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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담 Apr 02. 2024

초라한 죽음

꽃잎이 말라서 눈물 뚝뚝 떨어질 무렵

이상하게 친할머니가 떠오른다. 거동이 불편해서 누워있거나 앉아있기를 반복하다 어느 날부터 계속 누워만 있던 친할머니. 그녀의 주름지고 얄팍한 손모가지가 뇌리에 남아있다. 그날 영상의학과에 가서 사진 찍고 친할머니 나 아빠 셋이서 곰탕집을 갔다. 간이 슴슴하게 나와서 소금 팍팍 처먹던 그 맛. 공기 중에 꼬리꼬리한 냄새 가득한 그 공간. 진득진득 씹히는 연골 식감이 도저히 안 익숙해지던 어린 나이 스물두 살.


친할머니에게 살가운 손녀는 아니었다. 자주 전화를 하지도 자주 찾아뵙지도 못했다. 장례식장에서 눈물도 안 났고, 장례식 중 기말고사를 치러 대학교에도 갔다. 그러나 그녀를 떠나보내고 좀 지나서 평화로운 일상 중 우연찮게 눈물이 났다. 어슴푸레한 초저녁에 문득 더는 친할머니에게 전화를 걸 수 없다는 사실이 너무 슬퍼졌다. 그때 작게 눈시울이 붉어졌고 그것은 공기 중에 빠르게 말라갔지만 난 당황스러웠다. 내가 찾아가고 싶어도 더는 찾아갈 수 없단 사실이 나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거대한 소나무가 떠나간 자리에 짜리 몽땅한 밑동을 발견한 기분에었다.

 

생일선물로 받은 꽃이 말라가더니 꽃대에 진물이 생기고 꽃이 꺾여 죽었다. 물로 겨우겨우 연명하던 것이 이제 포기한 모양이디. 마녀는 살아있다, 드라마에서 시어머니 병수발을 들던 며느리가 폐암으로 생을 마감하는 장면이 나온다. 나는 아직 죽을 날을 받아놓지 않아서 잘 모르겠다. 꽃이 시든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자우림의 노래 <스물다섯, 스물 하나>에서도 나온다. 그때는 아직 꽃이 아름다운 걸 지금처럼 사무치게 알지 못했지. 이런 기분과 어울리는 시가 뭐가 있을까?


집에 있는 시집을 이것저것 뒤적이다 찾은 것이 <심보선 시인의 슬픔이 없는 십오 초>다. 이 책은 집 근처 세종문고에서 샀다. 그 당시 심보선 시인의 눈앞에 없는 사람 시집을 되게 인상 깊게 봐서 심보선이란 이름만 믿고 바로 결제했다. 그 당시 이 책이 바로 위에 진열된 것이 아니라 허리를 숙이면 보이는 곳 한쪽에 진열되어 있었다. 이 시집을 제목도 보지 않고 대충 집고 바로 펼쳤더니 내가 원하는 해답이 나왔다. 제목도 청춘이고 딱 대충 흐리게 읽어보니 청춘의 덧없음을 얘기하는 것 같았다. 친구가 생일선물로 해답을 주는 책을 선물 줬는데 딱 그 책을 펼쳐서 내가 원하는 답이 나오는 것 같은 기분을 경험했다. 신기한 일이다.


집에 있는 시집이 아닌 이상 타이핑을 하지 않고 어느 블로그나 인터넷에서 긁어왔는데, 이번에는 한번 타이핑을 해보려고 한다.




청춘


                심보선


  거울 속 제 얼굴에 위악의 침을 뱉고서 크게 웃었

을 때 자랑처럼 산발을 하고 그녀를 앞질러 뛰어갔을 때 분노에 북받쳐 아버지 멱살을 잡았다가 공포에 떨며 바로 놓았을 때 강 건너 모르는 사람들 뚫어지게 노려보며 숱한 결심들을 남발했을 때 한 귀로 듣고 한귀로 흘리는 것을 즐겨 제발 욕해달라고 친구에게 빌었을 때 가장 자신 있는 정신의 일부를 떼어내어 완벽한 몸을 빚으려 했을 때 매일 밤 치욕을 우유처럼 벌컥벌컥 들이켜고 잠들면 꿈의 키가 쑥쑥 자랐을 때 그림자가 여러 갈래로 갈라지는 가로등과 가로등

