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가슴에 따라가고 싶은 별 하나쯤은 품고 산다. 권정생 작가. 그는 내게 그런 어른이다. 그의 글을 읽으면, 착해지고 싶다. 세상의 작은 것들에 마음을 쏟고, 우리가 무심코 지나치는 존재들에게 이야기를 불어넣어 준 사람. 그는 아이들을 작은 몸에 무한한 가능성을 담고 있는, 커다란 존재로 여겼다. 그의 작품 속 ‘강아지 똥’이 민들레를 피우기 위해, 거름이 되어준 것처럼.
『몽실언니』, 『강아지 똥』, 『점득이네』, 『한티재 하늘』 등 많은 책을 썼고, 상도 많이 받았다. 돈도 꽤 벌었을 테지만, 평생 일곱 평 남짓한 시골 흙집에서 살았다. “내 책은 주로 아이들이 사서 읽는 것이니, 인세를 그들에게 돌려주는 것이 마땅하다.”라는 그의 유언은 ‘권정생어린이문화재단’ 설립의 기초가 되었다. 재단은 지금도 분쟁지역과 북한 어린이들을 돕고 있다.
그가 그토록 사랑했던 아이들이 세상의 중심이 되는 날이 있다. 바로 어린이날. 어릴 적, 부산 사직구장에서는 매년 어린이날 행사가 열렸다. 헬리콥터가 웅장한 소리를 내며 등장하자,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하늘로 쏠렸다. 이내 수십 명의 군인들이 낙하산을 타고 차례로 뛰어내렸다. 귀가 찢어질 듯한 환호가 터져 나왔다. 거대한 무대 위에서는 화려한 특수효과와 함께 대규모 공연이 펼쳐졌다. 다른 세상에 와 있는 것 같았다.
“엄마, 우리 내년에 또 오자.”
“표 구하는 게 쉽지 않더라. 그래도 우리 딸내미가 오고 싶다는데, 어떻게든 해보지 뭐.”
자신만만한 엄마의 대답에도, 마음 한구석이 묘하게 씁쓸했다. 표가 있어야만 즐길 수 있는 어린이날이라니. 어린 마음에도 왠지 납득이 가지 않았다.
이곳에서도 5월 5일엔, 지역을 들썩이게 하는 큰 축제가 열린다. 양대 조선소는 지역의 모든 어린이를 초대해, 꿈 같은 시간을 선물한다. 이날만큼은 정규직과 비정규직, 조선소 직원과 비 직원 간의 벽이 허물어진다. 직업, 소속, 지위의 경계가 서로를 나누지 못하는 날. 그저 모두가 ‘어린이’이고, 누군가의 ‘엄마’, ‘아빠’일 뿐이다.
광장 한가운데선 흥겨운 음악이 울려 퍼지고, 거리는 아이들의 웃음소리로 넘실댄다. 작은 종소리처럼 경쾌하고 맑은소리. 손목에 묶인 풍선들이 바람과 함께 춤을 추며, 알록달록 하늘을 수놓는다. 고소한 팝콘 냄새와 달콤한 솜사탕 향기가 코끝에서 코끝을 타고 흐른다. 체험 부스 앞엔, 줄지어 선 아이들의 목소리가 쉴 새 없이 쏟아진다. 양 볼에 그려진 귀여운 캐릭터들이 웃음소리에 맞춰 꿈틀댄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두 손에 들린 선물 상자의 묵직함에, 아이들의 발걸음이 가볍다. 손에 들린 선물은 모두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특별한 장식도 없는 똑같은 상자들 앞에서, 묘한 해방감이 번져왔다. 표를 사야 하는 경제적 우열도, 표를 선점해야 하는 경쟁도 없는 날. 누구도 소외되지 않고, 사람들 사이에 드리워진 크고 작은 벽들이 사라진 날. 마음은 새장 문을 열고, 하늘을 날았다. 그래서였을까, 거제의 수많은 축제 중, 유독 이날을 기다렸던 건.
어쩌면, 내 안에 쌓인 수많은 벽이 이날을 특별하게 만든 이유일지도 모른다. 직업, 학벌, 성별, 나이, 외모, 소속이라는 벽들로 사람들을 나눴다. 학력에 따라 다르게 주어지는 기회, 성별이나 나이에 따라 기대되는 역할들. 끊임없는 경쟁과 비교, 평가 속에서 쌓아온 벽들.
때론 나 자신에게도 그런 벽들을 쌓았다.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벽을 세우고, 그 안에 나를 가뒀다. 무심코 쌓아 올렸던 벽이 높아질수록, 나는 더 작아졌고, 내가 될 수 없었다. 어쩌면, 그 벽을 넘고 싶은 마음으로 이날을 기다려왔는지도 모르겠다.
나로서 온전히 숨 쉴 수 있는 날. 이곳의 어린이날은 아이들만의 날이 아니었다. 오래도록 느끼고 싶다. 일 년에 한 번, 내 안의 벽을 허물 수 있는 이곳의 어린이날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