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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담 May 03. 2024

달리는 심야 영화

길상호 시인의 우리의 죄는 야옹

달리는 심야 영화



                            길상호



이제부터 무성 영화의 시간,

문이 닫히면 극장은 시동을 건다

서울에서 대전까지 한 시간 사십 분

화면 밖으로 이탈하지 않으려면

좌석마다 안전벨트를 매야만 한다

몇 겹의 어둠이 깔린 스크린은

한쪽으로 고개를 돌려야 볼 수 있다

그러나 영화 속 이야기가 궁금한 건

마음이 무거운 사람 뿐, 대부분은

객석 조명이 꺼지기도 전에 눈을 감는다

배경은 쉬지 않고 바뀌어도

인물은 늘 그자리, 낯설고 익숙한 얼굴

몇몇은 세상에 없는 사람처럼 앉아서

흐릿한 제 눈동자를 뒤적이며

빛방울이 흘려놓은 자막을 읽는다

때로 뿌옇게 습기가 찬 화면을 닦다보면

지문 속에 먹구름이 오버랩된다

영사기에서 풀린 길이 덜컹거려도

무심해진 심장은 쉽게 놀라지 않는 영화관

스크린 너머로 비상구 표지등처럼

가느다란 초승달이 혼자 빛난다





<출처 길상호 시인의 우리의 죄는 야옹, 문학동네 2016>


길상호 시인의 시집을 고른 것은 순전히 제목 때문이었다. 우리의 죄는 야옹이라니 도대체 이것은 무슨 의미를 뜻하며,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을까 너무나 궁금했기 때문이다. 우리의 죄는 야옹이라는 소리를 냈기 때문일까, 아니면 인간이면서 고양이 행세를 하며 야옹 운 것이 죄일까. 아니면 고양이의 별 이유 없는 야옹 울음소리처럼 무거운 죄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별 볼일 없는 가볍기 그지없는 것을 말하는 것일까. 나는 마지막 말이 제일 그럴싸하게 들린다. 우리의 죄는 야옹. 어쩐지 고대부터 전해 내려 오는 암호 같기도 한 것이 굉장히 마음에 든다. 나도 오늘부터 야옹하고 고양이 울음을 흉내 내며 저지르지 않은 죄를 짓는 기분을 느껴보고 싶은 그런 기분이 든다. 


그다음으로 시를 고르게 된 것도 모두 제목에 심야 영화라는 단어가 껴있었기 때문이다. 그럼과 동시에 시가 진행되는 전개도 생각보다 마음에 들어서 골랐다. 지금 한창 전주에서는 영화제를 진행 중이다. 때가 언제인지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대략 2016-2017년에 혼자 심야 영화를 본 적이 있었다. 시간은 밤 12시에 시작해서 새벽 3시쯤 끝나는 3편의 옴니버스 형식으로 공포 스릴러 형태의 영화를 보러 간 적이 있다. 그때 나는 우연히도 나에게 그림 모임을 진행하던 홍익대를 중퇴한 미술 선생님을 마주하게 되었다. 뒤에서 누가 말소리를 내길래 깜짝 놀랐었는데 그것은 곧 짙은 반가움으로 변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때 나는 새벽에 여러 사람들과 영화를 보는 동시에 혼자 여유롭게 공포 스릴러 영화를 관람해서 굉장히 기분이 좋았다. 평상시에 자주 할 수 없는 경험이었고, 그 야심한 밤에 어느 깜깜한 영화관에 갇혀있다는 점도 꽤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심야 영화 앞에 '달리는'이라는 수식어가 붙으니까 나는 대학생 때 배웠던 김애란 소설가의 달려라 애비도 떠올랐다. 김애란 소설가는 밝고 따뜻한 어조로 무거운 주제를 잘 다루는 아주 멋진 소설가였다. 그녀의 표현은 어딘가 남달랐으며 동시에 사람의 마음을 포근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내가 길상호 시인을 1973년 생으로 2001년에 신춘문예 등장한 남성 시인이다. 생가보다 안 늙었다 생각했는데, 다시 생각해 보니까 우리 엄마 아빠 나이 또래이시다. 내가 길상호 시인의 시를 두루두루 대강 읽어봤을 때 느낀 점은 내 취향은 아니라는 점이다. 마치 나는 좀 묵직한 카페 라떼나 혹은 경쾌하고 즐거운 맛을 내는 라임티를 좋아하는데 이 시는 그리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은 어느 경계선에 있다. 마치 공차의 밀크티를 처음 마셨을 때 느낌 같다. 낯설면서도 뭔가 불편한데 계속 음미하면 길들여지고 익숙해지는 그런 맛 같았다. 시 자체가 어려워서 낯설다는 기분보다는 시 자체는 평이하게 진행하면서 사이사이에 변주곡을 넣는 형태를 띠고 있는 듯하다. 


