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 상상을 해봅니다. 상체는 조금 풍만해 보이고 (어쩌면 실제로 그럴지도 모르는) 허리는 단단하게 고정한 알록달록한 치마를 입은 여자를요. 긴 금발 머리는 깜찍하게 양쪽으로 쫑쫑 땋고, 양손 가득 나무로 만든 잔을 출렁이며 테이블 사이사이를 돌아다닙니다. 뿔이 달린 모자라도 쓰고 있었다면 바이킹의 후예처럼 보일 것 같겠죠. 테이블에 앉아 있는 코끝이 빨간 배 나온 아저씨는 멜빵이 아슬아슬하게 그의 초록색 바지를 고정해 주고 있겠죠. 바지보다 셔츠에 달린 단추가 더 아슬아슬할지도 모르겠어요. 머리에 얹어져 있던 모자는 피터팬이 쓰고 다닐 것 같은 모양새지만, 이미 그의 머리 위에 삐뚤어진 지 오래예요. 아마 네버랜드로 가기 전에 땅바닥으로 떨어져도 모를 것 같아요.
그들 안에 제가 있으면 좋겠어요. 덩치가 커다란 유럽 사람들 틈에 작은 동양인 여자라니. 양 갈래머리를 한 여자가 엉덩이로 치고 지나가면 나자빠질 수도 있고, 녹색 멜빵 아저씨가 웃을 때 흔들리는 배에 튕길 수도 있겠고요. 그러다 입에 가득 담겨있던 소시지나 훈제 치킨 같은 것들이 튀어나올 수도 있겠죠. 하지만 괜찮아요, 듬성듬성 이가 빠진 자리에서 새어 나오는 웃음은 저를 비웃는 게 아니거든요. 모두가 즐겁고, 저도 즐거울 거예요.
옥토버페스트 ;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민속 축제이자 맥주 축제. 독일 남부 바이에른주 뮌헨 테레지엔비제에서 열린다 (출처 ; 네이버)
날이 추우면 추워서, 더우면 더워서, 좋으면 좋아서 축제를 여는 건 비단 우리나라만의 이야기는 아닌가 봐요. 흥이 있는 민족이라 축제가 많은가 했지만, 세상 진지할 것 같은 독일 사람들도 축제를 하네요. 심지어 술을 마시는 축제라니. 너무 좋지 않아요?
거대한 천막 안은 외부와 단절시켜 줄 거예요. 지금 가지고 있는 무기력과 피로감 따위 천막 밖에 놓고 들어가는 거죠. 마치 서커스를 보러 들어가듯 두근두근. 평소 마시던 500cc 맥주잔보다 큰 덩치의 술잔을 가득 채워 서로의 잔을 힘껏 부딪쳐 손등으로 끈적이는 맥주가 흘러나와도 신이 나요. 까짓것 슥슥 옷에 닦으면 되니까요. 흘러나오는 음악에 몸을 흔들어 보는 건 어때요? 사람들 시선 따위 신경 쓸 필요 없어요. 어쩌면 몸치라서 더 좋을 수도 있거든요. 뻣뻣한 몸은 모르는 음악에 맞춰 흘깃흘깃 다른 사람의 춤을 흉내 내는 정도로만 보일 수도 있거든요. 그리고 좀 못 추면 어때요? 그저 즐기는 시간인걸요.
인생 백 세 시대라고는 하지만 개인적인 기준에서 80세 전후가 적당한 것 같아요. 40이 넘은 지금. 그럼, 인생의 반 이상은 살아온 것 같은데요. 나머지 반을 내가 하고 싶었던 것들로 채워나갈 수 있을까요?
하늘을 나는 비행기에서 크루에게 떠밀려 스카이다이빙을 해보고 싶어요. 항상 밑에서 바라보기만 했던 하늘을, 바람을, 공기를 온몸으로 느끼는 것은 상상만으로도 오금이 저리고 손바닥에 땀이 흥건하지만, 기회가 생긴다면 꼭 해보고 싶어요. 아니, 기회를 만들어야겠어요! 어차피 내 의지와 상관없이 뒤에서 밀어줄 테니 어.쩔.수.없.이 떨어져야 되잖아요.
하늘을 날았다면 깊은 바닷가를 헤엄쳐 보는 건 어때요? 시력이 좋지 않아 안경을 끼지 않으면 보이는 게 없는데 그래도 좋아요. 내 숨소리만 들릴 것 같은 조용한 바닷속 깊은 곳까지 꼬르륵 내려가 보고 싶어요. 서두르지 않고, 아니 서두르면 안 되는 그곳에서 고요함을 즐기고 싶거든요. 예전에 스노클링했을 때 갑자기 달려드는 작은 물고기 떼에 식겁한 적이 있어서 조금 무서울 것 같긴 하지만 가만히 있으면 저도 물고기인 줄 알지 않을까요? 운이 좋으면 거북이도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거북이가 장수의 상징이라죠? 장수하고 싶지는 않으니까, 거북이가 오면 눈부터 감을게요. 그런데, 그 전에 자격증부터 따야 할 텐데. 나 맥주병인데. 수영 강습부터 등록해야 하려나 봐요.
설산에도 올라가 보고 싶어요. 올라갈 땐 어찌어찌 올라가도 내려올 땐 관절이 죄다 풀려 후덜 대는 몹쓸 무릎이지만 꾸준히 단련시켜서 눈꽃 열차를 타고 설국 여행도 하고 싶어요. 엘사가 부럽지 않을 것 같거든요. 아, 그런데 나 추위 많이 타는데. 수족냉증 있는데. 괜찮을까요? 뭐, 어떻게든 되겠죠.
이것 참. 시작도 하기 전부터 걱정할 일 투성이네요
하지만 독일은 정말! 꼭! 한번 가보고 싶어요.
"구텐탁"
"이히리베디히"
제가 알고 있는 유일한 독일어는 이것뿐인데 공항을 벗어날 수 있을지부터 의심스럽긴 해요. 그래요. 어떻게든 되겠죠. 제게는 스마트폰이 있거든요. 참 좋은 세상이에요.
물론 랜선으로 떠나는 독일 여행도 있겠지만 고작 유튜브나 켜놓고 캔맥주 따라 놓고 흉내 내고 싶지는 않거든요. 화면이 꺼진 후에 까맣게 비쳐있을 알싸하게 취해있는 제 얼굴 같은 건 보고 싶지 않아요. 분위기에, 공기에, 그리고 맛에 취해 흐느적대고 싶어요.
같이 갈 친구들부터 구해야겠네요. 이불 속에 꽁꽁 숨겨놓은 제 모습까지 보일 수 있을 만한 친구로요. 그러니까 저 독일가면 찾지 마세요! 아, 그 전에 돈부터 모아야 할지도.
이렇게 적으며 보니 하고 싶었던 일들이 참 많아요. 일종의 버킷리스트 박살 내기 같은 거 해야겠어요. 그럼, 우선은 글부터 쓸게요. 하고 싶은 게 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