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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대능 Dec 17. 2023

석기시대의 화가

'미술'로 들여다본 문자 이전의 삶

파리 여행 일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루브르 박물관일 것이다.

하지만 루브르 박물관 방문 계획을 세우다 보면 문제가 생긴다.

공개된 작품만 무려 35,000여 점이라는 것이고 한 작품 당 1분씩 감상해도 꼬박 24일이 걸린다는 것.

결국 우린 루브르 박물관 투어를 신청했다.


가이드 분께서 분주한 발걸음으로 처음 안내한 작품은 ‘함무라비 법전’이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원칙으로 유명한 법전이다.

동해보복법이라 하며, 구약 성경에도 제시된 인과응보의 원리가 잘 담겨있다.

지금의 우리가 보았을 때 깜짝 놀랄만한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


제229조 : 건축가가 지은 집이 무너져 주인이 죽으면 건축가를 사형시킨다.
제230조 : 건축가가 지은 집이 무너져 주인의 아들이 죽으면 건축가의 아들을 사형시킨다.


함무라비 법전은 바빌로니아의 함무라비 왕이 작았던 바빌론을 거대 도시로 확장하는 과정에서 집대성하였으며 기원전 1750년 경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기원전 1750년이면 대체 얼마나 오래된 거지?”
아내가 물었다.


“우리나라로 치면 신석기에서 청동기 시대로 넘어가는 정도일 거야”

“그 옛날에 이런 법전이 있었다니”

“미술도 있었는 걸”

“석기시대에 화가도 있었어?”
“있었지”


인도네시아 술라웨시섬 동굴에서 발견된 벽화 (출처 BBC)

오늘날 우리는 석기시대의 동굴벽화를 미술의 기원이라고 본다.

계속해서 점점 더 오래된 벽화들이 발견되고 있으며, 최근에는 44,000년 전 것으로 추정되는 돼지 벽화가 인도네시아에서 발견되기도 했다.(위 그림)

동굴벽화는 특정한 지역만의 문화는 아니다.

프랑스의 라스코 동굴벽화, 스페인의 알타미라 동굴벽화 등 많은 벽화가 발견되었고, 우리나라에서도 신석기시대로 추정되는 암각화(암벽에 그린 그림)가 존재한다.

흥미로운 점은 이렇게 다양한 지역에서 발견되는 미술의 주제가 비슷하다는 점이다.


“사람들이 왜 벽화를 그린 거야?”
아내가 물었다.


“동굴벽화는 주술적인 목적이 있어. 자긴 동굴벽화하면 뭐가 떠올라?”

“동물그림이었던 것 같은데”

“맞아. 동굴벽화의 주제는 대부분 먹잇감들이야. 수렵채집을 하는 구석기시대 사람들에게 사냥의 실패는 곧 배고픔을 의미했었어. 사냥감을 잡을 수 있기를 희망하며 벽화를 그려놓은 거지”

“조금 이상한데. 난 소고기가 먹고 싶다고 소 그림을 방에 붙이지는 않을 것 같은데?”

“우리는 더 이상 수렵채집을 하지는 않으니 그럴 수도 있겠다... 우리로 치면 고3 수험생의 컴퓨터 바탕화면에 서울대 마크가 그려져 있는 거라고 보면 될 것 같아”

“아… 내가 다이어트짤을 폰 배경으로 쓰는 거랑 비슷한 느낌이네”

“맞아. 그 시대 사람들에겐 이런 주술적인 부분들도 중요했어. 어느 날은 먹잇감이 하나도 보이지 않거나 배고프고 지친 상태에서 호랑이 같은 맹수를 만나기도 했을 거거든. 동굴이라는 장소가 그 당시 주거지잖아? 가장 안전하고 아늑하다고 느끼는 주거지에서 그 시대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했을 것 같아?”

“내일은 먹잇감을 많이 잡았으면 좋겠다?”

“나도 그랬을 거라고 생각해. 내가 돌봐야 할 가족들을 보면서 먹잇감이 풍족하길 바랐을 것이고 그게 동굴벽화에 고스란히 남아있는 거지. 그리고 동굴벽화의 특징이 하나 또 있어”

“그건 뭔데?”

“디테일이 살아있다는 거.”


스페인 알타미라 동굴벽화 (출처 worldhistory.org)


사람들이 동굴벽화를 보고 느끼는 것 중에 하나가 동물들의 묘사가 놀랍도록 생생하다는 것이다.

‘석기시대’라는 어감으로 비추어 보았을 때 그림 또한 엉성하고 어눌해야 할 것 같지만 마치 현대인이 그려놓은 듯하다.

