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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은채 Feb 22. 2024

증인진술서를 부탁하며

8년만에 친구가 찾아왔다.

스테인리스 냄비가 달그닥 달그락 싱크볼에 부딪히는 소리. 쏴 쏴 물소리. 연신 끓여대는 냄비의 열기들로 꺼둘 수 없는 환풍기 모터 돌아가는 소리. 5대의 냉장고 팬 돌아가는 소리. 1분의 여유도 없이 각자 할 일을 하느라 소음을 그대로 귀로 흡수하며 눈은 깜빡거림을 멈추고 손은 쉴 새 없이 움직인다.

전화상담을 할 일이 많기에 이어폰은 한쪽 귀에 꽂고 헤드셋은 목에 걸려 있다. 전화벨이 울린다.

통화연결음으로 가게이름과 안내멘트가 나오기에 최대한 친절한 억양으로 네~~라며 받았다.


"윤은채 씨 휴대폰 맞나요?"


8년 만에 듣는 목소리. 그대로 눈물이 흘렀다. 누구인지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너무 듣고 싶었던 목소리.


눈 코 입이 다 들어있는 게 신기할 만큼 작은 얼굴이지만 얼굴의 반을 차지하는 것 같은 큰 눈을 갖고 있는 희은이. 아이 셋을 출산했다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잘록한 허리에 두른 앞치마가 잘 어울렸고 청바지를 입고 있는 뒷모습도이쁜 친구. 나보다 몸집이 작은 친구지만 늘 언니 같이 침착한 희은이었다.

귀에 꽂혀있던 이어폰을 빼고 휴대폰을 귀에 갖다 댔다. 그렇게 하면 목소리가 더 가까이 느껴질 것만 같아서.


"희은이지? 너 희은이 맞지? 왜 이제야 전화를 했어!! 도대체 왜 이제야 전화를 했냐고!!"

울부짖으며 전화를 받는 모습에 일하던 스태프들은 모두 일시정지가 되었고 신랑 역시 매우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2014년 어느 겨울날 고속터미널에서 퇴근 후 6시 반에 희은이를 만나기로 했다. 그 전날 저녁 전화너머 희은이는 점점 더 심해지는 신랑의 의심으로 구속당하고 의심받는 하루하루가 너무 힘들다고 고백했다. 희은이는 가끔 전화를 해서 신랑이 의처증이 있는 것 같다며 우리를 만날 때를 제외하고는 외출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했었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아이가 셋인 데다 6살 어린 아내가 이뻐서 닳아버릴까 아내바라기 정도라고 생각했다.  우리가 모두 함께 만난 모임자리에서 보이는 신랑의 모습은 그랬다.


20살의 희은이를 생각해 보면 만화 속에 나오는 주인공만큼이나 사랑스러웠다. 만화 속 어딘지 모르게 슬퍼 보이는 큰 눈망울을 갖은 소녀는 꼭 희은이를 묘사한 것만 같았다. 희은이 신랑은 세상에 희은이를 내놓으면 놓칠세라 결혼을 서둘렀고 희은이는 가정을 빨리 꾸리길 꿈꿨기에 결혼은 속전속결로 이뤄졌다. 그렇게 희은이는 20살에 결혼을 했다. 첫째를 낳았을 때는 친구들 중 첫 출산이기에 철없이 단체로 산부인과에 가서 케이크를 들고 노래를 불렀다. 둘째 셋째 출산은 내가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 후라 전화로만 축하해 줄 수 있었다. 진심으로 축하해 주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생일축하해 와 크게 다르지 않은 무미건조한 축하였으리라 짐작된다. 20대의 철없는 나는 엄마가 되는 것이 얼마나 축복받는 일인지 몰랐으니.

