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과 치유의 숲속 이야기
6월 6일 현충일을 맞아 딸아이와 당일치기 기차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새벽 6시, 두 눈만 겨우 뜬 채 출발했는데, 피곤한 건 나뿐인 것 같다. 진한 커피를 두 잔이나 들이켰지만, 여전히 몽롱한 상태다. 졸린 눈을 비비며 연신 하품을 하고 있는 내 얼굴을 보며, 딸아이는 쉴 새 없이 재잘거린다. 역시 오늘 하루도 만만치 않을 것 같다.
“엄마, W 부모님은 이혼했대.”
“사랑아, 설마 친구들 사이에서 그런 말 하는 거 아니지? 사실이든 사실이 아니든 그런 말 하면 절대 안 돼.”
“W가 비밀이라고 해서, 아무한테도 말 안 했어.”
W는 사랑이와 같은 어린이집을 다녔던 친구다. W와 사랑이는 한동안 만나지 못하다가 올해 같은 반이 되어 다시 만났다. W와 그의 엄마는 우리 집에 자주 놀러 오곤 했는데, 그때 그녀로부터 무거운 이혼 과정 이야기를 들었던 기억이 있다.
“W는 아빠만 자기를 사랑하고 엄마는 자기를 사랑하지 않았대. 그래서 자기를 버리고 떠난 거래. W는 그런 엄마가 보고 싶지 않다고 했어.”
“W엄마가 W를 얼마나 아끼고 사랑했는지, 사랑이 엄마가 또렷하게 다 기억하고 있다고 꼭 전해줘.”
엄마를 미워해야만 자신의 고통을 덜 수 있기 때문이었을까, 그렇게 믿어야만 보고 싶은 마음을 덜 수 있기 때문이었을까,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엄마와의 이별을 이해하려는 몸부림이었을까? 그런 생각을 해야만 버틸 수 있는 그 마음이 너무 가여웠다. 9살 아이의 여린 마음이 차갑게 무너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자신이 잘못해서 엄마가 떠났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는 현실이 아프다. 문득, 어제 컴퓨터 화면을 통해 만난 그림책 친구들과 나누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숲속으로』는 주인공 아이가 무서운 소리에 잠에서 깨어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다음날 아침, 아빠가 보이지 않자, 아이는 엄마에게 아빠가 언제 돌아오실지 묻지만, 엄마는 모른다고만 대답한다. 엄마는 아이에게 아픈 할머니에게 케이크를 갖다주라고 심부름을 시키며, 숲으로 가지 말고 멀리 돌아가라고 당부한다. 그러나 아이는 아빠가 돌아왔을 때 집에 있고 싶은 마음에 지름길로 숲을 가로지르기로 한다. 숲속을 지나가던 아이는 젖소를 끌고 가는 소년과 금발 머리의 여자아이, 그리고 부모를 잃어버린 남매를 만난다. 다행히 아이는 할머니 집에 무사히 도착하고, 그곳에서 할머니와 아빠를 만나게 된다.
새빨간 면지를 넘기자 천둥번개 치는 밤, 어두운 방 안에서 불안한 표정으로 침대에서 일어난 소년이 등장한다. 창밖에는 여전히 번개가 번쩍거리고 있다. 집 안을 뒤흔드는 천둥소리에 소년이 잠에서 깬 듯하다.
“엄마, 아빠를 불러야지! 왜 혼자 있지? 이 오빠 너무 무서울 것 같아.”
천둥번개의 공포를 아는 딸아이는 주인공 소년이 무서운 밤을 홀로 견뎌야 하는 상황에 울먹이며 안타까워했다. 부모님이 계시지 않는 소년이라고 짐작한 듯하다. 침대 발밑에는 짙은 군청색 군복을 입고 옆에 총을 든 병정 인형이 있지만, 다리 한쪽이 없다. 마치 소년의 불안한 마음을 대변하는 듯하다. 방 안 어디를 봐도 의지할 것은 하나도 없다. 이불을 꼭 끌어안고 홀로 공포를 온전히 느껴야 하는 소년의 불안과 두려움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다음 날, 아침을 먹기 위한 식탁 정면에는 무표정한 엄마가 침묵한 채 앉아 있고, 아이는 엄마의 왼쪽에서 눈치를 보며 앉아 있다.
