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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은 소설가 May 13. 2024

[벚꽃 신호등 - 4화]

단편소설

*


    마을 입구가 시끄럽거나 말거나 벚꽃은 올해도 날짜를 못 맞춘다. 신호등에 분홍색 불이 활짝 켜지지 않았다. 날씨 탓이라고 속삭인다. 추워서 나갈 수 없다고 어리광을 피운다. 가로등 아래 제법 큰 벚나무만이 유일하게 꽃봉오리를 열지 고민하며 눈치를 본다. 솜사탕 가게에서 나오는 달콤한 향기에 벚나무마저 흠뻑 취해있다. 황씨는 총을 들었으니 무라도 썰어야 한다는 심정으로 총부리를 다시금 쥐어 잡고 휘저으며 쌍둥이네 머리를 내리쳤다. 머리통이 단단해도 내리치는 장난감 총의 거머리 판에 맞으니, 피가 안 나고 배기질 못했다. 악 소리와 함께 쓰러지는 쌍둥이네를 보고서야 침까지 뱉어내며 욕을 쏘아붙이니 주변에서 도와줄 엄두도 못 내고 서성인다. 멀찌감치 들리는 사이렌 소리는 경찰차인지 구급차인지도 모르게 순식간에 입구까지 다가왔다. 탕후루 트럭 안에 들어가 겁먹으며 전화한 처자가 신고한 지 5분도 지나지 않아서다.


    멀리서 보이는 경찰차에 정신이 번뜩인 덕진은 누구를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잊었다. 어떻게 시골집까지 내려와 의자에 앉아 있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순간적인 망각 증상은 단기기억을 지웠고 뇌신경이 멈춘 듯 찾아 들어갈 수 없는 블랙홀 속으로 숨었다. 기억은 기억하지 못한다는 걸 너무 잘 알고 있기에 또 다른 기억들로 덮어 씌워졌다. 덕진이 해야 할 일은 집으로 돌아가는 거였다. 아이들과 어린이대공원이라도 찾아가려면 늦지 않게 움직여야 했다. 점심시간이 넘어서야 움직이니 마을로 몰려오는 차들 때문에 길은 대리 삼거리를 기점으로 밀리기 시작했다. 구급차만이 중앙선을 가운데로 타고 응급신호를 내며 달려갔다. 굼벵이 기어가듯 한 바퀴씩 굴러가는 자동차는 파란불도 빨간불도 표시되지 않는 삼거리에 있었다. 매년 부모님 댁을 찾아오며 지나쳤던 풍경에도 오늘은 새로웠다. 혼자서 언제 왔는지도 생각이 나질 않으니 누구한테 물어보기도 뭐하여 돌아서는 길이다. 수첩을 뒤적여도 떠오르지 않았다.


    교통순찰은 구급차 길을 터주고서야 한 쪽씩 차량을 흘러가게 했다. 덕진은 분명 솜사탕 가게 아주머니가 타고 갔을 거로 생각했다. 자리싸움하는 상인들 싸움판에 몽둥이 같은 걸로 내리치는 모습을 봤기 때문이다. 자기 머리라도 내려 맞은 듯이 두개골이 아파 온 건 구경하던 사람도 그러했다. 머리에서 흐르는 피를 보고 누군들 같이 아프지 않을 수 있겠나. 뒤따라오던 경찰차는 뒷문 유리가 어두워 누군가 타고 있는 듯했지만, 알아볼 수 없었다. 거무스름한 선팅은 안과 밖을 단절시켰다. 확인한다고 달라지는 건 마음의 변화밖에 없다. 속 시원함도 통쾌함도 안도감도 순간적인 심경의 변화일 뿐이다. 사는데 중요하지도 않다. 잊어버리면 된다. 그까짓 거 뭐라고. 미련 갖는다고 변하는 건 하나 없다. 덕진은 구급차를 따라가는 경찰차 뒤에서 같은 방향으로 향하고 있었다. 사거리를 만나 신호를 뛰어넘어 직진하는 구급차와 다르게 경찰차는 좌회전했다. 덕진이가 가려던 방향이다. 부모님 댁까지 내려와 영문도 모른 채 다시 올라가는 길이다. 시간이 흐르며 단기 기억상실증은 발생할 수 있다고 의사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좌회전하라는 내비게이션 안내가 들려온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애써 머릿속에 기록해 두지 않아도 된다. 다른 기억들도 내비게이션이 알려주길 바란다.


    요즘 덕진은 머릿속에 많은 걸 넣고 다니지 않는다. 전화번호도 핸드폰 번호만 기억한다. 부모님, 아내 번호조차 외우지 않는다. 자동차 번호판도 잊은 지 오래됐다. 건물에서 주차장 사전 결제를 하려고 번호를 누를 때마다 핸드폰에 사진첩을 열어본다. 부모님 생신도 핸드폰에 들어있다. 아이들 이름은 아내가 조리원에 있을 때 혼자서 출생신고를 했는데 두 번 다시 한자로 써본 적이 없으니 쓰는 법도 몰각했다. 성만 겨우 쓸 줄 안다. 가끔은 본인 이름의 한자 횟수도 헛갈린다. 누구도 묻지 않으니 모른다는 걸 들키지 않아 좋다. 군대에서 총을 잡을 때마다 외치던 군번도 모른다. 핸드폰 인증이 많아서 주민등록번호는 손가락이 기억하지, 뇌에 새겨져 기억한다고 보기 어렵다. 불편함 없이 살고 있다. 집에서 회사까지 거쳐 가는 지하철 정거장 이름은 기억 못 하지만 몇 분까지 집에서 나와야 하는지 잘 알고 있다. 1분이라도 늦어지면 지각일 것도 안다. 내일까지 마감해야 할 보고서는 잊히지 않는다. 임원 출장 일정은 외우고 싶지 않았는데 보는 순간 까먹지 못한다. 당연했던 것들 대신 새로운 걸 기억한다.


