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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너를 읽고, 나를 돌아보다.

삶과 열정, 그리고 죽음 앞에서 생각한 나의 이야기

by 엔조

짧은 한 주 이야기


5월이 되자마자 매장 인수인계를 받기 시작했다.


타 브랜드에서 짧게는 몇 주 길게는 몇 달에 걸쳐서 받았던 교육을 여기서는 인수인계라는 핑계로 목록만 주고서 익히라고 한다.


원래도 별로였지만 참 별로인 상사다. 3월에 들어왔을 때부터 그 사람한테 배운 것보다는 다른 사람들이 하는 걸 보면서 눈치껏 모르는 건 물어보는 식으로 하나씩 배워왔다. 너무 알아서 잘한 게 문제인가. 이 사람은 내가 하나의 정보를 가지고 추론을 통해 나머지를 다 알아서 배울 거라 생각하나 보다. 혼자서 습득하려고 하니 시간이 배로 부족한 느낌이다. 사람은 싫어하되 배울 건 배워야 하는데 나도 아직 미성숙한 면이 있는 것 같다. 내면의 화를 다스리고 유연하게 사고하려고 노력하는 한 달이 되야겠다.


이번 주는 오랜만에 소설책을 읽었다. 최근에 비문학 쪽만 읽다 보니 책을 읽는 속도가 더뎌지는 것 같아 소설도 종종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어 책을 읽었다.


책의 제목은 스토너. '윌리엄 스토너'라는 대학교수의 일생을 그린 이야기다. 하지만 책을 읽는 내내 스토너의 이야기가 아닌, 나의 이야기를 자꾸 되돌아보게 됐다.



스토너의 시작과 나의 시작


1장에서는 스토너의 가정사가 그려진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스토너는 농부가 되기 위해 대학에 진학한다. 가난한 형편임에도 아들에게 무엇이라도 해주고 싶었던 부모님의 마음이 전해졌다. 하지만 그는 농과대학에서 영문학으로 진로를 바꾸고, 교육자로서 자신이 원하는 길을 찾아나가기 시작한다.


이 부분을 읽으며 나 역시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나는 세상에 큰 관심도 없던 채 전자과에 진학했다. 내가 수능을 보던 시절, 전자과는 취업에 유리한 전공으로 손꼽혔다. 사실 나는 글과 관련된 직업이나 동물과 관련된 일을 막연히 꿈꿨지만, 그건 단순한 상상일 뿐 큰 열정은 없었다. 결국 부모님의 권유로 전자과에 진학했다.


우리 집도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소득 분위가 높아 국가 장학금은 아주 적은 금액만 받을 수 있었고, 군대를 가기 전까지는 부모님의 지원으로 학교를 다녔다. 그땐 너무 당연하게 생각했던 그 지원이, 나이를 한 살 두 살 먹어가면서 부모님의 사랑이었다는 걸 늦게나마 깨닫게 됐다.


나는 스토너처럼 과를 변경하지는 않았다. 군 복무를 마치고 나서야 전자과가 나와는 맞지 않는다는 걸 느꼈지만, 이미 졸업을 한 학기 남겨둔 상태라 늦었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학교를 마무리했고 전자과를 졸업했다. 그 이후에도 전자과와 관련된 직업을 찾기보다는 내가 좋아하는 게 무엇일지 고민하게 됐다. 그러다 평소 관심을 두고 있던 커피 분야가 생각났다. 사실 20살 때 전자과와 식품공학과 사이에서 부모님과 작은 다툼이 있긴 했다. 나는 전자과보다는 음식 쪽에 더 관심이 있었지만, 부모님은 인생의 선배로서 전자과가 더 나은 길이라며 나를 전자과로 이끌었다. 아마도 자식이 힘든 길을 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졸업 후에도 전자과에는 도무지 흥미가 생기지 않았다. 그래서 바리스타 학원에 등록해 커피를 공부하기 시작했고, 결국 대형 프랜차이즈에 정직원으로 입사해 바리스타로 일하게 됐다.


선택과 결혼


2장에서는 석사, 박사 과정을 거쳐 강의 교수가 된 스토너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스토너에게도 친구들이 생기지만, 전쟁이 발발하면서 그들은 군에 입대한다. 스토너는 대학 강의를 선택하며 입대를 포기했는데, 그 선택은 주변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을 받게 만든다. 그러던 중 입대한 친구 중 한 명이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이 장면에서는 당시 사회 분위기와 그 안에서의 스토너의 복잡한 심정이 전해졌다.