“엄마가 있었어?!”
주인공을 돌봐 줄 이가 없다고 생각했던 딸아이는 엄마의 존재를 확인하고 놀람과 안도가 뒤섞인 질문을 했다. 음울한 정적이 감도는 식탁에는 의자가 세 개인 것을 보니 아빠도 함께여야 할 자리였다. 그러나 아빠의 빈 의자 뒤로 길게 드리운 그림자는 그의 부재를 더욱 부각시킨다. 엄마는 아침 식사를 하지 않고, 아이의 자리에는 단출한 식사만 차려져 있다. 엄마의 눈빛은 초점 없이 허공을 향하고 있다. 연녹색 벽지는 차가운 분위기를 더욱 고조시키고, 꺼져있는 식탁 전등 또한 우울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세 사람 가족이 사용하기에는 지나치게 커 보이는 식탁은 마치 가족 간의 심리적 거리를 나타내는 듯하다.
지난밤 아이가 두려워했던 천둥번개 소리는 사실 엄마 아빠의 다툼이었다. 아이는 "아빠, 빨리 돌아와요!"라는 글귀를 적어 집안 곳곳에 붙여놓았다. 그러나 집 안은 여전히 불안으로 가득하다. 의자에 깊게 드리워진 그림자, 금이 간 가족사진, 굳게 닫힌 파란 문은 그 불안한 가족의 현실을 여실히 드러낸다. 아이의 간절한 바람에도 불구하고, 집안 분위기는 어둡고 무겁게 가라앉아 있다.
다음 날,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 엄마는 할머니가 아프시다며 케이크를 갖다주라고 한다. 엄마는 숲으로 가지 말고 멀리 돌아가라고 당부하지만, 아빠가 돌아왔을 때 집에 있고 싶은 아이는 지름길인 숲으로 들어간다. 숲속을 지나가며 아이는 다양한 인물들을 만나게 된다.
먼저, 아이는 젖소를 끌고 가는 소년을 만난다. 이 소년은 『잭과 콩나무』의 주인공 '잭'을 연상하게 한다. 그림에는 콩 나무와 거인의 방망이가 숨겨져 있다.
“젖소랑 네 바구니에 있는 케이크랑 바꾸자.”
소년은 젖소와 달콤한 케이크를 바꾸자고 제안하지만, 아이는 아픈 할머니께 드려야 한다며 거절한다. 그러자 소년은 말한다.
“나도 아프다고...”
짐작했겠지만, 이 말은 자신이 아프다는 것이다.
『잭과 콩나무』의 주인공 잭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가난을 헤쳐 나가기 위해 젖소를 팔러 나선다. 작가는 잭의 모습을 통해 아이가 부모의 다툼 속에서,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가정의 상황을 책임져야 하는 압박을 느끼고 있음을 보여주고자 했던 것 같다. 아이는 부모의 갈등으로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자신의 역할과 책임을 찾으려 애쓰고 있다. 그러나 아직 어린아이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몰라 불안하고 혼란스러워한다.
다음으로 아이는 한 소녀를 만난다.
“엄마, 여기 봐! 곰이 세 마리가 있어! 아빠 곰, 엄마 곰, 아기곰이야. 이건 곰이 사는 집인 것 같아.”
‘이걸 찾아낸다고?’ 딸아이의 눈썰미는 거의 초능력 수준이다. 작가는 숲속 나무 기둥 사이에 곰 세 마리와 집을 숨겨놓았다. 정말 자세히 보아야 곰의 형체를 볼 수 있다. 아이가 만난 소녀는 『곰 세 마리와 금발머리 소녀』의 주인공을 떠오르게 한다. 소녀도 케이크를 먹고 싶다고 하지만, 아이는 거절한다. 그러자 소녀가 소리친다.
