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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빛영글 Jan 26. 2024

굿모닝, 스키하우스

음주 보딩은 위험합니다.

겨울 아침은 여름의 그것보다 조금 늦게 시작된다. 째깍째깍 움직이는 시간은 변함이 없지만 발길을 밝혀주는 햇살은 이불에 폭 안겨 5분만 5분만 하며 늦잠을 자는가 보다.

어둑한 길, 드문드문 켜져 있는 가로등의 빛을 따라 무거운 한 걸음을 옮긴다. 오른쪽 다리와 왼쪽 다리가 스칠 때마다 만들어 내는 부스럭 대는 소리는 어둠 속에 홀로 소란스럽다. 커다란 기둥이 걷고 있는 듯 제 몸뚱이 만한 것이 자칫 뒤로 넘어갈 것 같음에 끙 소리와 함께 추켜 올렸다.

지하철 첫 차를 타면 늦을 수도 있지만 당장 택시를 잡아 타고 쏘면 20분 정도면 충분할 것 같았다. 다행히 택시 정류장에는 서울로 나가는 택시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다. 어깨를 짓누르는 무게감에 등줄기 어딘가 송골송골 땀이 한 방울 맺히려 할 때, 맨 앞 택시 기사님이 마시던 커피 종이컵을 구겨 버리며 문을 열어주었다. 조심스레 짐부터 밀어 넣고 몸을 구겨 넣으니 그제야 안도의 한숨이 터져 나왔다.

“잠실역이요.”




택시 안을 가득 채우고 있던 후끈한 히터 덕분에 살짝 얼었던 코 끝이 찌르르 녹아내렸다. 뒷좌석 시트에 그대로 녹아버릴 것 같아 괜히 눈을 끔뻑거렸다. 어둠이 가득한 거리는 한산해 늦지 않게 도착할 수 있었다.

욕망의 기차처럼 길게 줄 서 있는 버스들은 웅웅 시동이 걸린 채 요란하게 방귀를 뀌어대고 있었다. 각자의 목적지를 외치는 기사님들의 목소리가 새벽 시장 경매장처럼 활기찼다. 사람들은 크고 작은 짐들을 들고 각자의 목적지를 향하는 버스를 찾아 짐을 쑤셔 넣느라 바빴다.

‘우웅’

주머니 속 진동에 주머니를 열어보기도 전에 누군가 팔을 낚아챘다. 잠이 덜 깨 부은 반가운 얼굴은 인사도 생략한 채 삼각김밥을 마저 입에 쑤셔 넣으며 버스 중 하나를 향했다. 갈쭉한 짐을 짐칸에 힘겹게 밀어 넣고 버스에 올라타니 비슷한 복장을 한 무리들이 부스럭대며 각자의 여유를 즐기고 있었다.


쿵쿵

여기저기서 짐칸 문이 몸통을 내리찍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고 곧이어 우리 버스에도 약간의 흔들림과 함께 같은 소리가 들렸다. 명단을 확인하고 안전벨트를 메라는 말을 끝으로 기사님은 라디오 볼륨을 줄이고 버스의 불을 껐다. 속닥거리는 목소리들은 점차 줄어들었고 간혹 들리는 누군가의 코골이 소리를 백색소음 삼아 우리도 까무룩 잠이 들었다.

얼마나 달린 걸까. 언덕길을 힘차게 올라가는 버스는 구불구불한 길을 유연하게 스쳐 지나갔고 후끈한 실내 공기 탓에 등줄기부터 시작된 땀은 엉덩이까지 흘러내려있었다. 갈증이 났다. 먼저 깬 친구는 커튼을 살짝 걷고 버스를 스쳐 지나가는 눈들을 소리 없이 눈에 담고 있었다.



“우리 버스는 곧 스키하우스에 도착합니다.”