사이에서 그 그림자들 거느리고 일생을 보낼 수 있을 것 같았을 때 사랑한다는 것과 완전히 무너진다는 것이 같은 말이었을 때 솔직히 말하자면 아프지 않고 멀쩡한 생을 남몰래 흠모했을 때 그러니까 말하자면 너무너무 살고 싶어서 그냥 콱 죽어버리고 싶었을 때 그때 꽃피는 푸르른 봄이라는 일생에 단 한 번 뿐이라는 청춘이라는




출처 (심보선 시집 슬픔이 없는 십오 초 중에서...2008)



일단 시집의 여백 때문에 모양은 세로가 긴 직사각형이지만 한 호흡이라고 생각해서 가로로 된 직사각형으로 먼저 타이핑했다. 그러다가 모양이 너무 달라서 엔터로 시집 속 시와 같게 모양을 다듬었더니 아기자기하고 둥글둥글한 작은따옴표가 만들어진 기분이다. 아니면 머리는 거대하고 몸집은 아주 조그마한 비대칭 동물처럼 느껴진다. 세상에 그런 동물이 있나 생각해 보면 딱히 떠오르는 동물이 없다. 머리가 너무 무거운 짐승은 살기 되게 피곤할 것 같다. 근데 또 생각해 보면 몸집에 비해 생각이 너무 비대한 게 청춘이지 않나 싶기도 하다. 아무튼 뭐가 되었든 첫 시작부터 재미있었다. 그리고 타이핑하면서 과연 이게 내가 앞에 말한 죽음과 연관된 시가 맞나 하는 의문이 들었지만 막판에 죽음이란 단어가 등장하고 끝에 꽃피는 푸르른 봄이라는 청춘이 나와서 '아, 내가 잘 찾아왔구나.'라는 생각이 들어 뿌듯했다.


나는 이 시를 읽으면서 가장 떠오르는 구절이 바로 '매일 밤 치욕을 우유처럼 벌컥벌컥 들이켜고 잠들면 꿈의 키가 쑥쑥 자랐을 '이다. 밤마다 누구나 다 흑역사가 불현듯 떠올라 이불 킥한 경험은 있을 것이다. 그런 일상적인 일을 아주 시적으로 표현했다. 치욕을 우유처럼 벌컥벌컥 들이켜다니 얼마나 자라려고 저런 것일까. 내가 어린 시절에는 엄마가 보리차를 끓여놔서 늘 뜨뜻한 이상한 향 나는 보리차가 냉장고 한쪽을 차지했다. 그러나 나는 그 보리차를 매우 매우 싫어했기 때문에 차디찬 우유를 벌컥벌컥 삼켜서 더위를 쫓는 게 여름에 내가 해야 하는 일 중 하나였다. 그런 경험이 있어서일까 저 구절이 더 눈에 유독 들어왔다. 그리고 생각보다 저 초라한 죽음이란 것보다 현재 나의 청춘에 더 부합하는 일화들의 나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내가 심보선 시인의 한 작품을 좋아해서 충동구매로 슬픔이 없는 십오 초를 골랐다가 후회했다. 왜냐하면 되게 내가 해석을 못해서 뭔 말인지 크게 와닿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떤 시는 아름답게 혹은 멋지게 나에게 와닿는다면 어떤 시는 생판 초면인 남의 얼굴을 구석구석 보는 기분이랄까. 근데 다시 이렇게 청춘처럼 내게 의미가 와닿는 시를 보니까 역시 심보선 시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게 김지녀 시인에서도 보이며 김경주 시인의 시에서도 보인다. 어떤 시는 즐겁지만 어떤 시는 어렵다. 시를 처음 접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이랬을까, 하는 역지사지가 된다. 일종에 복불복 같다. 이 시가 내 눈에 들어오는지 안 들어오는지 말이다.