“나도 그렇게 맛있는 케이크 먹고 싶다니까.”
이 말은 아이가 자신의 내면 욕구에 집중하게 되는 순간이다.
『곰 세 마리와 금발머리 소녀』에서 금발머리 소녀는 숲속 곰 세 마리가 사는 집에 몰래 들어가, 곰의 수프를 먹어버리고 곰의 침대에서 잠이 든다. 자신의 공간이 아닌 곳에서 무례하게 행동하지만, 이는 자신의 욕구에 충실한 모습이다. 처음에 아이는 부모의 다툼으로 인해 혼란스러운 가정 속에서 자신의 역할과 책임에 대해 고민했고, 이는 '잭'을 통해 상징적으로 표현되었다. 그러나 금발머리 소녀를 만나면서부터 아이는 자신의 욕구와 갈망에 더 집중하게 된다. 이 변화는 아이가 가정에서의 역할과 책임에 대한 고민에서 개인적인 욕구와 갈망으로 넘어가는 모습을 의미한다.
다음으로 아이는 부모를 잃고 잔뜩 웅크린 채 불을 쬐고 있는 남매를 만난다. 남매 뒤의 그림에는 과자집, 감옥, 나무꾼을 상징하는 도끼가 숨어 있다. 『헨젤과 그레텔』 이야기를 떠오르게 한다.
“너희들 엄마 아빠를 잃어버린 거니?"
아이는 남매를 보며 안타까워하지만, 계속해서 가던 길을 향해 걸어간다. 그때 뒤에서 여자아이의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온다. 이 울부짖음은 아이가 부모의 상황에 대한 무력함과 자신의 한계를 깨달았을 때 느끼는 절망감을 상징한다. 그러나 아이는 흔들리지 않는다. 마음속으로 ‘내가 무얼 할 수 있겠어?’라고 생각하며, 자신의 길로 나아간다. 이는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부모의 상황에 매몰되지 않으려는 의지의 표현이다.
아이는 부모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이해하며, 자신이 관여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이는 자아와 부모의 문제를 분리하는 과정이지만,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에 아이는 울부짖으며 고통스러워한다. 아이는 부모의 상황에 피할 수 없는 무력함과 절망감을 느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잃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고자 한다. 아이는 현실에 직면하고 자신의 한계를 깨달으면서 내적으로 성장하고 있다. 작가는 낯선 환경에서도 생존을 위해 노력했던 ‘헨젤과 그레텔’을 통해 주인공의 심리적 변화와 성장을 드러내고자 했던 것 같다.
날이 점점 더 추워지고 있는데, 갑자기 나뭇가지에 걸린 빨간 코트가 눈에 띈다. 아이는 추위를 이기지 못하고 코트를 입는다. 그런데, 코트를 입자마자 할머니가 들려주던 못된 늑대 이야기가 떠오른다.
“코트 뒤에 늑대가 숨어 있어! 도망가!”
딸아이가 다급하게 외쳤다. 정말로 빨간 코트 뒤에 있는 나무 사이에, 검은 늑대 얼굴이 숨어 있다. 아이가 늑대를 직접 보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이는 빨간 코트를 입자마자 순식간에 공포에 휩싸이고, 그 두려움이 아이를 더 깊은 숲속으로 달아나게 한다.
그림책에서 빨간색은 종종 공포나 불안을 의미하며, 빨간색을 입는 것은 두려운 감정이나 상황을 극복하려는 의지를 상징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아이가 빨간색 코트를 발견하고 입는 것은 자신의 상황에 대한 위험과 불안을 자각하는 것을 의미한다. 코트를 입는 순간 아이는 늑대 이야기를 떠올리며 두려움에 휩싸였지만, 계속해서 숲속으로 나아간다. 더 깊은 숲속으로 향하는 것은 아이가 자신의 두려움을 극복하고, 그 안에서 무엇인가를 찾고자 하는 욕망을 상징한다. 이는 자기 극복의 의지와 성장의 과정을 나타내는 것이다.
