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의 능동적 참여와 창조
나에게 책 읽기는 단순한 취미가 아니다. 그것은 나 자신을 해방시키는 행위이다. 일상의 소란에서 벗어나 고요한 공간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 안에서 나는 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거나, 새로운 관점을 발견한다. 책은 내게 영감을 주는 친구이자 새로운 세계로 이끄는 안내자이다. 책을 읽느라 밤을 꼬박 새운 적도 많고, 음식을 태운 적도 여러 번 있다. 목욕물이 넘치거나 커피가 식어버린 경험도 셀 수 없이 많다. 이렇게 책 읽기에 몰두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하나만 고르라면 “알을 깨기 위해서”이다.
헤르만 헤세의 소설 『데미안』에는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해야 한다.”라는 유명한 구절이 있다. 이 구절은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고 성장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독서를 통해 나는 마치 알을 깨는 듯한 경험을 한다. 깨어지기 위해 책을 읽는다. 깨어져야 새로운 생명이 나오기 때문이다.
“딸아이한테 읽어주려는 건가요? 아이가 책을 좋아하는가 봐요.”
도서관에서 그림책을 한 아름 안고 집으로 가는 길에 마주친 이웃들의 흔한 반응이다.
“아니요, 제가 읽으려고요.”
그러면 어김없이 의아한 시선과 당황한 표정들이 돌아온다. 많은 사람들이 그림책은 어린이들만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성인은 긴 문장과 복잡한 내용을 가진 책을 읽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에 얽매여 있고, 그림책은 문학적인 가치가 적다고 여기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그림책은 단순한 어린이용 책이 아니다. 그림책은 우리에게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는 유용한 도구다. 다양한 문화적, 철학적, 심리적 주제를 다루며, 새로운 인사이트를 제공한다. 성인에게도 깊이 있는 생각과 감동을 선사할 수 있는, 놀랍도록 풍부한 세계를 담고 있다. 그림책에 대한 오해를 풀어줄 그림책이 있다.
『아무것도 없는 책』은 할아버지가 손녀에게 선물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빨간색 표지의 이 책은 글자나 그림이 하나도 없는, 완전히 텅 빈 책이다.
"이게 뭐예요? 공책이에요? 수첩이에요?"
손녀는 의아한 눈빛으로 할아버지를 바라보며 물었다. 할아버지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니, 이건 책이란다. 전기도, 컴퓨터도, 태블릿 PC도 없던 시절부터 있었던 거지."
순간, 왜 할아버지가 공책이나 수첩이 아니라 책이라고 했을까 궁금했다. 아마도 책은 단순히 메모나 계획을 기록하는 용도가 아니라,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도구이기 때문인 듯하다. 공책이나 수첩은 정보를 기록하고 정리하는 데 초점을 맞추지만, 책은 독자가 참여하고 상상력을 발휘하게 한다.
할아버지가 선물한 이 텅 빈 책은 손녀에게 무한한 가능성을 열어준다. 빈 페이지는 그녀가 그 안에 무엇이든 상상하고 창조할 수 있는 공간이 된다. 글자도, 그림도 없는 이 책은 오히려 무한한 이야기와 이미지를 담을 수 있는 캔버스인 것이다. 할아버지는 손녀에게 가장 귀중한 선물, 즉 상상의 자유를 선사한 것이다.
할아버지는 빈 페이지로 가득 찬 이 책을 펼칠 때마다 머릿속에 새로운 생각이 떠오를 것이라고 말했다.
“어떤 생각이라도 떠오를 수 있지. 재미있는 생각, 쓸모 있는 생각, 멍청한 생각, 이상한 생각, 착한 생각, 슬픈 생각, 시적인 생각, 시시한 생각, 평범한 생각, 그리고 위대한 생각도.”
『아무것도 없는 책』은 소녀의 가능성과 창의적 잠재력을 품고 있었다. 이 책은 어떤 생각이든 제한 없이 받아들일 수 있고, 자신의 내면을 탐구하고 표현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할아버지는 손녀가 이 책을 통해 자기만의 독특한 이야기를 써 내려가길,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잠재력을 발견하길 바랐다.
할아버지는 책의 흰 종이 위에 뭐라도 묻으면 마법의 힘이 사라지고, 평범한 공책이 되어버린다고 말했다.
