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라온 Dec 29. 2023

이름만 부른다고 수평 문화는 개뿔

호칭보다 존중하는 마음이 있어야


몇 년 전부터 기업들이 직급의 폐지 내지는 간소화를 시작했고, 호칭 개편을 앞다투어 발표했다. 이렇게 시행하지 않으면 업계 표준이 아니라 큰 일 날 것처럼, 뒤쳐지는 것처럼 열을 올렸다. 이 런 변화는 유행처럼 번져서 현재도 진행형이다. 중대 발표에 세트로 꼭 따라 붙는 말은 '수평 문화'이다. 통일된 호칭을 공표하고 적용하면 수평적인 문화는 덤으로 따라오는 양, 대대적인 홍보를 한다. '호칭 개편, 수평적 조직 문화 전파', '직위 호칭 폐지, 수평적 조직 문화 구축' 등 기사 제목부터 이미 큰 성과를 이룬 것처럼 떠들어 댄다. 손바닥만한 제품 하나 시키면 에어캡으로 큰 상자를 가득 채워 서 배송하는 쿠팡처럼 과대 포장이 심하다.


개편 내용은 사원, 대리, 과장, 차장, 부장 등의 직급을 없애고, 기존의 김대리, 박과장, 강부장에서 JH, 박이나 프로, 김주환님처럼 통일된 호칭을 쓰자는 것이다. 직급에 상관없이 동일하게 부름으로써 수평적인 관계가 될 것이고, 업무 효율까지 잡겠다는 야무진 청사진이었다. 이건 어디까지나 경영진의 바람이자, 기적의 논리이다.


서로를 이름 위주로 부르고 상하 관계에 얽히지 않게 되니 의견을 활발하게 나눌 것이며, 창의적인 아이디어 제안에 유리하고 업무 성과도 더 좋아질 것 으로 바라봤다. 이렇게 되면 모든 기업이 호칭을 바꾸고, 임직원은 갑을 관계의 스트레스에서 벗어나고, 누구의 의견이라도 존중 받는 조직으로 회사는 행복한 놀이터가 될 것이다. 뒷담화보다 앞담화가 더 편해지고 대 놓고 할 수 있는 분위기가 될 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이론과 실제가 같다면 말이다.


현실은 어떠한가? 장류진 작가의 소설 '일의 기쁨과 슬픔'에서 주인공의 회사는 수평적인 업무 환경을 만들자는 취지로 대표부터 직원까지 모두 영어 이름을 쓴다. 하지만 대표, 임원에게 이야기 할 때는 '데이빗께서 요청하신', '앤드류께서 말씀하신' 식의 극존칭을 써야 하는 촌극이 벌어진다. 이름만 부르고 존칭은 생략되기 때문에 연장자나 상사들은 아래 사람들에게 대놓고 반말을 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호칭은 통일 됐지만 엄연한 계급과 수직 관계는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실제 기업의 상황도 다르지 않다. 삼성이 이재용 회장의 호칭을 Jay 또는 JY로 하겠다고 했지만 누가 면전에서 대놓고 부르며 속 마음을 말할 수 있을까. 아직까지는 형식을 위한 형식에 지나지 않다.


카카오는 가장 먼저 영어 이름을 호칭에 도입했다. 창업자 김범수는 브라이언으로 더 유명하며, 임직원 모두 영어 이름을 사용하도록 하여 한때, 수평 호칭 도입의 성공 사례로 떠올랐다. 누구나 브라이언에게 다른 의견을 말할 수 있는 조직 문화가 자랑이었다. 하지만, 최근 위기설과 함께 영어 호칭과 기업 문화를 원점에서 검토하여 혁신하겠다고 발표했다. 업무 할 때 호칭에 따라 혼선 이 생길 수 있고, 책임 소재가 불분명하며 직급 체계가 없어 직원들의 업무 의욕이 떨어졌다는 분석도 따르고 있다.


호칭의 변화로 수평 문화를 만든다는 논리는 술 자리의 반말 게임으로 선후배의 친분을 다지겠다는 것과 비슷하다. 나이, 직급에 상관 없이 허심탄회하게 말을 놓고 이야기하면 소통이 잘 된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술이 깨고 나면, 흑역사와 찍힌 것 같은 찜찜함을 지울 수 없고, 깍듯하게 대우받지 못한 것에 대한 꽁한 마음이 남아서 더 어색하고 가식적인 사이가 된다.


계급이 드러나 지 않는 동일한 호칭은 수평 문화의 첫 단추이다. 형식에 걸맞게 자유로운 소통이 되려면 업무 방식이 달라져야 하며, 조직 체계, 팀원에 대한 마인드도 바뀌어야 한다. 형식보다 중요한 것은 상대방에 대한 존중과 배려, 신뢰가 수반이 되어야 하며 자유에 따른 책임도 따라야 성공적인 결과물로 이어진다.



라온 대리에서 라온 프로로 호칭이 바뀐 지 7년이 지났다. 처음에는 동일한 직급이나 그 밑의 직급을 가진 팀원들끼리 자연스럽게 프로라고 부르고, 직급이 조금이라도 높은 팀원에게는 과장님, 차장님, 부장님이라고 불렀다. 지금은 셀장, 그룹장, 팀장님처럼 보직장을 제외하고는 프로라는 호칭이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았다. 자리잡지 못한 건 경영진의 바람과 달리 수평 문화이다. 호칭이 같아진다고 갑자기 서로에 대해 존중하고 배려하는 마음이 생길 리 없지 않은가.


소중한 팀원으로 대해 주시고, 내 의견에 귀 기울여 주시던 분들은 호칭과 상관 없이 여전하며, 그저 말 잘 듣는 밑의 직원이길 바라며 '하라며 해' 라고 강요하는 분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다. 사과를 배로 부른다고 배가 되지 않는 것처럼 사람의, 조직의 본질은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서로를 어떻게 부를지 고민하기 보다, 어떻게 대하며 일할 지를 생각해 볼 시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이 구역의 미친 년은 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