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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음 Jun 22. 2024

'공존'과 '자기 존중' 사이의 균형(후편)

솔직한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것

어느 날, 곰씨가 아끼던 화분을 아기 토끼가 넘어뜨리자, 곰씨는 인내의 한계에 도달한 듯 얼굴을 손으로 감싸며 눈물을 흘렸다. 그 순간, 곰씨는 토끼들에게 무언가 말을 해야 할 때라고 느꼈다.

“여러분과의 시간은 더할 나위 없이 재미있답니다. 그런데 제가 차를 마실 때 아이들은 음악을 먹고, 아니아니 빵을, 그게 아니라 제 꽃이 ...... 아, 제가 무슨 말을 하는 걸까요?”

곰씨는 땀을 뻘뻘 흘리며 어떤 말을 하려고 애썼지만 횡설수설하며 결국 하고 싶은 말을 제대로 꺼내지 못했다.


“곰씨는 자기 마음을 표현하는 게 힘든가 봐.”

딸아이는 곰씨가 횡설수설하는 모습을 보며, 곰씨가 자신의 감정과 복잡한 상황을 언어로 명확히 전달하는 데 어려움을 느끼고 있다고 생각했다.

“곰씨는 토끼 가족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고 싶지 않은 마음에 횡설수설했을지도 몰라.”

곰씨가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기 어려웠던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먼저, 곰씨는 다른 사람들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성격일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말하면 상대방이 불편해할까 봐 걱정했을 것이다. 또는 갈등을 피하려는 성향이 강한 지도 모르겠다. 곰씨는 토끼 가족들과의 갈등이 더 심해질까 봐 두려워서, 자신의 마음을 솔직하게 말하지 않고 상황을 피하려고만 했을 가능성이 있다. 곰씨는 자신의 내면과 타인 간의 상호작용에서 어떤 방식으로 소통해야 할지 방향을 찾지 못하고 있다.


궁리 끝에 곰씨는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행동하기로 결심한다. 먼저 곰씨는 아무도 자리에 앉지 못하게 의자 위에 누워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시집을 탑처럼 쌓아두고 읽으면서 자리를 비우지 않으려는 듯하다. 처음처럼 의자는 모두 곰씨의 차지였다. 그런데 토끼들이 찾아와 도와주겠다고 했다.

“아저씨, 책이 정말 많네요. 팔 아프죠? 우리가 들어 줄게요.”

토끼네 가족들이 다시 의자에 함께 앉았다. 곰씨의 계획은 실패했다.     


다음으로 곰씨는 자신이 앉을 자리만 남겨두고 의자에 페인트칠을 하고, 홀로 앉아 음악을 즐겼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곰씨를 찾아온 아이들은 변신 놀이를 시작했다. 곰씨의 하얀 몸에 페인트로 줄무늬를 그리며 즐거워한다.     


두 번의 작전을 실패한 곰씨는 또 다른 방법을 찾기로 결심했다. 무거운 바위를 의자에 올려놓으려 했지만 바위를 들다가 발에 떨어뜨려 다친다. 그 후에는 자신만이 앉을 수 있는 의자를 만들었지만, 토끼 아이들이 의자에 함께 앉아서 의자가 망가지고 만다.     


곰씨는 자신의 공간을 지키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시도했지만, 이들 방법은 명확한 의사전달과는 거리가 있었다. 의자를 차지하거나 새로운 의자를 만들며 행동한 것은 주로 공간 확보에 집중한 결과였다. 이러한 행동은 토끼 가족들에게는 공간을 배려하지 않는 것처럼 비칠 수도 있었다. 이로 인해 곰씨와 토끼 가족 간에 갈등이 생길 수 있는 상황이었다.




“아아, 이렇게까지 하고 싶진 않았어.” 

곰씨는 마지막 방법으로 의자 위에 줄줄이 똥을 쌌다. 순간 ‘그 방법까지는 하지 말았어야지!’하고 마음속에서 외쳤다. 딸아이는 곰씨의 기발한 행동이 재미있는지 깔깔거렸지만, 나는 전혀 웃을 수 없었다. 곰씨가 너무 안타깝고 측은했다. 딸아이를 키우면서 곰씨처럼 억누르고 참다가, 어느 순간 나 자신과 딸아이에게 폭발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후회와 미안함으로 밤새 홀로 숨죽여 울던 순간들이 스쳐가며, 곰씨의 고통이 더욱 절실하게 다가왔다. 곰씨의 모습에서 나의 부족함과 연약함이 보여서 마음이 더 쓰라렸다. 


곰씨의 이 행동을 보면 평소 매우 단정하고 청결한 성격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그런 곰씨가 자신의 공간을 더럽히고, 스스로에게도 단정하지 못한 행동을 한 것이다. 이는 자신에게도 상처를 주는 행동이었다. 자신의 공간을 지키려는 데에만 집착한 나머지, 결국 그는 가장 소중한 자신을 소중히 여기지 못했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하늘에서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말도 안 돼! 날 보고 어쩌란 말이야. 내가 얼마나 노력했는데. 난 세상에 다시없는 친절한 곰이라고.”

곰씨는 자신의 마음을 몰라주는 하늘을 원망하며 서럽게 울음을 터뜨렸다.

