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
며칠 전 기다리고 기다리던 독일 체류 허가증이 드디어 나왔다. 받기 어려웠던 만큼, 생긴 것마저 멋있었다. 열심히 사진을 찍고 지갑 안에 소중히 간직해 두었다—차태현과 전지현처럼 독일 경찰관을 향해 당당하게 내밀어야지. 이제 안심하고 독일 밖으로 나갔다 들어와도 된다는 기쁜 마음을 가지고 처음 떠나는 여행의 목적지는 스위스였다. 이 기간 아버지는 모임에서 이탈리아 북부 여행을 오셨다. 나는 그동안 스위스를 천천히 훑으며 내려가 밀라노에서 뵙기로 했다.
스위스는 북유럽과 영국만큼—혹은 그 이상으로—물가가 높기로 악명이 높다. 스위스에서 최대한 소비를 하지 않기 위하여, 출발 전 집에서 아침을 든든히 먹고 갔다. 평소라면 프렌치토스트만으로 아침을 해결했지만, 이 날은 여기에 시리얼과 베이컨도 먹었다. 그리고 중앙역에 도착해서는 Lidl에서 설익은 바나나와 방울토마토를 산 뒤 기차에 올라탔다.
최대한 저렴하게 가기 위해 여러 번 환승했다; 먼저 Karlsruhe에 갔다가, 바젤에 들른 후 루체른에 도착했다. 역시 DB 답게 1시간가량 기차가 연착하여 16시가 되어서야 도착했다. 해가 벌써 질 준비를 하고 있어 빠른 걸음으로 호스텔에 갔다. 숙소에 걸어가면서부터 스위스의 축복받음을 느꼈다. 어디서든 한 바퀴를 돌면 구름을 걸친 설산을 찾을 수 있었다. 마치 어디서든 백록담을 찾을 수 있었던—빌딩들이 가득 들어선 21세기에는 더 이상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다—제주도가 떠올랐다. 특히 카펠교가 있는 로이스 강 근처로 가면 360도 전체가 장관이었다. 3층을 넘어가는 일이 없는 중세 건물들 뒤로, 평균 해발고도가 2500m에 달하는 알프스 산맥의 설산들과 잔잔한 윤슬을 지닌 루체른 호수가 펼쳐져 있었다. 걸을 때 눈을 뜨기만 하면 업무 스트레스를 치유해 주는 루체른의 퇴근길이 참 부러웠다.
카펠교는 이런 도시와 매우 잘 어울렸다. 이렇게 꽤 긴 다리가 지붕으로 덮여있는 것은 낯설었다. 하지만 칙칙한 도시의 분위기에는 잘 녹아들었다. 특히 결이 선명한 목재로 지어져 더 그렇게 느껴졌다. 문득 '해리 포터 - 아즈카반의 죄수'에서 리무스가 해리에게 제임스와 릴리 이야기를 해주는 다리가 떠올랐다. 또한 다리를 직접 걸어보니 지붕 밑에 카펠교의 역사에 관한 그림들이 있었다. 이들이 모두 모여 루체른은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풍겼다.
아무튼 다리를 느긋이 건너 빈사의 사자상으로 갔다. 인터넷에 찾아보니 억울하게 죽은 루이 16세의 스위스 용병들을 기리는 조각이라고 한다. 비록 사자상 바로 앞에 연못이 있어 가까이서 볼 수는 없었지만, 얼굴과 갈기의 생생함은 느낄 수 있었다. 을씨년스러운 날씨와 애처로운 표정으로부터 '나니아 연대기'에서 하얀마녀에게 죽임을 당하여 돌 위에 뉘어있는 아슬란이 연상되었다.
카펠교로 돌아와 해가 지기까지 호수 앞 산책길을 거닐었다. 하나둘씩 켜지는 조명들이 으슬으슬한 풍경에 따뜻함을 더해줬다. 역시 해는 순식간에 져버리고, 하늘도 금세 어두워졌다. 덕분에 한두 시간 차이로 같은 도시에서 다른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잔잔했던 시청 주변 거리가 이전보다는 북적였고 시청사에서 흘러나오는 음악도 들려 없던 활기가 도는 듯했다.
다른 도시들과 가장 차별된 점을 하나 발견했다. 칙칙한 시청 건물에다 음악과 함께 화려한 조명을 쏘고 있었다—미디어 파사드라고 부른다. 정말 별 거 아닌데도, 도시의 분위기를 한 층 밝게 만들어 주었다. 특히 찬바람이 부는 추운 겨울임에도 꽤나 많은 사람들이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을 만큼 효과가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 레오데가르 성당에도 마찬가지였다. 유명한(?) 그림을 2~3분마다 번갈아서 성당 정면에 띄웠다. 게다가 호스텔로 되돌아오는 길에서도 카펠교 중간에 있는 저수탑에 마찬가지로 음악과 함께 조명 공연을 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미래에 공무원이 되고자 하는 사람으로서, 적은 예산만으로 다소 정적인 도시에 활기를 불어넣어 준 예술 사업을 추진한 공무원을 참 칭찬하고 싶다.
물가가 비싼 스위스에서 살아남으려면 결코 식당에 가서는 안 된다. 심지어 마트 물가마저도 독일과 비교하면 매우 비쌌다. 그렇지만 뭐라도 먹어야 했기에, 마트에서 대충 3프랑짜리 라자냐를 사 와서 전자레인지에 돌려 먹으며 저녁을 때웠다. 내가 묵은 호스텔(Capsule Hotel - theLAB)은 캡슐 형식이었는데, 처음에는 한 방에 인원이 많아 걱정되었지만, 시설이 낙후한 6인 도미토리보다 훨씬 나았다. 깔끔한 시설도 그렇고 내 침대 공간이 폐쇄되어 눈치 볼 필요도 없어 좋았다. 덕분에 푹 자고 일찍 일어나, 스위스 여행의 백미인 인터라켄으로 가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