그 외에 내가 길상호 시인의 시집을 주르륵 훑어보면서 또 발견한 것은 띄어쓰기가 없는 통으로 된 시들이 군데군데 많이 보인다는 점이다. 나는 그것을 보면서 마치 잘 반죽이 된 예쁜 수제비 반죽이 떠올랐다. 지금까지 내가 읽고 좋아했던 시들은 이미지가 강렬하거나, 표현이 뭔가 색다르거나, 아니면 무거운 주제를 잘 다뤘거나 인데 이 길상호 시인의 시를 보니까 엄마가 읽어도 뭔가 잘 와닿는 시가 되지 않을까 싶다. 너무 단조롭지 않으면서 동시에 너무 어렵지 않은 그런 시 말이다.


대학생 때 내가 시를 써서 엄마에게 보여주면 늘 한결같은 반응이었다. '뭔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느낌이 좋다' 혹은 생뚱맞은 포인트를 짚어내며 이야기를 꺼내 나를 당혹스럽게 했다. 그런 엄마에게 이 시는 조금은 친숙하고 조금은 편안한 시가 되지 않을까 싶다. 



이제부터 무성 영화의 시간,

문이 닫히면 극장은 시동을 건다

서울에서 대전까지 한 시간 사십 분

화면 밖으로 이탈하지 않으려면

좌석마다 안전벨트를 매야만 한다


내가 이 시를 처음 타이핑하면서 느낀 점은 의외로 쉽게 읽히면서 한편으로 정황이 잘 읽히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처음 제공된 정보는 현재 화자가 보고 있는 영화가 <무성 영화>라는 점이다. 무성 영화는 어딜 가야 볼 수 있을까. 확실히 일반 상영관에서는 볼 수 없는 영화이며, 특색 있는 영화관에서 기획전을 해야 볼 수 있는 영화 같다. 나는 전주 독립영화관에서 범죄 영화 특집으로 <캐치 미 이프 유 캔>을 본 적이 있다. 솔직히 지금 당장 줄거리를 말하라면 1도 기억이 안 나지만 되게 흥미진진하게 재미있게 본 기억이 난다. 아무튼 화자는 현재 무성 영화를 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다음 줄을 읽으니까 오독이었다.


무성 영화의 시간이란 것은 진짜 무성 영화가 아니라 영화관이 폐관하고 난 뒤의 시간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니까 이것은 노래 <연극이 끝나고 난 후 - 샤프>를 떠올려야 맞는 소리다. 근데 또 아닌 것 같다. 서울에서 대전까지 한 시간 사십 분은 비유적 표현이며 영화의 러닝타임이 1시간 40분인 것을 의미한다. 결국은 화자가 무성 영화를 보고 있는 게 맞고, 영화가 시작되니까 극장의 문이 닫히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화면 밖으로 이탈하지 않으려면 좌석마다 안전벨트를 매야만 한다고 하고 있다. 내가 되게 감탄한 부분은 앞에 서울에서 대전까지의 이동거리를 이야기하고 마지막에는 안전벨트로 마무리 지으며 차량의 내부 같은 묘사를 적절하게 잘 이어나가고 있다는 점이었다. 