  거울 속 제 얼굴에 위악의 침을 뱉고서 크게 웃었

을 때


내가 이 시를 자르면서 느낀 점은 되게 짧고 간결하단 점이다. 얼마 전에 햄버거에 대한 명상을 연마다 주절주절 떠들 때는 정말 길다는 느낌을 크게 받았다. 그런데 청춘이란 시는 되게 다양한 유화 그림을 전시회로 보는 느낌이었다. 거울 속 제 얼굴에 위악의 침을 뱉고 크게 웃는 건 도대체 언제일까. 의미를 곱씹게 하지만 이 또한 멋지다. 일단 난 그렇게 해석된다. 내가 위악을 부리지만 허탈하게 웃으며 스스로에게 침을 뱉는다는 것이다. 네이버 사전에 검색하니까 위악이 위선의 반대말로 악한 체 하는 것을 뜻한다. 나는 악이라는 단어가 들어가서 악하다는 뜻이라고 착각했다. 악한 척 한단 것은 세 보이려고 애써 으스대는 것을 의미하지 않을까. 가령 강자에게 강하고 약자에게 약한 그런 것이 먼저 떠오른다. 근데 악한 척하는 것은 도대체 어디서 하는 행동일까. 도대체 왜 악한 척할 필요가 있을까.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서 회사에서 으스대는 것도 포함되려나. 악당처럼 보여서 보는 이득은 무엇일까. 착한 척해서 얻는 이득은 눈에 뻔히 보이는데 악한 척해서 얻는 이득은 머릿속에서 잘 그려지지 않는다.


드라마에 자주 등장하는 상황이지만, 애인이 더 나은 사람과 맺어지게 하기 위해 일부러 차갑고 냉정하게 대하는 것도 위악라고 네이버 지식인이 답했다. 이것을 읽고 헛웃음이 났다. 옛날 드라마에 흔하게 나오는 것으로 '널 위해서 헤어지는 거야.' 시한부 주인공들이 많이 하던 수법이다. 악한 척하는 것. 그럼 가령 상사가 후임에게 널 위해서 쓴소리를 도맡아 하는 것도 위악으로 보나. 시인이 말하는 위악의 행동은 무엇이었을까. 학창 시절에 악한 척하는 것은 뭐가 있을까. 선생님에게 일부러 말썽을 피워 주변 친구들을 편안하게 해주는 것? 나는 도저히 위악이 일상생활에서 어떻게 스며들 수 있는지 상상이 안 간다. 악한 체 하는 것은 아무래도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 어떤 방어막 정도로 해석된다. 특히 학창 시절 학생들 사이에는 엄연히 서열이 존재하며 그들 사이에서도 잘 나감과 못 나감은 눈에 확실하게 띈다. 약하면 동물의 왕국처럼 목덜미를 물게 만들 수 있으니까 스스로 악한 척하는 것은 납득이 간다. 라이언 킹에서 나온 숙부 같은 것이 아닐까.


아, 생각해 보면 사춘기 때 아빠한테 일부러 더 상처 주려고 말을 고심하던 때가 있다. 그것도 본능에 충실한 악한 척이며 아버지의 기세에 눌리지 않기 위한 나의 보호장치였을까. 집에서 내 자리를 확실히 차지하기 위해서 핏대 세우며 쌍욕도 서슴지 않았던 열혈 사춘기가 내게도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거울을 보며 위악을 비웃으며 침 뱉는 것도 이해가 간다. 되게 사춘기 시기에는 세상이 자기중심으로 돌아간다고 믿기 때문에 거울을 종종 보기 때문이다. 그게 아니더라도 자신의 외모를 점검하기 위해서도 손거울은 책가방에 들고 다니는 여학생 남학생 모두 많았다. 물론 나는 해당되지 않지만 말이다. 아무튼 위악이란 단어 하나로 이해되지 않으니까 구구절절 써봤다.  


