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시대,
왕비를 간택할 때가 되면 전국에 금혼령이 내렸대. 혼기에 접어든 처녀들은 양반은 물론 서민들도 결혼을 할 수 없었다지. 어차피 짜고 치는 고스톱처럼, 좋은 집안 참한 아가씨와의 정략결혼과 다름없었을 텐데. 누군가의 혼삿길에 브레이크를 걸던 못된 제도는 결국 왕권 강화가 목표였을까?
죄 없는 애틋한 연인들은 아슬아슬한 줄다리기를 하며 몇 달이라는 시간 동안 금혼령이 끝나기를 기다렸겠지. 혹시라도 제물처럼 끌려가지 않기 위해 후다닥 혼례를 올리는 이도 있었을 거야. 그래서도 안 되겠지만, 모두를 품어줄 것도 아니면서 ‘내 아들이 결혼하기 전까지 니들 아무도 결혼 못해’라는 못난 심보 같기도 하고. 역사는 잘 모르지만 조금 이기적인 것 같기도 하고. 좀 그러네.
만약 ‘내 아들에게 술을 가르칠 거야. 얘가 아무리 취해도 망나니가 되지 않고 훌륭한 주도를 몸에 익힐 때까지 니들 다 술 못 마셔’라고 금주령이 내린다면 어땠을까?
맙소사.
지금의 나로서는 깃발을 들고 반란을 일으켜서라도 없애고 싶을 것 같아. 바쁘게 지낸 하루를 끝내가며 느슨해지는 여유인데 그걸 못하게 한다고? 이기적이어도 이렇게까지 이기적일 수 있겠어? 금혼령보다 더 화나네?
우리 동네에 혐오시설이 들어오는 걸 반대하는 시위는 귀여울 정도로 전국적으로 동의하는 사람들이 많을 거야. 내가 ‘애주가’라서 하는 말이 아니고, 지금 생각해 봐도 떠오르는 술꾼들 여럿 있지 않아? 전국 팔도에 퍼져있는 그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거라고.
음, 방문 꽁꽁 잠그고 숨어서 먹는 방법도 있겠네. 솔직히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울거나 하는 술주정만 부리지 않으면, 아침에 일어났을 때 두통에 시달리며 숙취를 티 내지 않는다면, 비어있는 술통을 잘 정리하고 환기만 제대로 시켜놓으면 괜찮지 않을까?
말은 이렇게 하지만 워낙 FM 같은 성격이거든. 하지 말라는 건 안 하는 편이라 아마 눈물을 머금고 술잔을 내려놓을 거야. 그러니 의사로부터 '건강상의 이유로 당장 술을 끊으세요'라는 말을 듣지 않아 얼마나 다행인 줄 몰라. 휴,
술을 마시지 않는 삶은 어떨까? 아침에 일어나는 게 개운하려나? 간밤에 마신 술로 얼굴이 부어버려 비싼 돈 내고 수술한 쌍꺼풀이 살에 파묻히는 경우는 없겠다. 부글부글한 아랫배 때문에 온 가족이 화장실 앞에서 다리를 꼬고 문을 두드리는 일도 없겠네. 지구의 중력을 거스르며 걷는 와중에 혹시라도 술김에 뱉어버린 실언을 수습하려는 노력도 그렇고.
아침이 개운하니 하루도 즐거울 거야. 최상의 컨디션으로 해야 할 일을 잘 끝내고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는 차 한잔씩 사이에 둔 채 도란도란 건전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겠다. 너.무.훌.륭.한.걸?
하지만, 잠들기 전에 너무 허전할 것 같아. 팽팽하게 줄이 당겨진 활처럼 긴장감이 가득했던 하루였잖아. 더 이상 당겨지면 끊어질 수도 있는 그것에 술 한 방울만 발라주면 느슨해질 텐데. 그 정도는 허락해 주면 안 될까?
어색한 사이를 가까워지게 만드는 데 술만큼 좋은 수단이 뭐가 있다고 말이야. 물론, 맨 정신으로 다시 만나면 또 어색해질 수도 있지만. 큭큭. 뜨거운 햇볕 아래 허리 한번 제대로 펴지 못하고 농사를 짓던 농부에게 새참 바구니에 함께 딸려온 막걸리 한 사발은 얼마나 달콤하게. 한 모금씩 주고받고 쪽잠이라도 자면 남은 시간도 힘내 열심히 살 수 있지 않겠어? 여행을 가면 말이야. 동네마다 유명한 술이 있거든. 그게 그냥 술이 아니라 그들의 지난 삶이고 역사라 외면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잖아.
그러니까 말이야, 혹시라도 금주령을 생각했다면. 넣어둬 넣어둬.
적당히만 마시면 되잖아?
딱 한잔만 더 하자.
(이미지 출처 :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