고 가야 되냐고 묻는 여자의 말에 명절은 각자 집에서 보내니 걱정 말라고 다독여주는 자상한 남자였다.(거짓말 거짓말) 이왕 이렇게 된 거 여행 간다고 생각하자며 라디오 볼륨을 높였다. 새벽을 여는 라디오는 그 어느 때보다 밝고 경쾌했다.


그렇게 한참을 달려 도착한 곳은 내비게이션조차 헷갈려하는 오솔길 끝에 자리 잡고 있었다. 지나다니는 차도 거의 없어 누군가 머리채를 잡고 끌고 가면 평생 찾을 수 없는 것만 같아 오싹한 상상도 해봤다. 남자의 오래된 경유차의 시동이 꺼지자 한없이 고요했다. 지나가는 새의 날갯짓 소리까지 들릴만큼 평화롭고 조용한 곳이었다.



가을 끄트머리라 산소 위로 잔뜩 쌓인 낙엽을 털어내며 인사를 건네는 남자의 모습을 보니 조금 쓸쓸해 보이기도 했다. 얼굴은 뵌 적은 없지만 남자의 소개를 받으며 어르신들부터 차례대로 꾸벅꾸벅 두 번씩 절을 하는 여자의 무릎이 조금 어색했다.


철컹철컹. 무거운 자물쇠가 열리고 가족 납골당의 속이 훤히 드러났다.

“이 쪽이 우리 아빠야. 아빠, 저 왔어요. 저랑 결혼할 여자예요.”

평소 울림통이 좋은 남자의 목소리가 가족 납골당 안에 크게 울렸다. 아파트처럼 층층이 지어진 곳 윗 쪽에 아버지를 모신 작은 단지가 놓여 있었다. 부모님의 죽음은 아직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여자에게 남자의 아버지를 모신 그곳은 조금 신비롭기도 하고 기이하기도 했다.
작은 단지와 조금 떨어진 곳 여기저기에 불규칙하게 다른 단지들도 몇 보였다. 아리송해하는 여자에게 남자는 누구의 것인지 하나씩 설명해 줬다.  

“여기는 나중에 엄마 자리고, 이곳이 내 자리야.”

아버지의 단지 밑에 공간을 가리키며 남자가 말했다.

“그리고, 네 자리는 여기가 될 거야.”


결혼할 여자에게 한강 뷰 아파트를 보여주며 허세를 부리면 좋았을 텐데. 정작 두 사람이 살 곳은 햇빛도 잘 들어오지 않는 다가구 작은 집에 마련해 놓고, 죽은 후에 들어 올 자리를 보여주는 남자라니. 참신하다.




이상하게 서늘한 그곳의 무거운 문을 처음처럼 잠그고 돌아 서니 내리쬐는 가을 햇빛에 눈이 찡그려졌다. 그제야 제대로 주변이 보였다. 봉긋한 언덕 위에 그곳은 여전히 고요했고 더없이 평화로웠다. 하늘과 닿을 듯 가까웠지만 가을 하늘은 그저 높기만 했다. 그 사이를 날아가는 커다란 새 한 마리는 웅장하기까지 했다. 무덤가라고 생각지 않았다면 바쁜 일상 속에 쉼표를 찍으러 왔다 해도 부족함이 없었다. 발 밑에 줄지어 있는 나무들이 보였다. 비슷한 모양으로 잘 정돈된 나무들의 길쭉한 가지들은 봄마다 탱글탱글한 매실을 가득 품어냈다. 전국 각지에 뿌려져 살고 있는 그의 아버지의 혈육과 그들의 가족은 해마다 같은 날 매실을 따기 위해 모여든다. 사실 매실은 핑계고 그 참에 얼굴이나 보자는 일종의 가족 행사이다.



마트마다 매실이 나타나는 그즈음. 봄의 그곳은 가을과는 또 다르다. 수줍은 초록색의 싱그러움이 가득하다. 빛이 좋은 곳에 자리 잡은 나무에는 손바닥을 꽉 채울 매실들이 가득 열려 줄기가 휘청거린다. 차마 다 따내지 못한 것들은 가지를 쳐 바닥을 뒹굴고 상대적으로 흠 없는 것들은 각자의 트렁크에 실려 다시 전국으로 옮겨 간다. 매실조차 예쁜 것들만 살아남는 세상이라니.


하나하나 꼭지를 따 내고 정성스레 씻은 매실들의 물기가 빠질 때쯤 조심스레 무게를 달아본다. 체중계에 한 발 한 발 올리듯 신중하게 매실의 무게를 재 같은 무게만큼의 설탕을 틈 사이에 부어 유리병을 꽉 눌러 채운다. 이렇게 말도 안되게 엄청난 양의 설탕을 들이부어야 되는 작업이지만 날이 더워지면 얼음 동동 띄워 마시는 아이들의 달콤한 음료가 되어준다. 조금 상처가 있어도 충분히 괜찮다. ‘이건 내 거야.’ 흐뭇한 미소와 함께 설탕 조금과 담금주를 붓는다. 끙 소리와 함께 묵직한 술을 들어 올려 콸콸콸 사이를 채워 넣는다.

곰이 어두운 동굴에서 쑥과 마늘을 먹으며 100일을 보내고 사람이 되었다. 매실도 서늘한 곳에서 100일 동안 소주와 설탕을 먹고 덩어리들을 건져내면 근사한 매실액과 매실주로 재탄생된다.





내가 죽은 후에 들어가게 될 그 자리에 남자의 아버지가 도란도란 나무 그들에 앉아 매실나무를 돌봐주는 상상을 해 본다. 매실이 잘 열려야 우리 아들이 한번 더 날 보러 오지 하며 정성스레 매실을 어루만지는 모습에 마음이 아려온다. 달콤하고, 그리움이 가득한 매실이다.


매실주 한잔 가득 마음들을 꾹꾹 모아 담아 털어 마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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