출처 ( 지식인 '위악' https://kin.naver.com/qna/detail.naver?d1id=6&dirId=613&docId=133814662&enc=utf8&kinsrch_src=pc_nx_kin&qb=7JyE7JWF&rank=3&search_sort=0&section=kin.ext&spq=0)



자랑처럼 산발을 하고 그녀를 앞질러 뛰어갔을


아무래도 여기서 그녀는 화자가 짝사랑하는 소녀일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 소녀 앞을 자랑처럼 산발을 하고 뛰어갔다는 것은 지각하기 5분 전이 틀림없다. 이것은 뭔가 쓱쓱 싹싹 이미지가 그려진다. 짝사랑하는 소년에 대한 추억이 나도 있다. 그 애가 내 운동장에서 내 신발가방을 놓아주지 않아서 그 애의 손목을 쾅쾅 손목뼈로 내리찍어서 멍들게 한 적이 있다. 다음 날 쭈뼛쭈뼛 찾아가서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시퍼렇게 멍들었다는 얘기가 반에서 서라운드로 들렸기 때문에 사과를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무튼 짝사랑하는 소녀의 앞에서 부끄러운 줄 모르고 산발로 앞질러 뛰어갔으면 얼마나 수치스러울까 백 번 공감이 갔다.


내 머리카락도 심한 곱슬에 숱도 많아서 저 '자랑처럼 산발'이라는 표현이 아주 내게도 해당되는 말이다. 저 구절에서 '녀'만 빼면 딱 내 얘기다. 아, 생각해 보면 학창 시절 난 매일 머리를 쫀매고 다녔으니까 '곱슬거리는 잔머리를 휘날리며'가 더 적당하겠다.


분노에 북받쳐 아버지 멱살을 잡았다가 공포에 떨

며 바로 놓았을 때


여기 아버지 얘기가 나왔다. 아까 위에서 아버지 얘기를 꺼내면서 화자도 불안하고 우울한 가정생활 얘기를 꺼냈음을 떠올렸다. 분노에 북받칠 만큼의 어떤 사건이 있었다. 그건 뭘까. 화자에게 뭔가 불합리한 일이 생긴 것일까 아니면 엄마에게 불합리한 화를 냈던 것일까. 뭐가 되었든 화자는 아주 뿔이 나서 아버지 멱살을 잡았다가 '아이쿠, 내가 감히 아버지 멱살을 잡다니.' 하고 공포에 떨며 바로 놓았다고 한다. 아버지란 권위의 대상이며 한 집안의 가장이며 경제력이다. 아버지 말씀이 하늘처럼 여겨지던 시절이 있었을 텐데 화자가 자라서 어떤 울분을 참지 못하고 아버지의 멱살을 충동적으로 잡은 것이다. 그래도 학습된 권위 때문에 공포에 떨며 손을 놓고 뒷걸음치는 것이다.


나는 아버지에게 공포를 학습하지 못했다. 오히려 순한 둘째가 아버지의 공포와 권위를 학습하면서 설설 기며 먼저 잘못했다 빌어서 벌을 피했다. 나는 미련하게 자기 고집을 꺽지 못하고 맞서 싸우다고 매를 버는 타입이었다. 오히려 내가 아버지에게 지랄발광을 하면 놀러 온 사촌오빠가 나서서 '어디 감히 아빠한테 그러냐!'하고 혼났던 기억이 있었다. 이것도 지극히 공감 가는 이야기다. 어느 가정이든 불행 없는 집은 없을 테니까. 명절에 큰집에서 모이면 우리 엄마 아빠만 싸운 줄 아는데 사촌들 얘기 들어보면 남의 집도 별반 다를 게 없더라. 그런 데서 어린 날 위안을 받으며 컸던 기억이 있다.


이상하게 이건 구구절절 타이핑하는 게 긴데 오히려 지루하지 않다. 뭔가를 공감하고 뭔가를 떠올리려고 애쓰니까 추리소설을 보는 것처럼 아주 빅꿀잼이다. 아무래도 햄버거에 대한 명상은 깊은 이해와 공감을 못하고 단편적으로 감상했나 보다. 솔직히 레시피는 해석의 여지가 없으니까 당연한 말이다.



강 건너 모르는 사람들 뚫어지게 노려보며 숱한 결심들을 남발했을 때


'강 건너'라는 말을 보면 자연스레 '강 건너 불구경'이란 단어가 떠오른다. 남의 불행을 자신의 재미로 삼는 일반적이며 흔한 심리를 표현한 문구인데, 화자는 그들을 뚫어지게 노려보며 '숱한 결심'들을 남발했다고 서술하고 있다. 이것은 내가 해석하기로는 남의 불행을 보며 자신은 그러지 말아야지 하며 숱하게 결심을 했지만 '남발'했다고 말한 것으로 보아 지키지 못할 계획들을 마구 세우며 남들에게 떠들었던 모양이다. 사실 이건 강 건너 모르는 사람들을 뚫어지게 노려보지 않아도 젊은 날에 우리는 숱하게 결심한다. 부지런하게 살아야지, 저축해야지, 아주 뜨거운 사랑도 해봐야지, 올해에는 다이어트해야지 기타 등등이 있다.


