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쉥겐 기간이 끝나 독일에 갇혀있어야 한다는 사실은 너무 일찍 져버리는 태양과 함께 나를 우울하게 만들었다. 그래도 힘들게 독일까지 왔는데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그 우울함을 떨쳐버리기 위해 모로코에서 귀국하자마자 다음 여행을 계획했다. 어느덧 크리스마스가 열흘도 안 남았기 때문에 크리스마스 마켓이 유명한 곳을 가보는 게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명한 도시들이 많지만, 그들 중에서도 드레스덴이 여러모로 볼 것이 많아 보여서 이곳으로 선택했다. 그리고 겸사겸사 바로 옆에 있는 라이프치히도 잠깐 들렀다.
뮌헨에서 라이프치히까지 거리는 꽤나 길다. 비싼 돈을 내야 탈 수 있는 IC나 ICE를 이용하지 않다 보니 무려 6시간이 넘게 걸렸다. 이동하는 동안 끼니를 해결하긴 힘들 것 같아 아침을 든든히 먹었다. 계란물에 작게 자른 식빵을 담갔다 버터를 두른 프라이팬에 살짝 구워 프랜치토스트를 해 먹었다. 조리법은 정말 간단하지만 맛도 좋고 든든했다. 이후 여행을 떠날 때에도 이 요리를 자주 해 먹었다.
기차 안에서 블로그도 쓰고 책도 읽으며 나름 시간을 잘 보내다 보니 어느새 라이프치히에 도착해 있었다. 모로코에서 2번이나 10시간 넘게 차를 탔던 경험 덕분에 6시간쯤이야 귀여웠다. 아무튼 도착해 있을 때는 16시가 조금 넘었을 때였는데, 이미 하늘은 어둑해지고 있었다. 그에 반항하듯 라이프치히 중앙역은 밝게 빛나고 있었다. 관광객 입장에서는 별 볼 일 없는 라이프치히에게는 과분할 정도로 웅장하고 아름다웠다. 대도시 뮌헨의 중앙역은 밋밋하기만 한데...
아무튼 라이프치히에 온 이유는 딱 하나였다; '파우스트'에 나오는 '아우어바흐 켈러'에 가보는 것. 2번이나 읽었던 책이었던 만큼—하지만 제대로 이해하지는 못했다—언젠가는 꼭 가보고 싶었던 곳이다. 식당이 열기 전까지 시내를 이리저리 둘러보다 들어갔다. 술집 입구부터 파우스트와 메피스토펠레스 조각상들과 '파우스트'에 나오는 글귀들이 적혀 있었다. 유명세에 걸맞지 않게 대기줄은 없었다. 한적한 식당 구석에 자리를 잡고 메뉴판을 보았는데 음식값이 너무 장난 없었다. 음식으로 유명한 곳은 아니기에 메인 코스 요리들 중 가장 저렴했던 멧돼지 요리와—그래도 무려 19유로나 했다—Gose라는 라이프치히 지역 맥주를 한 잔 주문했다. 바로 나온 Gose를 한 모금 들이켜보았다. 지배적인 신맛과 짠맛이 보리와 홉의 향을 다 삼켜버린 듯했다. 내가 좋아하는 맥주의 특징들을 억제해 버려서 많이 아쉬웠다. 그래도 멧돼지 요리의 느끼함을 잡아주는 역할만큼은 성실히 수행했다.
식사를 마치고 중앙역으로 바로 돌아가 드레스덴으로 갔다. RE를 타고 1시간도 안 걸려서 도착했다. 기차에서 내리니 밖에는 비가 꽤 오고 있었다. 정신없이 숙소에 도착한 후에야 신발이 축축해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번에도 MEININGER 호스텔로 예약했는데, 쾰른점과 달리 직원들이 매우 친절해서 좋았다—시설이 쾌적한 것은 똑같았다. 하루 종일 혼자여서 무척 외로웠는데, 다음날부터는 유랑에서 동행을 구해서 기대를 한 채 잠에 들었다.
츠빙거 궁전 - 군주의 행렬 - Golden Rider - 크로이츠 교회
정해진 시간에 중앙역에 모였다. 동행은 나와 JW, HY까지 총 3명이었고 나를 제외하고는 모두 여행객이었다. 특히 HY은 이곳 드레스덴이 유럽에서의 실질적 첫 여행지였다—공항 때문에 들른 프랑크푸르트는 제외. 그 때문에 이들은 독일 교환학생인 내게 기대하는 바가 상당해 보였다. 그런 부담감을 떠안고 점심부터 먹으러 갔다.