‘세상에 다시없는 친절한 곰’이 곰씨의 자부심이었다. 그는 자신의 친절함을 통해 자부심과 내적 만족을 느꼈다. 곰씨는 자신의 노력과 친절함을 자랑스러워하며 특별함을 느꼈다. 그러나 이러한 자부심이 무너지자, 실망과 분노에 빠졌다. 결국 곰씨는 친절하다는 자신의 이미지를 지키기 위해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지 못하고, 자신의 경계를 명확히 설정하는 것에도 망설였다.

“계속 친절한 곰이고 싶다면, 토끼들에게 친절하게 말하면 되는 거 아니야?”

딸아이의 무심하면서도 경쾌한 한 마디가 무릎을 탁! 치게 했다.




며칠 뒤, 곰씨는 그동안 말하지 못했던 속마음을 천천히 토끼들에게 전한다. 양손을 턱 앞에 모으고 있고, 두 볼은 발그레하다.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전달하는 것이 수줍은 듯하다.

“진작 말했어야지. 토끼들도 이해했을 텐데.”

딸아이는 자신의 한계치까지 직면한 후에야, 곰씨가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는 모습을 보며 안도하면서도 안타까워했다. 곰씨는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상대와의 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두려워하며 미루다가, 갈등이 심화된 후에야 용기를 낸 것이다. 


토끼들이 빨간색이라 표시가 안 났을 뿐, 그들도 곰씨의 붉어진 볼 만큼 당황스럽고 놀랐을 것이다. 그동안 곰씨가 자신들과 함께하는 시간을 즐긴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자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또한, 자신들의 행동이 곰씨에게 불편함을 주었다는 사실에 미안한 마음도 들었을 것이다. 곰씨가 진작에 말해주지 않았던 것이 혼란스럽기도 했겠지만, 이제라도 곰씨의 진심을 알게 되어 곰씨를 더 잘 이해하고 배려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사실 토끼들이 매일 곰씨에게 오는 것이 즐겁기만 했을까? 아이 한 명만 데리고 외출하는 것도 힘든데, 그 많은 아이들을 데리고 곰씨를 찾아갔던 것을 보면, 단순히 자기들 편하려고 간 것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토끼들은 곰씨를 진심으로 좋아했던 것 같다. 다만 서로를 존중하며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에 서툴렀을 뿐이다. 만약 토끼들이 전소영 작가의 『적당한 거리』라는 그림책을 봤더라면, 조금은 달라졌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적당한 거리』는 서로 다른 식물에게 적절한 조치를 취해야 하듯, 사람들이 가진 차이를 인정하고 그에 맞는 배려를 해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가까운 거리를 좋아하는 사람, 적당한 거리를 원하는 사람, 다정함을 좋아하는 사람, 내버려두는 걸 좋아하는 사람 등, 각자의 다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좋은 관계의 시작이라는 메시지를 전한다. 토끼들이 곰씨를 진심으로 좋아했던 만큼, 곰씨가 어떤 걸 좋아하고 싫어하는지를 파악하고 적당한 거리를 두었더라면 서로 불편한 시간을 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큰 용기를 냈던 곰씨는 결국 피곤함에 지쳐 잠이 든다. 토끼들은 이전과 달리 곰씨의 잠을 방해하지 않고, 곰씨와 약간 떨어진 곳에서 조용히 놀이를 즐겼다. 곰씨의 솔직한 마음을 이해한 그들은 곰씨에게 필요한 공간과 시간을 존중하며, 곰씨와의 관계를 조화롭게 유지하려 노력한다.   

  

그림책 뒤표지 중앙에는 흰색 펜으로 그린 기다란 의자가 놓여 있다. 그 위에는 당근 케이크, 찻주전자와 찻잔, 읽다가 엎어 놓은 책이 놓여 있다. 의자 오른쪽 앞에는 하얀 꽃이 핀 화분이 있다. 곰씨는 다시 한번 자기만의 공간과 시간을 되찾은 듯하다. 

“즐겁기는 하지만, 어딘지...... 불편해. 누군가와 함께 즐겁기 위해서는 간혹 솔직해질 용기가 필요하다.”라는 중앙에 있는 글이 작가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 같다. 




삶은 갈등이 없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해결하고 극복해 나가는 과정이다. 특히 단체 문화와 배려를 중시하며 참고 양보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는 우리나라에서는, 갈등을 불편하게 여기기보다 용기를 내어 직시하고 함께 대화를 통해 해결책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 갈등은 우리가 함께 성장하고 발전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엇보다도 서로의 존재를 존중하고 이해하며, 솔직하게 감정을 표현하고 자신의 가치와 경계를 지키는 '자기 존중'이 삶에서 매우 중요하다.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것은 자신과 주변 사람들 간의 깊은 신뢰를 쌓는 첫걸음임을 기억해야 한다. 




"엄마, 이 책 못 읽어봤다고 했지? 내가 학교 도서관에서 빌려왔어."

얼마 전 그림책 모임에서 혼잣말로 “어! 이건 못 봤던 책이네?”라고 말한 적이 있다. 딸아이가 그 말을 기억하고, 학교 도서관에서 그 책을 빌려온 것이다. 토끼 가족처럼 늘 내 시공간을 탐내고, 때로는 내 하얀 꽃 화분을 넘어뜨리기도 하는 그녀지만, 섬세한 사랑과 따뜻한 배려로 한결같이 나를 사랑해 주는 소중한 존재다. 


‘엇! 정신 차려야지. 책 한 권에 황홀한 내 독서 시간을 내어줄 순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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