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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빛영글 Mar 01. 2024

개도 안 가져갈 버릇

터져버린 샴페인

가늘게 흐르는 물줄기를 향해 작은 입술을 조심스레 들이밀었다. 누군가의 입술에 닿아 그를 가득 채워 주었던, 이제는 텅 비어버린 몸뚱이에 물방울이 입을 맞추듯 몸의 곡선을 따라 흘러내렸다. 좁은 곳을 통해 그의 안을 가득 채워주었던 차갑거나 혹은 따뜻한 묵직함에 고개가 고꾸라져 전부 토해 버렸다. 모든 걸 비워버려 남은 게 없어질 때쯤 얇게 걸치고 있는 겉옷을 신중하게 벗겨낸다. 거칠지만 조심스럽다. 투명하게 비치는 속살에 혹 상처는 없는지 구석구석 손으로 살피고 눈으로 쓰다듬었다. 헐벗은 몸끼리 부대끼는 소리에 텅 빈 귓가가 간지럽다.

“이 정도면 충분해.”

자판기처럼 거대한 덩치에 달라붙어 있는 입은 한없이 작기만 하다. 푸른 몸에 시커먼 작은 입이 벌어지면 그 안으로 잡아당기는 힘은 그의 몸처럼 거대해 모든 것을 빨아들였다. 강하게 짓누르고 거칠게 끌어 안아 입에 닿는 것들을 모조리 품어냈다. 요란한 숨소리는 삐걱대는 움직임까지 삼켰다. 눈으로 볼 수 없지만 느낄 수 있다. 격렬한 움직임과 채 뱉어내지 못한 가녀린 비명소리를.




쓰레기가 돈이 되고, 재활용도 놀이가 된다’는 슬로건으로 언젠가부터 동네마다 파란 덩치들이 하나씩 생겼다. 캔이나 페트병을 넣으면 1개당 10원씩 정산해 현금화를 시켜준다. 어차피 재활용 쓰레기로 버려질 것들을 개당 10원이나 쳐준다니 폐지 줍던 어르신들은 동네를 돌아다니며 투명 페트병이나 맥주캔 따위를 포대 자루 가득 담아 줄을 선다. 아마도 고물상보다 후하게 쳐주는가 보다. 얼마나 스마트했는지 키오스크 사용법을 몰라 주문을 못한다던 기사가 무색할 정도로 계정도 여러 개 돌려가며 계획적으로 움직인다. 굽은 허리를 바짝 세워 페트병 뚜껑을 따 흔들면 남아있던 소주나 막걸리 따위의 냄새가 공기 중에 가득 퍼졌다.

농장에서 동물들에게 먹이 주기 체험이라도 하듯 시커먼 혀를 날름대며 쏙쏙 빨아들이는 구멍에 하나씩 던져주는 재미에 아이들은 즐겁다. 작은 동작들이 모이면 무얼 사 먹을지 상상하는 살짝 벌어진 입술조차 사랑스럽다.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어르신들이 흩뿌려놓은 냄새에 섞여 푸른 통 안의 비명 소리를 뒤덮어 버렸다.



다시 태어나러 갑니다’라는 글씨가 또렷하게 박힌 트럭이 퀘퀘한 연기를 뿜어내며 찌그러진 것들을 가득 싣고 유유히 떠났다. 뻣뻣해진 허리를 두들기며 비명소리가 멀어져 가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어르신들은 다시 허리를 바지런히 움직이며 포대 자루에서 페트병을 꺼낸다. 길거리에 밟혀 굴러다닐 뻔했던 것들이 이렇게 다시 태어나러 간다니 대견하다. 눈으로 좇으며 배웅을 했다. 떠난 것들은 의류로 다시 태어나 누군가의 몸을 안아줄 것이고, 자동차 부품이나 철근이 되어 누군가의 삶과 함께할 것이다. 다 마시고 찌그러뜨려 버려질뻔한 것들도 다시 태어나 함께하는 삶이다.


사람은? 사람은 다시 태어날 수 있나?