문득 든 생각이 굳이 '강 건너 불구경 속 모르는 사람들'이 아니더라도 강 건너에 있다면 이미 타인이며 생판 남인데 그들을 화자는 뚫어지게 노려봤다는 것은 어떤 부러움과 시기질투의 대상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가령 강남으로 어떤 가고 싶은 로망의 곳으로 표현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한 귀로 듣고 한귀로 흘리는 것을 즐겨 제발 욕해달라고 친구에게 빌었을 때


'한 귀로 듣고 한귀로 흘린 것'으로 보아 화자는 남의 충고를 깊게 듣지 않고 자기 주관대로 행동에 옮기는 무대포 기질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화자는 친구에게 '제발 욕해달라'라고 한 것으로 보아 친구의 쓰디쓴 욕을 듣고 제정신 차리기 바란 상황이 아니었을까. 친구가 해준 충고를 무시한 행동에 대한 결괏값이 친구의 욕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이건 남자들의 심리에 더 가까운 것 같다. 물론 여자들끼리 충고하고 안 들어서 그 여자가 친구에게 제발 나 좀 욕해달라고 정신 차리게 이것도 가능한 이야기다. 하지만 이것은 여성보다는 남성에게 빈도 수가 더 많을 것으로 보인다. 가끔 티비나 인터넷 혹은 당장 우리 아빠만 봐도 상상이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좀 더 허례허식이 없는 남자들의 경우에는 욕도 친구끼리 서슴없이 하며 서로의 친분을 더 과시하는 것을 아빠를 통해 보았기 때문이다. 문득 나도 저런 적이 있었나 생각해 보면 친구의 충고를 한 귀로 듣고 한귀로 흘린 적은 분명 있지만 내가 직접 나서서 '친구야! 제발 나한테 욕 좀 해줘!'라고 빌지는 않는다. 어쩌면 내가 그토록 간절한 적이 없기 때문이려나. 뭐가 되었든 저런 상황도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 충분히 있을 법한 풍경이다.




가장 자신 있는 정신의 일부를 떼어내어 완벽한 몸을 빚으려 했을 때


이제 슬슬 이 청춘이란 시에서 공감하지 못할 구절을 찾는 게 더 빠를 듯하다. 일단 이것도 이해할 듯 이해가 안 간다. '가장 자신 있는 정신의 일부를 떼어내어 완벽한 몸을 빚으려 했을 때'가 과연 무엇일까. 일단 생각나는 것은 '완벽한 몸을 빚으려고' 욕심내는 상황이다. 그리고 자신에게서 '가장 자신 있는 정신의 일부'로 몸을 만들면 도대체 어떤 모양일까. 가장 자신 있는 성격이라면 자상함, 상냥함, 배려심, 이타심 뭐 이런 것인가? 가장 자신 있는 정신의 일부라면 혹은 고고함, 주체성, 독립성 이런 것일 수도 있으려나. 그런 성질로 완벽한 몸을 만든다는 것은 정신으로 육체를 완벽하게 길들인다는 뜻인가. 내가 원하는 이상향에 맞게 자신을 세팅하고 조절하는 것이다. 참 이 문장도 너무 멋진데 곱씹으면 씹을수록 난해하다.


만약 내가 가장 자신 있는 정신의 일부라면 참 난감하다. 도대체 뭐냐. 나의 정신 일부 중 가장 자신 있는 것은 조립이다. 이게 뭔 다 먹고 남은 콜라캔 자랑 같은 소리냐고 당황스러울 수도 있지만 내가 보는 나는 방을 어떤 방식으로 배치하면 좋을지 종종 고민에 빠지고는 한다. 낙서도 배치의 일환으로 어떤 색을 어떤 식으로 구성하면 더 효과적일지 생각하는 작업이다. 그런 조립 정신으로 완벽한 몸을 빚으면 그 몸은 완벽한 조립을 하고 있으려나. 이 또한 전혀 상상이 안 간다. 어떤 경지에 도달한 조립을 혼자 척척 해내는 것일까.


