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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춘춘 Dec 14. 2023

아직, 산타를 믿나요?

엄마 아빠도 산타가 필요해

올해 산타할아버지 선물은 손흥민 축구화다. 산타할아버지는 참 인정도 많으시지. 피노키오라면 벌써 코가 땅에 닿았을 것 같은 아들에게도 잊지 않고 매년 마음에 쏙 드는 꿈의 선물을 주시다니. 일 년 동안 '나는 참 괜찮은 어린이였다'는 초긍정 자기 성찰은 역시 이번 크리스마스에도 '나는 선물을 받아 마땅한 모범어린이'라는 결론을 냈다. 일 년 동안 말 안 듣고 속 썩이며 벌인 크고 작은 일들을 옆에서 줄줄 읊는 엄마의 메아리는 아들의 귀에 들어가 닿기 전에 첫눈 녹듯 사라졌다. 열 살이면 이제 알 것도 같은데, 왜 이렇게 철석같이 믿고 있는 걸까. 완벽한 첩보작전을 매번 성공해 내는 엄마 탓인가, 아직 마음이 꽃밭인 아들 탓인가.


누가 착한 애인지, 나쁜 애인지 다 알고 있지만 올해도 선물을 안겨주는 인정 많은 산타엄마는 온라인 마켓을 뒤진다. 맙소사, 역시 손흥민 이 양반, 대단한 양반이다. 전사이트 품절. 잠실, 코엑스, 갤러리아, 신세계 뚜루뚜루 전화를 돌린다.

"저, 손흥민 풋살화 주니어 사이즈......"

"죄송하지만, 품절입니다."

"(아직 사이즈 말 안 했습니다만)네, 알겠습니다."

남편과 대책회의에 들어갔다.

"올해 그냥 말해버려?"

"놔둬. 어차피 올해가 마지노선인 것도 같아."

"어디서 구해?"

"계속 검색해 보자. 재고 뜨는 때가 있겠지......"

엄동설한에 참나물과 산딸기를 구해오라는 계모의 명령을 받은 연이와 버들도령이라는 전래동화가 생각난다. 산타엄마의 버들도령은 어디 있는 것인가.


몰래 선물을 놓고 떠나는 산타와 루돌프

너무 완벽한 합성사진 탓이었나. 아들이 엄마가 찍은 산타사진을 폰으로 전송을 해달라고 한다. 몰래 선물을 놓고 밤하늘로 사라지는 루돌프 썰매와 산타의 사진으로 산타 실존에 대한 확실한 증거를 친구들에게 보여줘야 한다고. 엄마는 마음이 뜨끔하다. 아들이 양치기소년이 될 판이다. 열 살쯤 되니 학교에서 친구들끼리 설전이 벌어진 모양인데, 이미 산타의 정체를 알아버린 아이들이 '나만 동심파괴를 당할 순 없지. 세상이 그렇게 판타지가 아니야'이라며 "산타는 없다고! 엄마, 아빠가 쿠팡에서 주문한 것"이라며  커밍아웃, 아니 산밍아웃을 한 것이다. 거기다 대고 꺾이지 않는 믿음으로 대차게 산타사진이 우리 집에 있다고 우긴 아들. 그래,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이야. 혹시 나중에 꺾여도 넌 손흥민 축구화 받을 거잖아.


저녁시간에 아들이 묻는다.

"엄마, 아빠는 산타할아버지한테 받은 선물 중에 뭐가 젤 기억에 남고 좋았어?"

해맑은 아들의 질문이지만, 저녁식탁은 잠시 정적이 흘렀다. 아...... 갑자기 슬퍼지는데. 역시나 남편이 먼저 피해 간다. 너무 오래돼서 기억이 안 난다고. 곤란할 때 나오는 기억상실의 핑계는 모든 남자들의 최후의 방패막이 인가. 내가 들을 때는 어처구니가 없는데 지금 상황에는 너무나도 시의적절하다. 나는 괜스레 마음이 짠해져 쓰게 웃었다. 매년 크리스마스에 아이의 선물을 준비하면서 우리 부부는 각자의 내면아이를 달랜다.


누구에게나 마음속에 위로받지 못한 어린아이가 있다. 기억이 나는 유년시절부터 남편과 나는 산타를 믿어볼 기회가 없었다. 단 한 번도 머리맡에 산타의 선물이 놓여 있었던 적이 없었으므로. 심지어 나는 모태신앙으로 유년시절엔 한주도 빠지지 않고 성당에 가고 아침점심저녁으로 삼종기도를 했으며 예수님의 생일을 진심으로 축하했다. 크리스마스가 좋았다. 교회와 성당들, 가게들이 색색깔 반짝반짝 빛나고 흥겨운 캐럴도 거리 곳곳에 흘러나온다. 유치원에 가면서 산타라는 할아버지가 착한 아이에게 선물을 준다고 들어 알게 되었지만 왜인지 나에게 산타는 선물을 주지 않았다. 아마 처음엔 내가 착한 일을 덜해서 그런 건 아닐까 했을 테고, 이 정도면 착한 어린이인 것 같은데 왜 안 오는 걸까 의문을 품었다가 어느 해 부터는 머리맡에 양말주머니를 놓지 않았다.


몇 년 전 지인가족과 연말캠핑을 하다가 '우리 아이들이 언제까지 산타를 믿을까'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되었는데 놀랍게도 그 집 아빠는 중학교 때까지 믿었다고 했다. 우리가 그 정도면 세상물정을 너무 모르는 거 아니냐 너무 순진했다며 놀렸는데, 반대로 우린 산타를 믿어볼 기회조차 없어 처음부터 믿지 않았다고 했더니 우리가 놀란 것 이상으로 당황하던 지인의 표정이 기억에 남는다. 조금 부끄러웠고 많이 부러웠다.

그리고 그 해 크리스마스에 우리 부부에게도 많이 늦었지만 드디어 산타가 와주었다. 산타 따위는 없다고 양말을 치우던 내 안의 어린아이는 고맙고 서러운 마음에 울면서 따뜻하게 위로받았다. 지금도 그때 그 센스 터졌던 산타는 무슨 이야기냐고 시치미를 떼고 있다.

이제야 와준 눈물의 산타

찾았다! 손흥민 축구화가 재고가 떴다. 매장가보다 오만 원이나 비싼 직구에서 손가락이 망설였지만, '그래. 올해가 마지막이겠지. 네 안에 산타와 슬슬 작별인사를 할 때이니.'하고 결제를 눌렀다. 백 원이면 자갈치를 사 먹고 행복해지던 여덟 살의 나와 다르게 한정판 축구화에 행복해지는 아들의 크리스마스도 지켜줘야지. 그나저나, 이제 8개월인 동생의 산타는 이 녀석이 지켜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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