    아파트 주차장 입구가 보이는 마지막 사거리에서 전화벨이 울린다. 모르는 번호다. 첫 번째 벨 소리가 끝나자, 통화버튼을 누른다. 대리마을 파출소다. 아버지가 맨발로 마을 외곽 순환도로 위를 걷고 있다는 신고를 받고 파출소로 모시고 왔다는 자초지종이다. 다치시지는 않았을까, 어떤 상태일까, 기억은 나실까, 식사는 하셨을까, 나를 알아보시지도 못하실까, 앞으로는 어떻게 해야 하나. 머릿속이 질문들로 채워졌다. 스스로 묻고 답한다. 어려운 수학 문제집을 풀고 있지 않지만 잠시나마 자신을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기억력과 지능은 별개인 거 같다. 순간적으로 스치는 많은 생각을 하는 틈에도 또 다른 궁금증이 떠오른다. 단기 기억력이 사라져도 이미 학습하여 체득한 지식은 남아 있을까. 덕진은 2차 방정식의 근의 공식도 기억한다. 학교에 남으며 초등학교 2학년 2학기 때 외웠던 구구단은 노랫말 외우듯 줄줄 나온다. 대학교 때 즐겨 듣던 노래는 언제나 콧노래처럼 한 대목도 틀리지 않고 흘러나온다. 춤동작도 출수 있다. 행복한 기억만큼은 머릿속 여러 군데 남겨 놓았기 때문에 전부 지워지지 않았다.


    파출소 한쪽에 앉아 있던 아버지는 덕진이 들어서는 걸 알아봤다. 아들의 걸음걸이나 뒷모습만 보아도 단번에 맞춘다. 성큼성큼. 오다리에 앞으로 넘어질 듯한 걸음걸이. 덕진이다. 맨발로 등산하는 입구에 신을 벗어 놓고 올라가다 보니 길을 잃으셨다고 말씀하신다. 내려와서 다시 입구를 찾다 보니 도로변에서 걷고 있으셨다고 한다. 자식이 있는 집으로 가서 신발 한 켤레만 빌리려 할 작정이었단다. 가는 길을 다 알고 있다고 이야기했는데도 경찰이 여기로 끌고 와서 어디도 못 가게 잡아두고 있다며 덕진이를 보고 반가워한다. 어떻게 왔냐며,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했다며, 밥은 먹었냐며, 이제는 다 괜찮으니 얼른 집에 가보라고 하신다. 슬리퍼 옆으로 흙까지 묻어 거무스름한 아버지 발바닥이 보인다. 몇 년 전까지 벚꽃이 필 때면 밭에 거름 주고 한 해 농작 준비에 분주했던 분이다. 용돈 한 푼 보낼 거 없다며 당신 먹거리 손수 벌어 살겠다고 당당하셨다. 할아버지처럼 깜빡깜빡 잊기 전까지다.


    아버지를 모시고 돌아오는 덕진은 마을 입구에 늘어선 소방차와 거무스레 타 버린 벚나무를 보고 놀랐다. 마을 초입 솜사탕네 가게 앞에 있는 가장 늠름한 나무다. 벚꽃길에 심었을 때 줄을 맞추기 위해 첫 번째로 심어졌을 나무다. 소방차는 검게 그을린 나무에 연신 물을 쏘며 잔불을 끄고 있었다. 주변 나무는 타지 않은 걸 보니 누군가 한 그루만 태우려고 불이라도 낸 거 같다. 머릿속 기억이 사라지듯 오랜 나무에 불이 붙었다. 소방차 주변에는 쌍둥이 손을 붙잡고 겁에 질려 울고 있던 탕후루 아가씨가 있다. 탕후루를 한 손에 들고 다른 손으로 아가씨 손을 꼭 붙잡고 있는 아이들이 불구경에 신이나 보였다. 소방차에서 뿜어져 나오는 거친 물줄기는 장난감 물총과 상대가 안 됐다. 소방차 옆으로 서 있는 경찰차 뒷좌석에는 황씨가 타고 있었다. 옛날 군복 차림에 황씨는 아직도 분이 안 풀렸는지 솜사탕 가게와 탕후루 트럭으로 옮겨붙었던 불씨를 보며 씩씩거리고 있다. 파출소에서 돌아와 탕후루 트럭 앞에 줄 서 있던 사람들을 보고 또 한 번 부화가 뒤틀렸나 보다. 장난감 총 말고 또 무얼 압수당했을까 찾아보지만 이미 현행범으로 검거되며 수거했는지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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