3장에서는 스토너가 한 여자를 보고 첫눈에 반하고, 결혼까지 속전속결로 이어진다.


솔직히 나는 '첫눈에 반한다'는 감정이 잘 와닿지 않는다. 물론 나도 좋아하는 얼굴상은 있다. 하지만 얼굴만 보고 그 사람을 판단하거나 사랑에 빠진다는 건 쉽게 상상되지 않는다. 나에게 외형은 단지 인연의 시작일 뿐이다. 진짜 중요한 건 그다음. 그 사람의 성격이나 행동을 보면서 나와 잘 맞는지를 판단하게 된다.


소설 속에서 스토너는 이디스라는 여인에게 푹 빠진다. 처음 느껴보는 감정에 서툴지만, 꾸준히 자신의 마음을 표현했고 결국 청혼까지 한다. 이 빠른 전개에 “저럴 수도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후의 전개를 보면 이것이 스토너의 불행의 시작이었다는 걸 알게 된다.


결혼이 곧 불행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디스는 결혼 생활에 적합한 사람은 아니었다. 부유한 집안에서 자란 이디스는 가난한 집안에서 자란 스토너의 삶을 이해하지 못했고, 시대적 배경상 여성이 경제 활동을 하기도 어려웠기에 스토너 혼자 모든 것을 책임져야 했다.


결혼 후 한 달 만에 스토너는 이 결혼이 실패작임을 깨닫는다. 그는 결혼에서 침묵을 배웠고, 사랑을 고집하지 않았다. 그들은 사랑하지 않았지만 결혼은 유지됐다. 섹스리스 부부로서의 삶이 이어졌고, 스토너는 꾸준히 관계 개선을 시도했지만 이디스는 그를 밀어냈다.


이디스가 아이를 원하면서 잠시 관계가 좋아지는 듯했지만, 출산 후 다시 소원해졌다. 딸인 그레이스는 대부분 스토너의 몫이었다. 그레이스에게 그는 아버지이자, 어머니 같은 존재였고, 아이가 처음 태어난 1년 동안 그녀가 경험한 것은 오직 아버지의 손길, 목소리, 사랑뿐이었다.


고난 속의 성장


6~7장에서는 스토너의 멘토였던 슬론 교수와 그의 부모님이 차례로 세상을 떠난다. 부모님의 죽음이 스토너를 극적으로 바꾸진 않았지만, 평생 즐거움 없는 노동에 헌신했던 부모님을 떠나보내며 무언가 달라진 감정이 스며든다. 그해 주식시장 붕괴로 이디스의 아버지도 자살하고, 이디스는 고향으로 돌아간다.


그렇게 집에 남겨진 건 스토너와 그레이스뿐. 처음엔 어색했지만, 곧 이디스가 없는 집의 평온함을 만끽하게 된다. 그리고 깨닫는다. “지금이 몇 년 만에 가장 행복하다”는 사실을. 언젠가 이디스가 돌아올 걸 생각하면 후회가 밀려왔지만, 그 순간만큼은 진심으로 행복했다.


이디스가 떠난 사이 스토너와 그레이스 사이에는 깊은 유대가 생겼고, 스토너는 자신이 지금까지 열정 없이 강의를 해왔다는 걸 깨달았다. 그 깨달음 덕분에 그는 기계적으로 반복하던 수업을 벗어나, 더 열정적이고 퀄리티 높은 강의를 학생들에게 선보이기 시작했다. 10년 만에 찾아온 변화였다.


이 부분을 읽으며 나는 자신의 길을 찾은 사람의 모습이 얼마나 빛날 수 있는지 새삼 느꼈다. 외부 상황에 흔들리지 않고,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열정적으로 해나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한번 깨달았다.


갈등, 무기력, 그리고 깨달음


스토너가 변하자 이디스는 오히려 더 흉포하게 변한다. 결혼에서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한 그녀는 조각을 배우고 작은 극단에도 들어가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만두고 만다. 두 사람은 이제 거의 대화를 하지 않았다. 이디스는 사랑과 염려라는 가면을 쓰고 스토너와 그레이스의 관계를 방해했고, 스토너는 무기력하게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스토너의 모습은 너무 참고만 하다 보니 쉽게 휘둘리는 모습이었다. 그는 그녀의 변화를 자신의 책임으로 여기고 있었던 걸까. 독자로서 나는 스토너가 이디스와 이혼하고 그레이스를 데리고 나오는 것이 최선이라고 느꼈다. 하지만 그는 이디스를 향한 책임감을 놓지 못하고, 그저 참고 버틸 뿐이었다. 참는 것이 언제나 좋은 건 아닌데 말이다.