확실히 무성 영화라면 소리 없이 인물이 표정 혹은 동작으로 극을 진행시키니까 빵빵하고 다이내믹한 사운드에 익숙해진 일반 관객이라면 화면 밖으로 많이들 이탈할 것 같다. 여기서 화면 밖으로 이탈한다는 것은 고개가 꺾여서 잠에 푹 빠진 관객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그런 만큼 무성 영화라면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해야 할 것 같다. 옆에 아이스 아메리카노라도 있어야 중간중간 졸음이 올 때마다 차가운 기운으로 몰아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내가 최근 노량 영화를 보고 서울 깍두기에서 설렁탕을 먹고 나서 서울의 봄이란 영화를 봤다. 그때 아주 미친 듯이 잠에 빠져들었다. 서울의 봄이 영상미도 있었고 배우들 연기도 뛰어났지만 의외로 초록색 군복 색의 총연이라 졸음이 쉽게 오더라. 시의 한 구절을 보고 다양한 경험을 떠올리는 일은 언제나 재미있는 것 같다. 



몇 겹의 어둠이 깔린 스크린은

한쪽으로 고개를 돌려야 볼 수 있다

그러나 영화 속 이야기가 궁금한 건

마음이 무거운 사람 뿐, 대부분은

객석 조명이 꺼지기도 전에 눈을 감는다


몇 겹으로 어둠이 깔린 스크린은 보통 무성 영화가 1895년 프랑스 파리에서 뤼미에르 형제에 의해 시네마토그래프가 공개된 것을 영화의 시발점이라 한다면, 본격적으로 유성화(化)되는 1927년까지의 영화는 무성으로 만들어졌다고 네이버 지식백과가 말해줬다. 그런 것처럼 흑백 영화일 테니까 어둠이 몇 겹으로 깔렸다는 표현이 쉽게 이해가 갔다. 그리고 몇 겹이라는 말을 들으니까 몽블랑 빵이 몇 겹의 페스츄리로 이루어진 것도 떠오른다. 그리고 한쪽으로 고개를 돌려야 볼 수 있다는 것은 특별한 방법 혹은 특별한 집중력이 아니라면 그 영화의 내용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음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 아닐까 싶다. 


(출처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094846&cid=40942&categoryId=33091)


이렇게 시 속의 화작 계속 무성 영화를 볼 때의 주의사항을 안내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그런 와중에도 영화에 관심이 없는 사람은 존재하고, 영화의 이야기가 궁금한 것은 '마음이 무거운 사람뿐'이라고 시 속의 화자는 이야기하고 있다. 대부분 객석 조명이 꺼지기도 전에 눈을 감는데 그에 비해 '마음이 무거운 사람들'은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이야기에 대해 호기심과 궁금증을 갖고 있다고 한다.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 영화 객석 조명이 꺼지기도 전에 눈을 감을까. 영화를 보기 전부터 오랜 광고로 지친 사람들일까. 아니면 그냥 영화 보기 전부터 피곤하고 무성 영화 자체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일까. 아무튼 그런 와중에 '마음이 무거운 사람들'만 집중을 한다는 소리인데, 도대체 마음이 무거운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마음이 무거운 사람들이라. 뭔가 고민이 있는 진중한 사람들일까. 마음이 무거우려면 생각도 많아야 하고 혹은 어떤 사건 사고의 경험도 더 많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의 이야기의 무게를 잘 느끼고 있기 때문에, 남의 이야기도 허투루 듣지 않는다. 그 사람이 하는 얘기가 무거운 얘기든 가벼운 얘기든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를 꺼내기까지의 무게감을 잘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 또한 마음이 무거운 사람일까 생각해 봤는데 무거운 동시에 잘 까먹는 사람이라서 저기에 해당 사항이 없는 것 같다. 



