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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빛영글 Apr 19. 2024

참 좋다.

그녀를 만나는 곳 100m 전

른 시간부터 바빴던 일정이 어느 정도 마무리 되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벗어나야 했다. 지체할수록 빠져나오는 것이 힘들어짐을 알기에 화장실에서 뒤를 닦지 않고 나오는 것 같은 찜찜함이 느껴지더라도 모른 척 나와야 했다. 거기까지 신경 쓸 여유가 없기도 했다. 전 날의 숙취가 채 가시기도 전이라 눈을 뜨고 있는 것조차 힘들기도 했다. 이래서 중요한 약속 전에는 몸을 사려야 한다. 새삼 나이에 대한 회의감이 밀려들었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분명 여유롭게 출발했음에도 이런저런 볼일을 보는 동안 시곗바늘은 빠른 속도로 돌았고 그 속도가 빨라질수록 심장 박동수도 빨라졌다. 긴장감과 설렘 그 중간 어디쯤, 괜히 모자도 반듯하게 다시 써보고 옷에 묻은 건 없는지 살펴보며 혼자 부산하게 움직였다. 300미터, 200미터, 100미터 점점 가까워지는 동안까지 꾸준히 울려대는 휴대폰 메시지는 부지런도 했다.  

“지하철 내려서 올라가요”

메시지를 확인하고 곧이어 보고 싶었던 반가운 얼굴들이 동공을 가득 채웠다. 반달 같던 눈이 초승달만큼이나 작아져 더욱 강한 빛을 뿜어냈고 그렇게 다 함께 같은 곳을 바라보며 걸었다.




열린 문 사이로 소란스러움이 뽀얀 연기를 타고 새어 나왔다. 자리마다 꽉 채워진 사람들 사이에 가방을 내려놓고 자연스러운 척 분위기를 타는 데에도 용기는 필요했다. 소개팅 자리도 아니기에 예쁜 척을 할 필요도, 얌전을 뺄 필요도 없었지만 긴장이 됐다. 긴장감 마저 기분 좋은 설렘이다.



가게를 가득 채운, 적당히 취한 사람들의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과 한 톤 올라간 목소리는 무척이나 산만해 피곤한 눈꺼풀은 그들에게 기가 빨리는 것 같기도 했지만 주문한 음식과 함께 각자의 앞에 놓인 잔을 받아 취향껏 가득 채우며 우리만의 세계를 만들어 갔다.

한 모금이 목구멍으로 넘어가며 긴장하는 동안 바짝 말랐던 입 안을 촉촉하게 적셔준다. 갈증이 나기라도 했는지 전력질주 후에 냉수를 마시는 것처럼 나도 모르게 벌컥벌컥 들이켠다. 분명 어제 과음했는데? 한번 입을 대니 또 들어가네? 대단한 간의 회복력이라며 소리 없이 감탄한다. 또 한 모금이 목구멍으로 넘어가며 온몸으로 퍼진다. 빠르게 뛰어대던 심장을 진정시켜 주려는 듯 천천히 퍼져 나간다. 아, 좋다. 기름기가 자글자글 피어오르는 곱창과 함께 또 한 모금이 미끄러져 들어가니 그제야 조금 여유가 생긴다. 각자의 스타일대로 속도대로. 강요도 압박도 없는 적당한 매너와 배려에 서서히 스며들었다.

참새처럼 입을 벌려 이유식을 받아먹는 아기를 바라보는듯한 애정 어린 온기에 빠르게 뛰던 심장도 긴장감도 안정감을 되찾았고, 한잔씩 들어가는 술의 기운을 빌려 점차 느슨해진 나다운 모습으로 돌아갔다. 따뜻한 듯 서늘한 봄바람이 공기를 가로지르며 룰루루 콧노래를 부르는 것도 같았다. 주변의 소음에 휩쓸리지 않는 다정한 새벽의 밝은 별빛, 그 가운데 있었다.


스쳐 지나간 사람들의 발걸음 속도에 휩쓸리지 않고 각자의 속도를 유지한 부족한 듯 담박한 잔의 만남, 그리고 사람들.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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