늑대를 피해 아이는 뛰고 또 뛰어서 점점 더 깊은 숲속으로 들어가고, 작가는 숲속 곳곳의 여러 상징물을 통해 주인공의 내면을 그려내고 있다.
“장화 신은 고양이가 있네? 우와! 호박도 있고 유리 구두도 있어!”
딸아이는 숨은 그림을 찾는 재미에 더 빠져 있다. 유리 구두와 호박 그림은 신데렐라 이야기를 연상케 하는데, 이는 새로운 시작을 향한 꿈과 희망을 의미한다. 물레와 열쇠는 잠자는 숲속의 공주를 연상케 하고, 이는 내면적 안식과 평화를 향한 욕구를 상징한다. 백마 타고 나타난 왕자는 구원과 새로운 시작을, 장화를 신은 고양이 그림은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려는 용기와 도전을 나타낸다. 라푼젤의 땋은 머리카락은 주인공이 내면의 갈등에서 벗어나자 하는 욕망을 드러낸다. 작가는 이러한 요소들을 통해 주인공의 내면적인 모습을 다양한 각도에서 드러내고 있다. 주인공은 방황과 공포 속에서 혼란스러운 감정을 겪지만, 동시에 이러한 감정을 극복하고 자신의 삶을 살아가려는 노력을 보이고 있다.
마침내 할머니 집이 나타나자, 아이의 마음에도 편안함이 찾아온다. 아이의 불안한 심리를 대변하는 듯 구불구불하게 휘어져 있던 나무들이 이제는 곧게 뻗어있다. 나무들의 무섭던 표정도 깨끗이 사라졌다. 아이가 문을 두드리는 순간, 예전과는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아이는 더럭 겁이 났지만, 용기를 내어 문을 연다. 할머니와 아빠를 만나는 것에 대한 갈망과 숲속 여정을 통한 성장이 용기 낼 수 있게 했다. 다행히 늑대가 아닌 할머니가 반겨주었고, 거기에는 그토록 기다렸던 아빠도 있었다. 숲속에서 겪은 고난은 뿌듯함과 안도로 바뀌었다.
집으로 돌아온 아빠와 소년을 엄마가 활짝 웃으며 맞이하는 장면으로 그림책이 끝난다. 이전에 비해 길어진 엄마의 머리카락은 시간이 많이 흘렀음을 짐작게 했다. 이때 엄마의 표정은 앞 장면에서 멍하니 초점 없는 무표정한 얼굴과 대조적이다. 눈에는 초점이 있고 미소 짓는 그녀의 얼굴에는 옅은 생기도 있다. 앞 장면에서 그녀는 옷 단추를 꽉 채우고 있었는데, 마지막 장에서는 스웨터 단추를 모두 풀고 있는 모습이다. 그녀의 마음이 열리고 가슴속의 무거운 짐을 벗어버린 듯한 해방된 기분이 느껴진다.
『숲속으로』, 『잭과 콩나무』, 『곰 세 마리와 금발머리 소녀』, 『헨젤과 그레텔』 이야기 속의 아이들은 모두 불완전한 부모의 돌봄 속에서도 어려움을 극복하며 성장한다. 지금도 부모의 다툼 속에서 자라거나, 경제적인 어려움 속에서 자라는 아이들이 있을 것이다. 결코 쉽지 않지만, 굴복해야만 하는 상황도 아니다. 자신을 믿고 희망을 잃지 않는다면, 불완전함이 우리를 더 강하고 성숙한 사람으로 이끌어 줄 것이다.
“사랑아, 학교에서 W한테 이 책 같이 읽자고 해봐.”
황금 같은 쉬는 시간에 책을 읽을 가능성은 낮고, 읽는다 해도 숨은 그림 찾기에 정신이 팔리겠지만, W에게 조금이라도 위로를 주고 싶은 마음에 딸아이에게 실낱같은 희망을 전했다. W가 어른들의 문제로 더 이상 상처받지 않기를, 그리고 주인공이 숲을 지나 아빠와 엄마를 다시 만난 것처럼, W에게도 그런 따뜻한 날이 찾아오기를 잠잠히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