여기서 키포인트는 욕심이고 오만함 같다. '완벽한'이란 수식어를 달기에는 인간의 몸과 정신은 너무나도 불완전하며 한계가 분명히 있다. 그런 화자가 아무리 '가장 자신 있는 정신의 일부를 떼어내어'도 인간은 본디 완벽할 수 없으며 완벽에 가까우려고 노력하는 존재이다. 그래서 저 구절도 되게 자신의 오만했던 생각을 반성하는 구절로 읽혔다.


매일 밤 치욕을 우유처럼 벌컥벌컥 들이켜고 잠들면 꿈의 키가 쑥쑥 자랐을


이건 앞서 가장 좋아하는 문구라고 설명해 놨다. 여기서도 위에 구절과 비슷한 교훈이 남아있는 것 같다. 회사에 들어가면 치욕적인 순간들이 연달아 찾아온다. 특히 신입이고 뭘 잘 모르면 더더욱 그러하다. 그러한 상황을 우유 먹는 것처럼 치욕을 벌컥벌컥 들이켜면 화자의 꿈의 키가 쑥쑥 자랐다고 말하고 있다. 아픔과 상처가 사람에게 크나큰 자양분이 될 수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여기서 꿈의 키는 정말 잠자면 꾸는 꿈일 수도 있고, 화자가 꿈꾸는 세상의 키일 수도 있다. 뭐가 되었든 치욕을 매일 밤 마시며 화자는 한 뼘 더 성장하게 된다고 말하고 있다. 그때는 몰랐으나 지금은 알 수 있는 사실이고, 무척 공감되는 구절이다.


그러나 나는 그 우유를 소화시키지 못하고 매일 밤 설사를 하며 화장실에서 잠을 지새웠다. 그래서 저 시에 나오는 화자처럼 꿈의 키가 쑥쑥 자라기는커녕 진물 나고 시들시들해졌다. 나는 맞서 싸우지 못하고 도망갔다는 점에서 많이 결이 다른 것 같다.



그림자가 여러 갈래로 갈라지는 가로등과 가로등

사이에서 그 그림자들 거느리고 일생을 보낼 수 있을 것 같았을 때


이것도 좀 많이 어렵다만 '그 그림자들 거느리고'라는 표현에서 뭔가 가장이 되었고 아들 딸내미가 생겨서 누군가를 책임져야 하는 상황인가 불현듯 떠올랐다. '그림자가 여러 갈래로 갈라지는 가로등과 가로등 사이에서'는 어떤 여러 가지 선택의 기점에서 그는 어떤 선택을 내려야 할지 고민하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앞에 말을 저렇게 읽었더니 '그 그림자들 거느리고 일생을 보낼 수 있을 것 같았을 때'라는 것은 화자가 어느 하나 놓치지 않고 자신의 이상과 욕심을 있는 그대로 현실에서 실현시킨 것으로 보이는 상황이다. 만약 저 그림자들이 화자의 자식이라면 '그림자가 여러 갈래로 갈라지는 가로등과 가로등 사이에서'는 뭐라고 해석해야 할까. 가로등과 가로등이 만나서 결혼이라도 한 것일까.


근데 문득 가로등과 가로등이 만나는 상황이라면 그림자가 예사롭지 않을 것 같다. 겹겹이로 쌓인 꽃무늬 같지 않을까? 읽으면 읽을수록 애니메이션 나루토에 나오는 분신술이 더 적합하다고 느껴진다. 어쩌면 저 많은 그림자들은 화자의 인격일 수도 있다. 나는 가로등과 가로등 사이에서 땅굴을 파는 것을 선택했다. 어떠한 그림자도 선택하지 않고 오직 나만을 건졌다.   