교육자로서의 스토너의 고난


9장에서는 스토너와 워커라는 학생 간의 대립이 그려진다. 스토너는 기본적인 지식조차 갖추지 않고 게으름을 피우며 배경을 이용하려는 워커를 인정할 수 없었다. 워커는 대학원 학장인 로맥스의 추천서를 가진 학생이었다.


이 사건은 스토너와 로맥스 간의 정치적 싸움으로 번진다. 힘이 없던 스토너는 결과적으로 1학년 교수들이 맡을 법한 시간표를 배정받으며 좌천당한다. 그의 열정은 점점 사그라들고, 매일같이 무기력에 빠진다.

스토너는 고민한다. 자신의 삶이 정말 살 가치가 있었는지, 이런 고민은 누구에게나 찾아오는지. 이 장면에서 나는 열정과 의지를 잃은 사람의 말로가 얼마나 비참한지를 간접적으로 느꼈다.


니체의 책에서도 느꼈지만, 우리는 자신이 즐거운 일을 해야 한다. 누구나 삶의 무의미함을 느낄 때가 있지만, 이를 이겨내야 한다. 그렇지 못한다면 삶은 비극이 될 수밖에 없다.


다시 찾은 열정과 죽음의 순간


이런 내 느낌과 생각과 다르게 스토너는 연애를 통해서 이 감정을 극복한다.


스토너는 마흔이 넘어 새로운 사랑을 만나면서 다시 열정적으로 살아가기 시작한다. 그러나 나이 차이 때문에 그 관계는 안 좋은 시선을 받았고, 결국 연인은 학교를 떠나며 이들의 사랑도 끝이 난다. 사랑은 그에게 큰 활력을 주었지만, 그 끝은 아픔을 남겼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긴다는 게 얼마나 삶에 있어 중요한지 그를 얼마나 활기차게 만들어주는지 그리고 그 관계가 끝났을 때, 그 후유증이 얼마나 심한지 너무 오래전에 느꼈던 감정이지만 다시금 상기하게 만들어주는 부분이었다.


연인이 떠난 뒤 그는 병에 걸리고 급속도로 쇠약해진다. 고열에 시달리고 청각 일부를 잃으며 급격히 늙어버린다. 그럼에도 다시 교육에 열정을 쏟고, 로맥스와의 정치적인 힘싸움에서 작은 승리를 통해 학생들에게 새로운 교육을 진행하였고 이후에 그 교육을 받은 학생들이 압도적으로 높은 성적과 기량을 보여주게 되어 그는 전설이 되었다. 하지만 종신교수로 남은 시간은 4년뿐이었지만, 갑작스레 암에 걸려 조기 퇴직하게 된다.


암에 걸리자 그는 시간감각을 잃어버렸고 한 가지 일에 계속 정신을 집중하기 어려워했다. 이후에 나오는 표현이나 작가가 그를 묘사하는 모습을 보면 죽음을 앞둔 사람들의 모습과 심리상태가 정말 이렇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깊은 표현들이 많이 나왔다. 스토너는 죽음 앞에서 이렇게 말한다. “넌 무엇을 기대했나?” 그의 인생을 되돌아보며 깨닫는다. 자신의 실패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그런 게 무슨 문제가 된다고 이제는 그런 생각이 하찮게 느껴졌다. 실패 따위는 이제 중요하지 않다고. 죽음 앞에서는 모든 것이 하찮아진다. 그의 인생과 비교하면 가치 없는 생각이었다.


이 마지막 부분을 읽으며 나는 다시 생각했다. 지금 내 앞에 놓인 문제들은 그저 눈앞에 있어서 커 보일 뿐, 문제들은 1년 뒤 5년 뒤에 생각해 보면 기억도 남지 않을 진짜 사소한 문제일 가능성이 높다. 이 책은 열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빛나고 아름다운가, 부모님의 사랑과 희생, 그리고 삶과 죽음의 본질을 다시금 느끼게 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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