방학중 한국을 올 때마다 희은이를 만났다. 해가 지날수록 희은이의 빛나던 얼굴은 점점 빛을 잃어갔다. 희은이를 만나기 위해서는 희은이 시어머님이 운영하시는 횟집을 가야만 만날 수 있었다. 아이들이 유치원과 학교를 간 사이 시어머님이 운영하시는 횟집에서 10년 동안 일을 도왔다. 마음 터놓고 이야기할 사람은 가끔 찾아오는 나밖에 없었을 거라는 것을 그때는 몰랐다. 아니 마음을 터놓지도 못했으리라. 그때의 나는 육아고충을 시댁살이의 고충을  들을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정원이 있는 2층 집. 그 옆 고급스러운 횟집. 안정되어 보이는 결혼생활과 사랑스러운 아이 셋과 함께하는 친구의 힘들다는 말은 그저 투정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고속터미널에서 6시 반에 만나기로 했지만 7시 반이 되도록 희은이는 오지 않았다. 전화는 꺼져있었다. 슬슬 무슨 일이 있는지 걱정이 되기 시작했고 발을 동동 구르며 버스하차 방면만 쳐다보고 있었다. 신랑의 구속으로 힘들다던 통화를 전날 했기에 희은이 신랑에게 전화는 차마 할 수가 없었다. 8시가 다 되어가는 즈음 전화가 한통 걸려왔다.

"**경찰서 형사***입니다. 윤은채 씨! 지금 박희은 씨 같이 계신가요?"

"아니요? 기다리고 있는데요? 무슨 일이 생겼나요?"

"거짓말하시면 안 됩니다! 지금 당장 집으로 보내세요. 가출신고가 들어왔습니다."


다짜고짜 으름장을 놓는듯한 말투였고 이미 내가 숨겨주고 있다는 확신에 차있었다. 2시간 가까이를 추위를 참으며 기다리고 있었고 갑자기 형사가 전화를 해서 따지는듯한 말을 하니 내 목소리도 커졌다.


"무슨 상황인지도 모르는데 왜 저한테  화를 내면서 말씀하시는 거죠? 아니? 여기 지금 당장 오셔서 희은이가 있는지 없는지 직접 확인하세요! "


전화를 끊어버렸다. 생각할 세도 없이 곧이어 전화벨이 울렸다. 희은이 신랑이었다.


"오빠? 도대체 무슨 상황인데 형사가 나한테 전화를 하는 거야? 희은이 전화기는 꺼져있고. "

"희은이랑 같이 있는 거 다 알아! 당장 전화 바꿔!!!"


윽박을 지르는 목소리에 놀라 전화를 끊어버렸다.도대체 무슨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고 혼란스러웠고 희은이의 행방이 걱정되었다. 희은이 친정엄마에게도 전화가 걸려왔다.


"은채야. 희은이 잘 타일러서 집에 보내라.. 그래야 돼... 제발 부탁이다. 그게 희은이를 위한 거야."


희은이 친정엄마조차도 내가 숨겨주고 있다고 확신하고 계셨다.


희은이는 도대체 지금 어디에 있는지 답답했고 상황정리가 되지 않았다. 일단 고속터미널로 오지 않을 거라는 확신에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향했다. 전화는 계속  걸려왔고 다른 친구들 역시 희은이 신랑과 비슷한 반응이었다.

"은채야 너 희은이 숨겨주지 말고 집에 보내. 너까지 피해 입어."

"아니 도대체 만나지도 못했는데 왜 다들 내가 숨겨주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리고 왜 숨겨주면 안 되는지 왜 희은이는 숨어야 하는지 아무것도 명확하지 않은데 도대체 무슨 상황인 거냐고!"

"희은이 신랑이 희은이가 바람 폈다고 지금 들어오면 용서해 준데"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희은이한테 확인했어? 희은이 신랑 진짜 미친 거 아니야??"


9시 반 즈음 희은이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은채야 나 지금 고속터미널이야. 어디야??"

"뭐? 전화는 왜 꺼놓은 거야?? 3시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 줄 알아?? "

"왜?? 혹시 오빠가 너한테 전화했어??"