기사님은 마이크를 잡고 잠든 사람들을 깨웠다. 부족한 잠을 채운 사람들은 입에서 단내를 풍기며 하품을 하느라 바빴고 각자 짐을 챙기느라 분주했다. 소란함에 쌓여 찌뿌둥한 팔을 쭉 펴고 흔들어봤다. 이어폰을 나눠 끼고 하늘과 산이 맞닿은 곳에 쌓인 눈들을 쫓다 보니 설레는 기분에 마음이 간질간질 해졌다.

전국에서 출발한 버스들이 하나씩 모인 주차장은 하얗게 눈이 부셨다. 단단하게 굳어진 몸을 푸느라 스트레칭을 하는 사람도 있었고, 잠이 덜 깬 아이들은 눈을 비비며 칭얼대 아이의 짐까지 들고 있는 부모의 표정은 그저 난감해 보였다. 직원들은 손님들을 맞을 준비를 하느라 분주했고 가장 먼저 선을 긋고 내려오겠다는 강한 의지를 가진 사람들은 서둘러 탈의실이나 락커룸으로 향해 분주하게 각자의 겨울을 준비했다.



잔뜩 눌린 머리를 털모자로 눌러 가리고 어기적대며 편의점을 향했다. 컵라면 하나, 고추참치 캔 하나를 품에 안았다. 습관대로 캔맥주를 잡았던 손은 아쉬움을 남긴 채 대신 사이다를 꺼내 들었고 마주 앉은 우리는 잠이 덜 깬 얼굴로 주섬주섬 상을 차렸다. 영하로 살짝 내려간 날씨에 다행히 슬로프는 질척거리지 않을 것 같았고 맑은 날이라 정상에 올라가도 춥지 않을 것 같았다. 하얗게 펼쳐진 슬로프는 비슷하게 도착한 알록달록한 사람들이 각자의 허기를 채우며 시작을 기다리고 있었다.




따뜻한 컵라면으로 몸을 데우고 잠이 덜 깬 입엔 커피 대신 차가운 사이다를 들이붓는다. 고추 참치와 캔맥주는 의외로 조합이 괜찮은데 조금은 아쉽지만 그 곳의 사이다는 맥주와 같다. 목을 타고 넘어가는 찌릿함은 온몸의 혈관을 타고 다니며 채 깨어나지 못한 감각들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투명하게 터지는 폭죽같은 청량감은 이곳의 분위기와 닮았다. 흰 눈을 가로지를 때 바닥에서 톡톡 튀어오르는 눈보라의 터짐은 첫 한모금을 삼킬 때 처럼 터져올라 온 몸을 떨게 하기에 충분했다. 텁텁한 라면 국물을 씻어내는 매끄러운 속도감은 푹신한 슬로프에 미끄러져 넘어진 나를 밀어주는 것 같았고, 밤새 내린 자연설이 소복이 쌓인 위로 빈곳을 채워주려 흩날리는 인공설은 거칠게 내려놓은 캔에서 튀어 오르는 투명한 사이다 처럼 빛에 반사되어 눈부시게 빛났다. 진작 흘러내려 살얼음이 끼려한 물방울은 자칫 잘못 밟으면 주체할 없이 미끄러질 같은 블랙 아이스와 같았지만 끈쩍임이 미끄러지지 않도록 균형을 잃은 몸을 꽉 붙잡아줄 같은 안도감이 들었다.



오물오물 씹어 삼키는 동안 일행이 아닌 듯 우리는 별다른 대화를 하지 않은 채 잠에서 빠져나오는 중이다. 알콜이 조금 들어가면 약간 과감해질 용기가 생길 것 같은 아쉬움이 못내 남았지만 뜨거운 컵라면에서 일렁대는 뽀얀 김 사이로 보이는 하얀 슬로프는 간질거리던 마음을 요동치게 하기 충분했다. 

“이제 일어날까?”

하나씩 슬로프를 활강하며 내려오는 이들의 모습에 빈 캔을 구기며 일어나는 친구를 쫓아 다급하게 남은 사이다를 입에 붓고 따라나섰다. 입안에 달콤함이 한참을 머무르다 스며들었다.


-2007년 어느 날, 하이원 리조트-




(이미지 출처 : 언스플래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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