실제로 1879년 고고학자 사우투 올라가 스페인의 알타미라 동굴벽화를 처음 발견했을 때 고고학자들은 이것이 인류의 것이라고 믿지 않았다.

초기 인류학자들 원시(Primitive) 사회에 대해 정신적, 도덕적으로 열등하다고 생각했는데, 그에 비해 벽화의 그림이 너무나 뛰어났기 때문이다. 사우투올라는 이로 인해 사기죄로 고소를 당하기도 했으며, 결국 동굴벽화가 그 가치를 인정받기 전 이 세상을 떠나버리기도 했다.


이는 당시 제국주의적 사고관의 영향이 크다고 볼 수 있다.

The First Landing of Christopher Columbus in America, Dioscoro Teofilo Puebla Tolin (1862)

위 그림은 제국주의의 시작이라 볼 수 있는 콜럼버스가 아메리카에 상륙하는 것을 기록한 그림이다.

콜럼버스가 죽은 지 한참 뒤의 작품이지만 알타미라 동굴벽화 발견 당시(1879년)의 서구열강의 세계관을 드러내는 작품이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작품 중앙에 위치한 콜럼버스이다.

콜럼버스 일행은 드디어 인도에 도착했다는 성취감과 영광으로 가득 찬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다.

마치 신이 이 땅을 부여했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는 듯하다.

반면, 당시 원주민이었던 왼편의 타이노인들은 나체 상태이며 미개인과 같이 표현되어 있다.

그들은 두려움과 긴장감에 사로 잡힌 채 원정대를 바라보고 있으며, 콜럼버스 원정대는 구석의 원주민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위대한 탐험가로 알려진 콜럼버스는 이후 4차 원정까지 거치며 원주민들에게 수많은 악행과 학살을 저질렀다.

제국주의자들이 원주민들을 같은 인간으로조차 여기지 않았던 것과 같이 고고학자들이 동굴벽화를 석기시대의 작품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동굴벽화는 20세기에 접어들어 더 많은 석기시대 그림이 발견되면서 그 가치를 인정받았다.




또 한 가지 의문이 들 수 있다.

무슨 이유로 벽화를 이토록 생생하게 그렸냐는 것이다.


구석기시대 미술이 일종의 주술이라면 종교적인 색채가 묻어 나와야 한다.

기독교의 십자가와 예수, 삼위일체, 물고기 문양 등 종교는 우리로 하여금 추상을 떠올리게 하는데, 간단하게 핵심, 본질만을 표현하여 누가 봐도 의미가 전달되고 이해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알타미라의 동물들은 추상이라기보다 재현에 가깝다.

머리, 몸통, 다리, 꼬리 등 명확하고 구체적인 형태가 있고 동물의 털까지 상세히 묘사되어 있다.


구석기인들의 '간절함'을 표현한 것일까?

아래 구석기인의 일기를 들여다보자.


-어느 구석기 인의 일기


며칠 째 사냥에 실패했다. 열매도 다 떨어졌고 먹잇감들이 잘 보이지 않는다.

날도 계속 추워지고 있다.

아이들은 배고픔에 지쳐 잠들었고 아내도 아이들을 달래느라 지쳤다.

내일은 부디 가족들을 배불리 먹일 수 있으리라.

며칠 전 그렸던 동굴벽화가 옆에 보인다.

다시 보니 조금 대충 그린 것 같다.

그 이후로 사냥이 잘 되지 않았는데 내 탓이라는 생각이 든다.

큰 먹잇감을 찾아 그것들을 압도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다시 벽화를 그렸다.

이처럼 구석기인들도 이미지 트레이닝을 했다.

그리고 그것을 동굴의 가장 깊은 곳에 아주 상세히 남겼다.

이를 통해 우리는 그들이 현생의 인류와 버금가는 미술적 감각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미술’을 통해서 말이다.



인류 최초의 미디어는 ‘언어’이다.

그리고 발화와 동시에 사라지는 음성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인류는 시각적 기호인 ‘문자’를 발명해 냈다.

기원전 3,000년 경의 일이다.

하지만 동굴벽화에서 보았듯, 우리는 ‘미술’을 통해 ‘문자’ 이전의 삶을 들여다볼 수 있다.

미술이 역사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가지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어쩌면 인류가 언어를 사용하기도 전의 벽화가 발견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라스코 동굴 벽화 ( 출처 nationalgeographic.com )

구석기인들이 하루 일과를 마치고 어두운 동굴에서 잠을 이루기 전 어떤 생각을 했을까?

어쩌면 수 만년 후의 자신들과 소통하고 싶었는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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