HY가 찾아둔 맛집 중 하나인 Imbiss Curry24에서 커리부어스트를 시켜 먹었다. 독일에 정착한 지 3개월째나 되었으나 커리부어스트는 이때가 처음이었다. 이걸 왜 이때에서야 처음 먹어본 건지 살짝 후회할 만큼 매콤 짭짤한 맛이 마음에 들었다. 식당을 잘 찾았다고 고맙다는 말을 전하면서도,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내 최애인 바이스 부어스트도 꼭 먹어보라고 추천해 주었다.
본격적으로 구시가지 구경을 시작했다. 먼저 츠빙거 궁전부터 갔다. 화려한 겉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내부로 들어갔는데, 일부가 공사 중이라 다소 아쉬웠다. 그다음 Schlossplatz로 갔다. 엘베 강을 등졌을 때 왼편에는 고등법원, 오른편에는 가톨릭 궁전 교회가 있었다. 특이하게도 모든 건물들에 검게 그을린 듯해 보였다. 건물들이 다 웅장하고 그 음각은 섬세해서 칙칙하게만 보이지는 않았다. 고등법원 뒤편에는 군주의 행렬이라는 유명한 벽화가 있다. 작센 왕국의 왕들이 쭉 그려져 있었는데, 인물들이 실감 나게 그려져 있던 것이 인상적이었다.
성모 마리아 교회에 들른 뒤, 아우구스투스 다리를 통해 엘베 강을 건너 신시가지로 넘어갔다. Golden Rider 근처에 대관람차가 있었는데, 둘 다 타보고 싶어 하는 눈치라 나도 덩달아 타게 되었다. 3바퀴를 돌았는데, 각 바퀴마다 한 명씩 모델이 되어 나머지 두 명이 사진을 찍어주었다. 이후 신시가지 크리스마스 마켓을 둘러보았다. 아까는 영업 준비 중이었던 점포들이 모두 음식과 물건을 열심히 팔고 있었다. 손이 시려 Glühwein이나 한 잔 마실까 하다가 꾹 참고 저녁을 맛있게 먹기로 하고 지나쳤다.
비가 많이 왔던 전날과 달리 하늘이 맑아 참 다행이었다. 강변에 내려가서 서로 사진을 찍어주었다. 잔디가 젖어 질퍽였던 것 빼고는 예쁜 사진을 담는 데에 최적이었다. 열심히 사진을 찍으며 칼로리를 소비한 뒤, 저녁을 먹으러 구시가지로 내려갔다. 어디를 갈까 찾아보다 교회 옆에 아우구스티너를 발견했다. JW와 HY 모두 뮌헨으로 올 계획이 없다고 하니 이곳에 가자고 했다. 어차피 나도 뮌헨에서 아우구스티너를 가본 적이 아직 없어서 궁금했었다. 슈바인학센과 뉘른베르거 부어스트를 맥주와 함께 먹었다. 주문할 때 독일 거주 3개월 차의 독일어 실력을 마음껏 뽐내었다. 엉터리 독일어였지만 동행들은 내가 독일어를 좀 하는 줄 아는 것 같았다. 남들 앞에서 멋있는 척을 더 수월히 하기 위해 독일어를 더 써 버릇하기로 했다.
이후 Neumarkt에 가서 크리스마스 마켓을 구경하다 크로이츠 교회로 갔다. 사실 교회 내부는 별로 관심이 없었고 꼭대기에 있는 전망대를 가기 위해서였다. 2.5유로를 내고 계단을 타고 올라갔다. 매표소에서부터 유독 한국인들이 많이 있었는데, 실제로 비좁은 전망대는 사진을 찍는 한국인들로 가득했다. 가뜩이나 날도 추워 옷을 두껍게 입고 와서 양방향에서 한 명씩 좁은 통로를 통과하는 것도 어려웠다. 그래도 힘겹게 전망대에 도달한 만큼 아래에 보이는 크리스마스 마켓은 아름다웠다. 거구의 서양인들에 치여 제대로 감상할 수 없었던 상점 건물들을 온전히 감상할 수 있었다.
다시 내려가서 Altmarkt의 크리스마스 마켓을 둘러본 뒤 작별 인사를 나누고 숙소로 돌아왔다. 전날밤에는 내 옆 침대에 아무도 없어 편하게 잤는데, 이날은 거구의 흑인 여성이 누워있었다. 덩치가 워낙 커서 내 자리를 침범할 듯 말 듯했는데, 어느새 코까지 골아 잠드는 데 꽤나 오래 걸렸다.
하루 종일 걸어 다녀 피곤했지만, 전날처럼 외롭지는 않아서 문제없었다. 운이 좋게 좋은 사람들만 만나 그런 건지 모르겠지만, 유랑을 쓰면서 모르는 사람들과 만나는 것이 재밌었다. 그들에게 이 하루가 어땠을지 궁금하다. 첫 유럽 여행이었던 HY의 의견이 정말 궁금하기 하다. 그리고 다들 내가 몸소 부딪히며 배운 여행 팁들을 잘 써먹으며 남은 여행을 잘 마무리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