"오빠한테만 전화가 왔는 줄 알아?? 너네 엄마한테도 전화 오고 형사한테도 전화 오고 난리도 아니야. 일단 친정으로 가던지 해. 여기와 봤자 오늘밤에 너희 신랑이 찾으러 오던 너네 엄마아빠가 찾으러 올 기세야. "

"그래.....................알았어"


희은이의 나긋한 목소리를 듣고 안도가 되면서 3시간 동안 내가 겪은 피로에  희은이를 걱정했었다는 말은 전하지도 못했다. 그렇게 내 입장만 들이밀었다. 희은이가 터놓고 말할 마지막 기회를 내가 망쳐버렸다.


전화를 끊자마자 한통의 문자가 왔다..

⌈더 이상 나는 너희의 친구가 아니야.⌋라는 문자를 나를 포함한 친구들에게 보낸 후 다시 전화는 꺼져있었으며 얼마후 없는 번호라는 멘트로 바뀌었다. 희은이 친정엄마에게 내가 연락을 기다린다는 말을 전해도 연락이 오지 않은 채 8년이 흘렀다.


고속 터미널에서 만나기로 했던 날. 희은이는 전날 저녁 쓰레기를 버리러 나온 사이 집 앞 벤치에 앉아 나에게 전화하고 집으로 들어갔었던 모양이다. 희은이 신랑은 누구랑 통화했는지 추궁을 했고 그날따라 말해주기 싫었다며 대답을 회피했다고 한다. 그 일로 희은이 신랑은 희은이 휴대폰에 위치추적기를 몰래 설치했다. 추적기를 통해 터미널로 희은이 에게 전화를 걸어 어디 가느냐 물었고 버스를 타지 않고 휴대폰매장으로 가서 위치추적기가 설치된 걸 확인하고 휴대폰을 꺼버렸다고 한다.



희은이를 만난 날 우리 둘은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그리고 마지막 만남이 될뻔했던 그날 고속터미널에서 희은이는 세상사람 모두에게 버림받은 것 같아 죽고 싶었다며 그날일을 회상했다. 아이 셋만 아니었으면 분명 죽었을 거라고 했다. 그날 희은이가 얼마나 힘든 시간이었을지. 얼마나 처절하게 외로웠을지. 가슴이 많이 아팠고 죄책감이 들었다. 아이를 키우며 힘들 때마다 희은이 생각이 났었다. 20대에 타지에서 아이 셋을 키우며 신랑의 의처증을 어떻게 견뎠을까. 가끔 오는 친구가 그 힘듦을 알아주지도 못하는데 얼마나 고독했을지.


희은이는  긴 싸움을 하고 있었다. 이혼소송에서도 양육권소송에서도 8년 엎치락뒤치락한 소송 중 불리한 상황이었다. 시어머님횟집에서 한 번도 일을 하지 않고 도우지 않았으며 아이도 돌보지 않았다는 말도 안 되는 상대편 진술에 반박해야 했다. 증인진술서를 써줄 사람이 나밖에 생각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게 나여서 고마웠다. 나에게 전화를 해줘서 진심으로 고마웠다. 앞으로 내가 아무리 잘해도 그날의 아픔이 없어지진 않을 거라는 것도 잘 안다. 이 또한 미안함 마음을 느끼기 싫은 나의 이기적인 마음 일 것이다. 희은이는 중학생 때처럼 고등학생 때처럼 나보다 작은 체구이지만 여전히 나보다 넓었고 깊은 마음을 갖고 있다.

"은채야. 미안해할필요없어 그때 우리 다 어렸잖아. 지금 잘 살고 있어서 오히려 고마워"

닭살스러운 멘트역시 여전하다.


그로부터 다시 2년이 흘렀고 희은이의 첫째딸은 성인이되어 생일을 맞이했다.이모 노릇이 하고싶어 젊은 취향의향수를 지인들에게 물어 향수와 꽃다발 케익을 보냈다. 희은이가 활짝웃는얼굴로 큰딸과 영상통화를 해왔다. 희은이의 얼굴은 다시 예전처럼 빛나고 있다.

살면서 의도를 하던 하지않던 무수히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면서 살아가게 되는것같다. 만회할수있는기회가 생겼음을 진심으로 감사하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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