배경은 쉬지 않고 바뀌어도

인물은 늘 그자리, 낯설고 익숙한 얼굴

몇몇은 세상에 없는 사람처럼 앉아서

흐릿한 제 눈동자를 뒤적이며

빛방울이 흘려놓은 자막을 읽는다

때로 뿌옇게 습기가 찬 화면을 닦다보면

지문 속에 먹구름이 오버랩된다


난 여기서 배경은 쉬지 않고 바뀐다는 게 무성 영화의 특징을 이야기하는 것일 수도 있는데 어쩐지 우리의 인생을 빗대어 말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우리는 배경 혹은 장소가 계속 바뀌어도 인물은 늘 그 자리이며 동시에 낯설고 익숙한 얼굴들을 마주하게 된다. 나는 여기서 인물은 늘 그자리라는 것은 나의 변하지 않는 성격 같고, 낯설고 익숙한 얼굴들은 나를 스쳐가는 무수한 사람들의 특성을 말하는 것 같다. 이렇게 마음이 무거운 화자는 열심히 무성 영화의 내용을 잘 이해하려고 머리를 굴리는 중이다.


그런 와중에도 몇몇은 세상에 없는 사람처럼 앉아서, 흐릿한 제 눈동자를 뒤적이며, 빗방울이 흘려놓은 자막을 읽는다고 서술하고 있다. 나는 이 표현이 아주 멋지다고 생각한다. '세상에 없는 사람들처럼' '흐릿한 눈동자' '빗방울이 흘려놓은 자막'이라는 표현은 흐릿하고 먹구름이 잔뜩 낀 어느 여름날의 풍경을 절로 떠올린다. 내가 영화관에서 졸아본 경험이 있기 때문에 잘 안다. 영화관에서 졸 때는 필연적으로 체온이 오르거나 아니면 영화관 자체가 따뜻하게 느껴진다. 마치 한 여름의 후덥지근한 공기처럼 잠이 들기 전에 전조증상이 동반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뒤에 이어지는 표현도 앞의 표현처럼 아주 멋지다. 때로 뿌옇게 습기가 찬 화면을 닦다 보면, 지문 속에 먹구름이 오버랩된다,라는 표현은 안경에 습기가 차서 닦는데 안경닦이가 없는지 손으로 대충 문대는 어느 관객의 모습을 표현하는 것 같다. 지금 시인은 영화 이야기를 해서 영화 기법 중 하나인 오버랩이란 단어를 쓴 점도 아주 좋았다. 오버랩은 하나의 화면이 끝나기 전에 다음 화면이 겹치면서 먼저 화면이 차차 사라지게 하는 기법으로, 지문 위에 무성 영화의 먹구름이 얹힌 것을 표현하고 있다. 여기서 보통 습기가 찬 것은 안경인데 반대로 화면에 습기가 찼고 닦는다는 표현 역시 인상적이었다. 


나는 시인이 얼마나 표현에 고심하고, 또 단어를 선택하는데 동일한 분위기를 내려고 애쓰는지 이런 표현들에서 잘 느껴진다. 그리고 동시에 이런 표현들을 마주할 때면 이루 말할 수 없는 감동이 밀려온다. 이래서 이분들이 시를 쓰고, 시집을 냈구나 하는 인정도 같이 든다.

