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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우니 Feb 03. 2024

無爲의 유익함

일정한 형상이 없어서 전혀 틈이 없는 것도 뚫고 들어간다

天下之至柔 馳騁天下之至堅

천하의 더없이 부드러운 것 즉 물은 천하의 더없이 단단한 돌과 쇠를 멋대로 구사한다.(자유자재로 다룬다)     

無有入無間 吾是以知無爲之有益

일정한 형상이 없어서 전혀 틈이 없는 것도 뚫고 들어간다. 나는 이것으로써 무위(無爲)의 힘을 알 수 있다.     

不言之敎 無爲之益 天下希及之

말 없는 가르침과 무위의 힘은 천하에 이것에 미칠 만한 것은 드물다. (제43장)


  물은 단단한 쇠나 돌을 마음대로 부리듯이 유연한 사람은 유명에 갇혀 있지 않기 때문에 아무리 단단한 것이라도 파고들지 못할 틈새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개 사람들은 세상을 바라볼 때 관념적이고 훈고학적 아전인수에 빠져서 세상을 해석한다. 그래서 노자는 문자나 말로써 가르치면 사람들은 그 말에 갇혀버리고 달이 아닌 손가락을 쳐다보는 우를 범하기 때문에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아예 보지 못하도록 말 없는 가르침을 선호한다.


 물은 일정한 형상이 없다. 무명은 물과 같다. 이름이 없기 때문에 물처럼 형상이 없다고 한 것이다. 무명은 앞서 언급했듯이 데이터이다. 인(仁)이나 예(禮) 같은 이미지를 갖고 있지 않다. 노자가 왜 물과 같은 형상이 없는 상태(無爲)를 천하에 이것에 미칠 만한 것이 없는 '탁월함'이라고 했을까? 노자는 왜 ‘上善若水(상선약수)’라는 표현을 써가며 탁월함(善)을 물에 비유하였을까? '물'과 '무명'은 일정한 형상이 없다. 물은 형상이 없지만 아무리 단단한 바위도 뚫어 버리는 힘을 가지고 있다. 무명도 마찬가지다. 물처럼 뚫지 못하는 것이 없다. 오히려 형상이 없기 때문에 뚫지 못하는 것이 없다는 말로 해석이 된다. 그렇다. 사람은 개념 속에 살고 있고 개념 속에 산다는 건 개념에 갇혀 있다는 말과도 같다. 그래서 언어를 잊어버리면 보지 못할 것이 없다.

 현재 ‘언어와 생각’에 대한 서로 다른 세 가지 입장이 있다. 하나는 언어는 생각을 가두는 감옥과도 같다고 한다. 이 경우 생각은 언어보다 클 수 없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생각은 언어에 구속되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이 경우 생각은 언어보다 클 수 있다. 세 번째는 언어가 생각의 감옥은 아니지만, 생각이 언어보다 클 수도 없다고 한다. 즉 언어가 곧 생각이라는 입장이다.

  양자역학에서 말하는 '빛의 이중성'을 받아들이는 과학자들은 언어 너머에 있는 미지의 실체를 인정한다. 언어와 생각이 못 따라갈 뿐이지 이중성이 자연의 본질일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세 번째 입장에 해당한다.

  이중성이라는 표현은 우리 언어가 가진 한계를 여실히 드러낸 것에 불과하다. 언어로는 도저히 양립할 수 없을 것 같지만 언어 너머에 있는 전자는 두 성질이 양립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가 실제 전자를 보지 않은 이상 장담할 수 없다. 인간은 직접 볼 수 없거나 경험하지 못하는 것은 관념이나 수학적 모형을 만들어서 이해하려고 든다. 수학이 이 세계를 완벽하게 기술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수식에 담겨 있는 의미까지 알기는 어렵다. 그건 왜 그럴까. 우리는 보이지 않는 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수단은 현재로선 '개념' 밖에 없다. 불교의 ‘공(空)’이나 ‘불성(佛性)’도 관념에 지나지 않는다. 관념과 상상만으로는 미지의 세계를 알 수 없다. 기존 관념을 떠나 이중성을 담아내는 새로운 관념을 동원한다 할지라도 말이다. 그것은 자명해 보인다. 언어가 생각의 감옥은 아니지만, 언어가 곧 생각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아무리 ‘생각’ 해도 전자의 본모습을 알 수 없다. 언어는 생각의 감옥이라는 말과 같다. 결국 직접 보는 수밖에 없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이중성을 보는 날이 오지 않을까? 하지만 언어를 버리더라도 이 세계를 이해하는 데는 한계가 있을 것 같다는 절망감도 살짝 든다. 우리가 믿고 있는 마지막 보루인 과학조차도 이 세계를 이해하는 데는 도움이 안 될 것 같은 불안감이 있다.


 無爲는 無名과 무슨 관계가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무명을 보기 위해서는 무위가 전제되어야 한다. 인간의 삶은 선택의 연속이고 사람은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것에 한순간도 끌려다니지 않을 때가 없다. 우리는 매 순간 경계(境界)에 끌려다니다가 충동적으로 반응한다. 無爲하지 않는 사회에 사는 개인들은 끊임없이 자신이 아닌 외부에 시선을 빼앗긴다. 심한 경우 사회가 국가에 종속되어 있다면 그 사회의 구성원은 외부에 보여지는 삶에 집착하게 되고 자신의 주체적 자아는 설자리를 잃게 된다. 온갖 구호가 난무하는 사회에서 자신의 삶에 천착하기란 불가능하다. 따라서 왜 無爲의 정치가 중요한지 그리고 왜 사람들이 無事하도록 해야 하는지가 분명해진다. 자발적이고 고유한 호기심으로 주체적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야 말로 無名을 만질 수 있고 이들만이 지식을 생산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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