"엄마, 이건 지키기 너무 힘들 것 같아."
책에 꼭 낙서를 해야만 마음이 풀리는 딸아이에게는 무리한 요구였다. 책에 가차 없이 줄을 긋고 메모를 남기는 나에게도 마찬가지였다. 할아버지는 빈 책의 특별한 가치를 잃지 않도록 그 본래의 목적을 잊지 말라고 당부하신 것 같다.
어떤 생각이나 글, 그림이 쓰여지면 그것은 특정한 형태와 의미를 가지게 되고, 상상력은 그 경계를 넘어서기 힘들어진다. 할아버지는 빈 책의 순수한 상태를 강조하며, 그것이 단순한 공책이 아닌, 상상력의 날개를 달아주는 도구로 남아있기를 바랐던 것이다. 책의 흰 페이지는 그녀가 자유롭게 탐구하고, 창조하며, 자신만의 이야기를 써 내려갈 수 있는 공간이었고, 할아버지는 그 순수한 가능성을 지키기를 바랐다.
이후 『아무것도 없는 책』은 손녀의 삶에서 중심이 되었다. 그녀는 주로 부엌에서 요리를 개발하고 싶을 때 이 책을 펼쳐 놓았다. 그 덕분에 요리책을 쓰게 되었고, 열정과 관심사를 탐구하며 자신의 능력과 창의성을 발전시켜 나갔다.
"엄마도 이 책이 있다면 책 낼 수 있을 텐데. 이런 책 진짜 있을까?"
딸아이는 빈 책을 펼쳐놓기만 하면 마법처럼 기발한 생각들이 떠오른다고 믿었다.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인 것 같다. 아무런 생각이 없다가도, 모니터에 흰색 화면을 보고 있으면,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르고 글을 쓰게 돼 곤 한다. 마음의 창문이 열린 듯이, 새로운 생각들이 쏟아져 나오기도 한다. 아마도 빈 화면을 켜놓는 것이 창의적인 생각에 몰두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여, 심리적 자극을 주기 때문인 것 같다.
『아무것도 없는 책』은 자신만의 생각과 상상력을 자유롭게 펼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는 책이다. 이 책은 독자들에게 자신을 발견하고 새로운 생각을 발굴하는 과정을 이야기하고 있다.
『아무것도 없는 책』처럼, 그림책 안에서는 열린 해석과 상상력이 자유롭게 펼쳐질 수 있다. 전통적인 서사의 틀을 벗어나는 그림책은 마치 퍼즐을 맞추는 듯한 재미를 선사한다. 일부러 생략된 부분은 숨바꼭질을 하듯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하며, 열린 결말은 독자가 자유롭게 이야기를 완성할 수 있도록 돕는다. 이런 경험은 독자를 단순한 수용자가 아닌 이야기의 공동 창작자가 되게 한다. 그림책은 독자에게 강요하지 않는다. 이러한 그림책의 매력은 독자가 능동적으로 참여하게 만들며, 각자의 상상력과 해석을 더해 하나의 이야기를 완성하는 특별한 즐거움을 준다.
그림책은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그림과 텍스트를 함께 읽으며 이야기를 해석하고 확장하게 만든다. 그 과정에서 독자는 여백을 채우며 사유하는 즐거움을 느낀다. 특히 일부 그림책은 글이 없는 경우도 있어, 독자는 그림만으로도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고 자신의 경험과 결합시킨다. 이러한 경험은 독자의 내면을 탐구하고 성찰하는 데 큰 역할을 한다.
책은 단순히 글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상상하고 생각을 펼쳐 나가는 공간이다. 독서는 외부의 정보를 수용하는 것을 넘어, 내적으로 생각하고 세계를 탐구하는 과정이다. 책을 읽는 동안 독자는 능동적으로 세상을 이해하고, 그 안에서 자신만의 길을 찾는다.
그림책을 통해 우리는 진정한 독서의 의미를 충분히 즐길 수 있다. 독서는 우리가 외부의 정보를 넘어 내면으로 들어가며, 자신만의 세계를 발견하는 여정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림책이 열어주는 끝없는 상상력의 세계에 많은 사람들이 함께 자유롭게 날아다닐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