.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한 이가 더 심하게 비틀거리는 이를 부둥켜안고 함께 길바닥을 굴렀다. 웃음인지 울음인지 가늠하기 어려운 소리를 내며 몸을 부르르 떨던 그는 차갑게 얼어붙은 바닥에 먹은 것들을 토해버렸다. 요란하게 토악질해 대는 소리에 얼굴을 찌푸리는 사람을 향해 돌아보더니 더 뱉어낼 것이 있었는지 거친 말들을 어눌하게 늘어놓았다. 둘 사이 금세 식어버린 공기를 향해 제대로 맞지도 않는 주먹을 허우적댔다.

“나쁜 새끼야! 네가 어떻게 그래!”

울음소리였구나. 제법 나이가 있어 보이는 성인 둘이 길바닥에 엉켜 주먹다짐까지 해댔다. 제대로 힘이 실리지 않은 주먹들은 비틀대다 운이 좋으면 상대방에게 들어가 꽂히고 그렇지 않으면 허공이나 맨바닥에 비벼댔다. 뜯어말리거나 신고할 생각조차 없어 보이는 사람들의 텅 빈 눈동자는 혹 얽혀 불똥이라도 튈까 봐 가던 길을 재촉했다. 흘깃거리던 호기심만 그림자처럼 남아 그들을 지켜봤다.

“아유, 술만 취하면 꼭 이래!”

뒤늦게 쫓아 나온 일행이 다급하게 둘을 떼어 놓으려 했지만 역부족이다. 웅성대는 사람들은 일행의 시선을 피하기에 급급해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은 눈치다. 아직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씩씩 거리는 거친 숨소리에 몸 안에 가득 찬 술 냄새가 넘쳐흘러내렸다. 제대로 서지도 못하는 몸으로, 제대로 알아듣기도 힘든 말을 읊조리더니 또렷하게 욕설까지 내뱉으며 또 달려들다 그대로 곤두박질쳤다. 빨갛고 파란 불이 번쩍이며 경찰차가 도착한 후에야 격정적으로 엉겨있던 그들의 몸이 간신히 떨어져 나갔다.

“이 자식 잔뜩 취했어. 정신 차려!”

“이거 놔! 나 안 취했어!! 저 자식이 나쁜 놈이라고! 마, 너 그렇게 살지 마!”

비명에 가까운 소리들이 쏟아져 나왔다.

너 내일 되면 얼마나 후회하려고 그래?

저건 술만 마시면 저래. 술을 못 마시게 해야 해. 술 마시면 저건 인간이 아니야, 개야 개.”

그제야 큰 소리를 내는 일행들이었다.

"네가 뭘 알아, 마!"

쯧쯧, 취했으면 곱게 들어가 잠이나 자지.”

술 취했다고 봐주고 그러니까 계속 저러는 거야.”

뒤늦게 한 마디씩 보태는 사람들도 등을 돌렸다. 짜증 섞인 한숨을 내뱉는 경찰들 사이 웅크리고 앉아있던 그의 흐느낌만 남았다. 뱉어버린 욕설과 엉켜버린 딸꾹질도 미세하게 떨리며 그 자리에 남았다.


(이미지 출처 : unsplash)


누군가 말했다. 이 사람을 못되게 만드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이 원래 못된 놈이란 걸 술이 밝혀준다고. 힘껏 흔들어 뚜껑을 밀어내면 요란하게 뿜어져 나오는 샴페인처럼 음침하게 숨겨 놨던 욕망들이 알콜의 힘을 빌려 한껏 뿜어내는 것이다.

때로는 수줍게 감춰 두었던 애틋한 호감을 조심스레 꺼내올 때도 있다. 발갛게 달아오른 뺨이 전한 마음은 입꼬리를 부드럽게 올려준다. 얌전한 고양이처럼 꾹꾹 눌러놨던 분노와 울음이 성난 호랑이가 되어 터뜨릴 때도 있다. 차마 입 밖으로 내뱉지 못했던 그리운 이를 향한 눈물이 터져 나오기도 했고, 은밀하고 비밀스러운 이야기도 탄산음료의 기포처럼 퐁퐁 터져 나온다. 다음 날 후회할지언정 거대한 파란 몸뚱이가 구겨 눌러버렸던 것처럼 마음속 꾹꾹 눌러 담아왔던 것들은 당장 터뜨리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만큼 뱃속에서 부풀어 올랐다.

그렇게 민낯을 드러낸다.


(대문 이미지 출처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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