사랑한다는 것과 완전히 무너진다는 것

이 같은 말이었을 때


'사랑한다는 것'과 '완전히 무너진다는 것'이 같은 말이란 것을 처음 읽을 때는 뭔가 이별을 상상했다. 열렬하게 사랑한 만큼 열렬하게 무너지는 것이 이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읽을 때는 '당신을 사랑한다.'는 것은 '나의 일상이 완전히 무너지는 것'이라고 읽히기도 했다. 어쩌면 완전히란 말까지는 과장일지는 모르지만 과장이 사실일지도 모른다. 사랑한다는 말에 완전히란 말이 생략되어 있다면 뒤에 말도 충분히 납득이 가기 때문이다. 근데 또 다시금 생각하니까 처음 생각이 더 그럴싸해 보인다. 사랑했기에 완전히 무너질 수도 있는 것이 사랑의 과정이며 동전의 앞뒷면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참 시가 함축적이고 은유적이라 곱씹는 맛이 있다. 어떤 명화 퍼즐을 맞추는 기분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아프지 않고 멀쩡한 생을 남몰래 흠모했을 때


이건 정말 정말 공감이 간다. 나는 '솔직히 말하자면 아프지 않고 멀쩡한 생을 남몰래 흠모했을 때'가 있었다. 나의 친구가 딱 그래 보였다. 어쩌면 그 친구도 어떤 아픈 일이나 가정사가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 친구랑 대화를 하고 얘기를 듣다 보면 큰 일 없이 무탈하고 무난하게 시간을 보낸듯한 기분이 들었다. 문득 그런 생각도 들었다. 그 친구가 멘탈이 강했던 것은 아닐까. 아무튼 난 진짜 그런 가정법을 몇 번 해봤다. 만약 내게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다면 과연 나는 어떤 성격을 가진 인간이었을까. 그건 한 우주가 생성 혹은 소멸되기 전의 일을 가정하는 것만큼 쓸모없지만 내게는 꽤 간절했다. 나도 만약이란 말에 기대어 지금의 불행이 조금은 가벼워지지 않았을까 상상해보고는 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너무너무 살고 싶어서 그냥 콱 죽어버리고 싶었을 때


이 또한 숱하게 겪은 감정이다. 내가 어떤 유튜브에서 봤는데 자살하는 사람들의 심리는 더 잘 살아보고 싶어서 절망한 사람들이 찾는 유일한 해방구라고 했다. 그런 것들 보았기에 '너무너무 살고 싶어서 그냥 콱 죽어버리고 싶었을 때'란 말이 절로 감정을 이해하게 되었다. 특히 나도 회사에서 잘 적응해보고 싶었으나 그게 되지 않고 그냥 콱 죽어버리고 싶었을 때가 있으니까 말이다. 24년 3월 4일 한 공무원이 민원전화에 집중 저격 당해서 3월 5일 날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그게 아니더라도 아이돌과 배우 중 자살로 생을 마감한 사람의 이야기를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다.


어떤 이들은 요즘 젊은 애들은 배가 불러서 쉽게 쉽게 좌절한다고 한다. 근데 그것도 맞는 말 같다. 나는 아빠 엄마처럼 가난에 찌들어서 간절해본 적이 없다. 아직도 의식주는 아빠에게 기대어 해결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근데 그런 상황을 떠나서 자살을 하고 싶은 마음은 '이 부정적이고 괴로운 마음에서 어서 빨리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 그것 하나밖에 없는 충동적인 선택이다. 오랜 시간 고민하고 내린 결정일지라도 나에게 해결책은 이것밖에 없다는 좁은 시야에 갇혀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것이다. 이것도 지나고 나서야 그때 내 시야가 편협했구나 하는 것이다. 그 안대에 시선을 사로잡힌 사람들은 멍청해서 모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싶다.


그때 꽃피는 푸르른 봄이라는 일생에 단 한 번 뿐이라는 청춘이라는


사실 청춘이라고 말하는 시기는 한 철이고 흔히들 '꽃피는 푸르른 봄' 혹은 '이팔청춘'이 있다. 살면서 단 한 번 오는 시기니까 더욱 소중하고 아름답다고들 말한다. 그러나 만약 내게 청춘을 지정할 수 있는 권한이 생긴다면 10대도 20대도 다 지우고 30대로 설정해놓고 싶다. 그나마 30대가 아직 무념무상이라서 그렇다. 근데 드라마에서 나오는 청춘 드라마 스물다섯스물 하나는 되게 예쁘고 아름답더라.