 


영사기에서 풀린 길이 덜컹거려도

무심해진 심장은 쉽게 놀라지 않는 영화관

스크린 너머로 비상구 표지등처럼

가느다란 초승달이 혼자 빛난다


영사기(映寫機, Movie projector)는 영화 필름 따위를 확대하여 프로젝션 스크린에 비추는 기계를 말한다. 무성 영화가 들어간 제목의 시답게 영사기가 등장했다. 여기서 영사기에서 풀린 길이 덜컹거려도는 영사기 자체가 가끔 필름이 꼬여 영화가 매끄럽게 상영되지 않은 것을 시사한다. 확실히 이런 점은 시인의 나이가 꽤 들어찼음도 동시에 알게 해주는 대목 같다. 그렇게 영화가 잠깐 멈칫해도 영화관의 무심해진 심장은 쉽게 놀라지 않는다고 한다. 영화관이란 말은 영화를 상영해 주는 사람 또는 영화를 보는 관객 모두 아울러 지칭하는 말처럼 들린다. 영화관 내에 있는 사람들은 작은 문제에 연연하지 않는다. 그것보다는 더 큰 어떤 의미와 결론에 더 관심이 있어 보인다. 


마지막으로 스크린 너머로 비상구 표지등처럼 가느다란 초승달이 혼자 빛난다고 하고 있다. 비상구 표지등은 일상에서 흔히 접한다. 초록색에 밖으로 나가는 사람이 그려져 있지만 이것을 초승달이라고 표현한 것은 생각지 못한 생각의 전환이다. 그리고 여기서 관심이 가는 포인트는 비상구 표지등이 초승달처럼 '혼자' 빛난다는 점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시 속의 화자는 혼자 무성 영화를 보러 간 듯하다. 나도 처음부터 혼자 영화를 보지 않았다. 대학교 다닐 무렵에 혼자 궁금해진 영화가 있었는데 누군가에게 같이 보러 가자고 하기 귀찮아서 혼자 보던 게 첫 시작이었다. 처음 영화를 혼자 볼 때는 남의 시선도 신경 쓰이고, 혼자 보는 내가 스스로 낯설고 어색하기도 하다. 하지만 점점 그 횟수가 늘어나고 혼자 영화 보는 내가 익숙해진다. 그럴 때 나는 자유롭고 저 시에 나온 말처럼 혼자 빛나는 것 같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달리는 심야 영화'라는 말에 '달리는'이라는 수식어는 심야 영화가 한밤중에 상영되는 것을 달린다고 표현하는 것 같다. 동시에 시 속의 화자의 생각도 심야 영화와 페이스를 맞춰 열심히 달리고 있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이런 시가 탄생한 것이고 말이다. 



현재 전주에서는 영화제가 진행 중이다. 나는 친구와 같이 오후 6시에 영화를 보기로 약속했다. 그리고 나는 혼자 대형 카페에 와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시 감상문을 적고 있다. 12시에는 한적하던 카페가 오후 2시가 되니까 점점 사람으로 빼곡하게 들어차는 모습이 신기하다. 이제 내가 떠날 시간이 다가옴을 느낀다. 바깥에서 햇빛을 쬐며 한가롭게 길상호 시인의 우리의 죄는 야옹을 마저 읽어볼 생각이다. 바깥이니까 소리도 드문드문 내면서 혼자 여유롭게 말이다. 


생각해 보니까 내가 연이어 <혼자>라는 키워드를 들고 온 것 같다. 나는 혼자 있을 때 외롭기보다 더 편안해지는 사람이다. 물론 혼자라서 심심한 것도 외로움이라면 외로움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오늘처럼 이렇게 거리에 사람들로 넘쳐나고, 영화제에서 준비한 이벤트가 득실거리면 혼자여도 전혀 지루할 틈이 없다. 이래서 내가 축제를 좋아하고 찾아다녔나 싶다.  


그리고 길상호 시인의 달리는 심야 영화를 내가 좋아한 이유를 방금 깨달았다. 나는 저 시에 나온 화자처럼 진지하게 자신의 생각을 고찰하는 사람을 좋아한다. 그리고 시 속의 화자에서 나의 모습을 발견해서 반가웠다. 영화는 어떤 모습이든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어서 좋다. 오늘 보게 될 '낭인'이란 영화는 어떤 영상, 어떤 음악, 어떤 관객, 어떤 배우, 어떤 대사, 어떤 스토리가 있을지 너무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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