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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빛영글 May 24. 2024

손톱을 깎았다

토독, 토독. 짧게 잘려 나가는 모양새는 눈썹 같기도 하고 웃는 표정 같기도 하다. 운이 좋으면 힘없이 뜯겨 나가기도 하지만 때로는 깊이 박힌 나무뿌리처럼 단단해 잔뜩 힘을 줘도 좀처럼 틈을 내어주지 않는다. 혹 상처라도 날까 싶어 진땀이 흐르기도 한다. 아기일 때는 한없이 작고 여려서 종이도 벨 수 없을 것 같은 가위로 조심조심 잘라내야 했던 작은 것들이, 이제는 제법 단단해져 어른의 것 못지않아 어떤 날은 스스로 해결하기도 한다.

“강아지 키우고 싶어.”

모처럼 마주 잡은 손에 몸이 묶이니 작은 입이 바쁘게 움직인다.

“안돼. 엄마가 자르는 손톱 발톱만 60개야. 더 이상 늘리지 마.”

“우리가 똥도 치워주고 산책도 시켜주면 되잖아.”

감히 생명을 책임진다는 것에 대한 무게감을 알 턱이 없는 너희들의 해맑음이 때로는 부럽다.



여기저기 퍼져있는 것들을 조심스레 손으로 쓸어 모아본다. 손톱의 자라는 속도는 발톱의 속도보다 빠르다. 기쁜 일이 있을 때는 발톱이 자라고 슬픈 일이 있을 때는 손톱이 자란다는 이야기도 있다. 우리는 이토록 슬픈 삶을 살고 있는 것일까?


“나 오늘 우울해. 한잔하고 싶은데 나올 수 있어?”

슬픈 일이 있을 때 찾을 수 있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괜찮은 삶. 마주치는 작은 유리잔에 찰랑이다 넘쳐나는 것들을 휴지에 쓱쓱 문질러 구겨버리듯, 당신을 슬프게 하는 것도 모두 사라져 버린다면 훌륭한 순간. 무엇이 그리 슬펐는지 아무도 묻지 않은 이야기를 나의 손톱에 물어본다. 나라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고맙다고 애썼다고 토닥인다.

“진짜 좋은 일 생겼어! 나와, 내가 오늘 2차까지 쏜다!”

좋은 일은 함께 나누면 기쁨이 2배가 된다고 했던가. 한잔 두잔 부딪히는 묵직함에 처음의 목적 따위 잊히고 하하호호 떠드는 동안 계산서는 한 줄씩 양을 늘려간다. 뭐가 그리 기뻐 양말까지 뚫고 나오는 건지 아이의 발톱에도 물어본다. 통통 튀어 오르는 발톱은 손톱 산에 좀처럼 합쳐지지 않는 것이 제 주인을 닮았다.


소복이 뭉쳐진 것들에도 저마다 할 이야기가 있겠지. 간당간당 달려있다가 함께 떨어져 나온 먼지 조각은 어디서부터 따라온 건지 마치 저도 할 이야기가 있다는 듯이 까만 얼굴을 빼꼼 들이민다.



그래, 어디 한 번 들어나 보자.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으니 마실 것 좀 가지고 올까? 내가 쏠 것도 네가 쏠 것도 없이 냉장고를 열어본다. 역시, 오늘도 빠질 수 없지. 계산서 걱정할 필요도 없어 한잔 가득 채워놓고 주거니 받거니 시작한다. 

하얀 백지에 한 줄씩 까만 것들로 채워볼까. 데스노트처럼 나를 함부로 대했던 누군가의 모음과 자음을 꾹꾹 눌러 적어본다. 네 이놈 가만두지 않겠어. 쓰는 동안에도 부들부들 떨리는 기억은 벌컥벌컥 잔을 비우기에 충분하다. 그러고 보니 이런 일도 있었지. 이유도 모른 채 받은 사랑 고백 쪽지처럼 살랑대는 마음을 사각사각 적어본다. 그래, 이런 일은 오래도록 기억해야 하는 거야. 행복한 수줍음에 얼굴이 달아오르니 한 김 식혀야겠다. 또 한 모금 들이켠다.


기뻐서 한 모금, 슬퍼서 한 모금, 누가 더 빨리 누가 더 많이 할 것 없이 공평하게 한 모금씩 나눠 마시는 거야.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손톱과 발톱을 모아 한 데 섞어 털어 버린다. 잘라내는 만큼 사라질 슬픔이라면 손톱을 전부 뽑아버리는 짓도 할 수 있는데, 잘라내지 않으면 기쁜 일만 생기는 거라면 운동화가 찢어질 때까지 기를 수도 있을 거야. 그럼에도 우리의 마음은 이렇게 오늘도 정돈된다. 그래도 괜찮다. 모든 것을 기억해 줄 종이가 있고, 함께해 줄 잔이 있으니.


따끔, 미처 찾지 못한 발톱이 발에 밟혔다.



(이미지 출처 ;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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