다시 곱씹으니까 한여름 땀을 죽죽 흘리며 소설책 <한순간 바람이 되어라> 총 3권을 몰아봤던 기억이 생생하다. 또 비가 억수로 쏟아지는 날 인라인을 타고 나가보고 싶어서 나갔다가 피부가 따끔따끔한 채로 목욕한 기억도 꽤 생생하다. 또 고등학교 가기 위해 고입고사를 치른 날 진이 다 빠져서 방 안에서 기절한 채로 잠든 것도 잊지 못할 기억 중 하나이다. 그날 나는 마트에서 파는 스파게티를 먹은 것 같다. 아니면 피자집에서 파는 오븐 스파게티 같은 것. 문득  지옥 같은 순간에도 하얀 꽃이 조그맣게 피기도 하는구나 하는 그런 생각이 든다.




오늘 이 시의 주제는 초라한 죽음으로 '꽃' '할머니의 죽음' '연로한 생'을 좀 더 생각했는데 아주 내 개인적이고 사적인 '청춘'으로 도배되었다. 어쩌면 여기 있는 모든 일들이 내 일처럼 공감되었기 때문에 우리 친할머니도 저런 일들을 감내해 가며 다섯 형제를 키웠을지도 모를 일이다. 내게는 매일 성난 폭군 같은 친할머니였지만 아빠에게는 애틋하고 가여운 친할머니였다. 아마도 같은 기억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더 감정을 이입하기 좋지 않았나 싶다.


지금도 기억나는 게 친할머니에게 대학생 1-2학년 때쯤 불쑥 찾아뵙고 던진 질문이 있었다.


"할머니는 꿈 있었나요?"

"떽!! 그때는 먹고살기 바빴는데 무슨 꿈! 시골에서 벼농사짓고 밭 매고 자식 키우고...(구구절절 말하며 혼냄)"


지금은 철없는 질문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당시에는 꽤나 궁금했다. 나는 이러한데 친할머니는 어땠을까 이런 것 말이다. 나도 할머니처럼 여든까지 살 수 있을까,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다. 가만 보니까 심보선 시인의 청춘에서 마지막 구절처럼 아름다운 꽃으로 만연한 봄으로만 표현한 것이 아니라 못나고 모자라지만 그래도 그 자체로 한 번뿐인 순간이라 아름답다고 하고 있다. 봄이 꽃이 펴서 아름다운 게 아니라 꽃봉오리가 틔우기까지의 처절한 싸움이 있어서 빛난다고 얘기하는 것 같다.


진짜 누가 꽃 다운 청춘이라고 말했을까. 난 아직 지지리도 그 말에 공감되지 않는다. 한 쉰은 되어야 그제야 '아! 그 말이 그거였구나!' 하게 되려나 모르겠다.


아빠가 차 타고 가면서 늘 하는 얘기가 젊어서 적당히 벌어서 여행도 가고 놀으라는 얘기다. 자신은 젊어서 돈만 벌고 여행을 가보지 못한 것이랑 못 논 것이 천추의 한이라고 했다. 만약 내가 나중에 자식이 생겨서 조언한다면 좋아하는 것보다 기술을 배워 일찍 일찍 익히라는 것이다. 아, 이 말 아빠가 구구절절했지만 그때는 몰랐고 지금은 뼈에 바람 부는 것처럼 아파하며 공감하는 이야기다. 기술을 배웠어야 했는데 말이다.


젊어서 아프다. 아프니까 청춘인 것은 아니지만 젊어서 뼈를 깎는 고통이 있다. 덜 아프게 미리미리 사회물 좀 먹여주지 그랬나 싶기도 하다. 아늑한 학교 통에만 있다 나온 사회는 시베리아다. 제목은 초라한 죽음인데 나는 열불 나는 청춘이다.


아무래도 시를 잘못 고른 것 같다. 심보선의 청춘은 꽃이 피는 성장통을 이야기하는데 나는 꽃이 시들어버린 초라한 죽음을 제목으로 골랐으니까 말이다. 이거 정말 평행선이로구나. 그 또한 삶의 한 과정이니 하고 생각해야겠다. 그리고 이토록 치열했으니까 저 죽음은 초라하면 안 되고 성스러워야 하겠단 생각으로 마무리 지어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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