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으악, 이게 뭐야!” 하나둘 폴폴 내리는 싸라기눈인 줄 알았는데 털어낼수록 숨어있던 것들까지 뛰어 마중을 나오는 꼴이 사실은 함박눈이었다. 하필 개미 마냥 까만 옷을 걸쳐 어깨에 소복이 쌓인 것들을 털어내는 엄마의 손만 바쁘다. “괜찮아.” “괜찮긴 뭐가 괜찮아.” 태평한 녀석과 달리 기겁하는 엄마만 똥줄이 탄다. 혹 학교에서 친구들이 더럽다고 놀리면 우는 건 아닐지 걱정인데, 휘잉 부는 찬바람에 튄 콧물까지 옷에 쓱쓱 문지르는 너란 녀석. 어느새 아이의 몸은 사춘기를 향해 가고 있다.
강아지처럼 귀여운 꼬순내를 풍기던 발냄새는 쿰쿰해져 순간 표정 관리가 안 되고, 누워서 기저귀에 똥만 싸던 시선은 얼추 눈높이가 비슷해졌다. 비가 잔뜩 오던 날 젖어버린 운동화가 아직 마르지 않은 날은 급한 대로 엄마의 것을 신고 나가며 “딱 맞네.”하고 웃는 얼굴이 보인다. 조금은 다행이다, 아직 방문을 쾅쾅 닫지 않아서. 고맙다, 아직 세모눈을 뜨지 않아서. 사춘기라는 건 차라리 빨리 오는 게 낫다고 하지만, 아직 둥지 안에 알처럼 품고 싶은 욕심도 있기에 날갯짓하려는려는 아이의 모습을 바라만 볼 뿐이다.
초등학교 6년에 비해 중학교 3년과 고등학교 3년은 상대적으로 빠르게 지나간다고 한다. 어제 초등학교 졸업 앨범을 찍은 나의 아이는 3년 후에, 또 3년 후에도 졸업앨범에 들어갈 사진을 찍겠지. 괜히 뭉클해졌다는 핑계로 잔을 채웠다. “도대체 술은 무슨 맛이야?” 저녁 식사 시간마다 각자의 잔을 채우는 부부를 보며 아이가 묻는다. “고등학교 들어가면 아빠가 한 잔 줄게.” “아빠, 그거 불법이야.” 순진하긴. 너희 아빠는 그때부터 순대 곱창집에서 소주를 마셨지만, 일단은 비밀! 벌써 알려줄 필요는 없으니까. 그럼에도 미소가 번진다.
지금이야 ‘아빠가 최고’, '엄마가 가장 좋아’하며 품 안에 폭폭 안기지만 언젠가 더 이상 품 안에 담을 수 없을 만큼 자라겠지. 더 이상 부모를 찾지 않고 친구들만 찾는 날도 올 거야. 언젠가의 우리처럼. 그럼에도 엄마의 무거운 가방까지 낑낑대며 들어줄 만큼 자라버린 연약한 너의 팔뚝을 보면 가슴이 저릿해져. 우리가 같이 한잔할 수 있는 날, 사이다와 맥주가 아닌 비슷한 도수를 담은 잔을 맞댈 수 있는 그날을 위해 우리는 부단히도 노력하고 노력해야 할 거야. 우리의 부모님이 그랬던 것처럼. 때로는 서로에게 깊은 상처를 주기도 하고 지독한 외로움을 줄 수도 있겠지. 그렇지만 이렇게 꾸준히 바라고 있을게.
할머니. 엄마. 그리고 아이.
술 먹고 늦으면 걱정되어 졸린 눈 비비며 기다릴지도 몰라. 요즘 밤길 흉흉하다는데 그때는 더 심하겠지? 우리에게만 보이는 속이 시커먼 능구렁이에게 못 이기는 척 잡아먹힐까 봐 술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주책 엄마가 되는 건 아닌지 몰라. 아침에 해장국을 끓여주는 건 안 하고 싶은데, 그 꼴을 어떻게 보지? 해장은 알아서 해결하자. 그래도 가끔 콩나물 해장국 정도는 포장해다 줘. 그동안 내가 차려준 밥상에 대한 보상 정도라고 여기면 어떨까. 십여 년 후의 대학 MT나 회사 회식 자리는 우리 때의 그것과는 다를지 궁금해. 엄마 아빠 닮았으면 주량 걱정은 안 되지만 너무 잘 마셔도 곤란하거든. 그래서 걱정이야.
남편의 소주잔, 나의 맥주잔, 아이의 물잔이 함께 부딪친다. 아빠를 흉내 내며 생수를 담은 소주잔을 들이키며 시원하게 ‘크’ 소리를 뽑아내는 모습에 한 명씩 웃음이 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