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끼굴을 통해 이상한 나라에 떨어진 앨리스는 시계토끼의 분주한 모습을 쫓아간다. 자기가 있는 곳이 어딘지도 모른 채 종종거리는 토끼의 뒤를 따라가느라 덩달아 바빠졌다. 앨리스가 부지런히 쫓아가고 시계 토끼가 아무리 바쁘게 돌아다녀도 K 워킹맘의 삶보다 바쁠지는 모르겠다.
@픽사베이
알람이 울리면 저주인지 마법인지가 시작된 것처럼 분주해진다. 가스레인지를 힘껏 눌러 돌솥에 온도를 올리면 뽀얀 쌀에서 피어오르는 고소한 향기가 주방을 가득 채운다. 지난밤 식기세척기가 깨끗하게 닦아 놓은 그릇들을 제자리에 넣는 소리는 요란하다. 달그락달그락 그릇 부딪히는 소리에 아이들이 깨우기 전에 눈 뜨기를 은근히 바라본다. 1초의 움찔거림조차 보이지 않는 침대 위의 모습은 새까만 사막의 밤처럼 고요하다.
반쯤 감긴 눈으로 밥을 씹는 건지 행주를 씹는 건지 모르는 아이들은 그 와중에도 싸운다. 마치 싸우기 위해 태어난 전투사처럼. 이제는 서로에게 익숙해질 법도 한데 상대방의 신경을 긁는 날카로운 발톱은 나의 내면에서 잠을 자고 있던 사자를 소환해 결국 큰소리를 치게 만든다. 사자후가 지나간 자리는 어색한 표정으로 밥을 씹는 소리와 출근 준비를 서두르는 소리가 대신한다. 3초만 참을걸. 의미 없는 후회가 이미 입 밖으로 빠져나간 말의 그림자라도 잡아 본다.
‘탁’
등교를 시키고 어깨에 있던 가방을 사무실 책상에 내려놓으면 오전도 무사히 지나간 것 같아 안도의 한숨이 터져 나온다. 따뜻한 커피를 한잔 타 의자 깊숙이 엉덩이를 밀어 넣으면 잠깐의 힐링타임이다. 자다 깨 화장실을 같이 가달라고 깨우는 겁 많은 아이도 없고, 요란하게 코를 고는 남편도 없다. 잠들기 직전까지 그리고 아침 내내 삐약거리는 작은 입술의 아이 대신 고소한 커피 향과 청각의 휴식만이 있을 뿐이다.
각자의 스케줄이 끝나고 만나는 우리는 물리적인 거리두기 덕분에 아침보다 반가운 얼굴로 만날 수 있다. 만나자마자 터져 나오는 삐약삐약 소리에 청각은 다시 고단해졌지만 AI 같은 미소를 보여줄 여유는 있다. 퇴근한 자의 여유를 잠시 즐기고 나면 본격적으로 주부로서 출근을 한다. 흔한 가정집의 저녁시간처럼 청소기를 돌리고 엉망이 된 물건들을 제자리에 가져다 두고 빨래를 정리하고 반찬을 만들어 식탁에 올려놓는다. 식자재 값이 미쳐 날뛰는지라 차라리 사 먹는 게 더 싼 것 같기도 하지만 아이들에게 해 줄 수 있는 최대의 복지는 집 밥이라 생각한다. (물론 상대방은 원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우동, 돈가스, 치킨, 피자, 햄버거, 파스타는 이제 그만 먹고 싶은 마음도 있다.
“음, 맛있다.”
밥풀이 가득 묻어있는 숟가락을 찌개에 담그는 큰 아이가 콧소리를 낸다. 이제 제법 매운 것도 먹기 시작하니 밥 차리기가 조금은 수월해졌다. 나란히 앉아 각자 좋아하는 반찬을 밥 위에 쟁여놓는 모습은 겨울잠을 자기 위해 먹이를 모으는 동물처럼 제법 귀여워 맞은편 의자를 꺼내 엉덩이를 붙이고 그 모습을 바라 본다.
“엄마는 안 먹어?”
자신을 바라보는 엄마를 바라보던 첫째의 다정한 질문에 냉장고에서 한껏 시원해진 캔맥주부터 꺼내 다시 자리에 앉았다. 가볍게 손가락을 걸쳐 톡 힘을 주면 터져 나오는 탄산의 비명을 목구멍으로 꿀꺽꿀꺽 삼키면 목젖은 신명 나게 춤을 춘다. 즉석 떡볶이도, 순대볶음도, 곱창도 마지막 볶음밥을 먹기 위해 달린 것처럼 지금의 맥주 한 캔을 마시기 위해 하루를 열심히 보낸 것 같은 기분마저 든다. 한껏 달아오른 뒷골을 시원하게 식혀주며 맥주를 삼키는 동안 참은 숨은 속에서부터 채워지는 탄산이 스멀스멀 올라와 코끝을 간질거릴 때쯤 터져 나온다. 트림이라도 나오면 개운하기까지 하다.
비싸다고 사주지 않은 딸기를 동네 엄마가 선물이라고 보내줘 후식으로 내어줬다. 방금 밥을 먹은 게 맞는 건지 땅에 떨어진 과자도 아닌데 3초 안에 다 먹어버릴 기세로 부지런히 포크를 움직이다.
“아, 행복해.”
빨간 딸기 조각이 묻어있는 작은 아이의 입술이 말했다.
“나도 행복해.”
고개를 뒤로 잔뜩 꺾어 마지막 한 방울까지 털어 넣은 하얀 거품이 묻어있는 나의 입술이 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