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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버른

호주

by 피츠윌리엄 다아시 Mar 18. 2025

첫째 날

플린더스 스트리트 역 - 호지어 레인 - 로드 레이버 아레나

 한 시간 반 정도 비행기를 타고 캔버라 상공을 지나 멜버른에 도착했다. 시드니에서와는 다르게 햇살이 강렬해 꽤나 후덥지근했다. 호주에 온 지 사흘 째가 되어서야 내가 알고 있던 여름 호주를 느끼게 되었다. 체크인 전까지 시간이 한참 남아 캐리어를 맡기고, 점심을 해결하러 Hungry Jack's로 갔다. 우리는 각자 호주에서만 파는 Aussie Burger를 하나씩 시켜 먹었다. 비싼 만큼 내용물이 알찼다. 게다가 크기도 아주 커서 단품 하나만 먹어도 배가 충분히 찼다. 물론 Aussie Burger도 맛있긴 했지만, 사실 이곳의 어떤 햄버거도 우리나라 버거킹의 모든 햄버거들보다 맛있을 거라 생각한다. 제아무리 고급 메뉴라도 원가 절감을 해버리는 게 우리나라니까....

 이후 플린더스 스트리트 역 주변을 둘러보았다. 도시 분위기가 시드니와는 전혀 달랐다. 계획도시의 느낌이 났다. 거리가 격자 모양으로 나있고, 비좁은 도로에는 수시로 트램들이 지나다니고 있었다. 도로 사이는 건물들로 가득했는데, 몇몇 빌딩들은 고개를 쳐들어야만 꼭대기를 볼 수 있을 만큼 높았다. 시드니나 멜버른이나 시내에 사람들이 붐빈 것은 똑같았지만, 갑갑함이 더 크게 느껴졌던 곳은 멜버른이었다. 이렇게 느낀 것은 아무래도 멜버른에 오기 직전 서큘러 키에서 여유롭게 바다로 흘러가는 강물을 감상한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렇다고 멜버른 CBD가 싫다고 느끼진 않았다. 나름대로 생활하기 아주 좋은 도시라고 생각한다. 방향 감각을 잡기 쉽고, 이 구역 안에서는 무료 트램을 타고 쉽게 이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조금만 남쪽으로 가면 한적한 야라 강을 수 있다. 분명 평일인데 야라 강의 선상 술집에서 맥주를 마시며 호주 오픈을 보는 현지인들도 여럿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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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독 고풍스러운 플린더스 스트리트 역 | 호주 오픈 기간이라고 호지어 레인에도 AO 벽화가 그려져 있었다

 도심을 오래 구경하진 못했다. 이른 기상에 이은 비행에 무더운 날씨와 배낭까지 겹치니 발바닥이 아파왔다. 결국 카페에 가서 앉아 잠시 쉬기로 했다. 에어컨 바람을 쐬며 열을 식힌 뒤, 체크인 시간에 맞추어 숙소로 갔다. 우리 숙소는 무려 47층이었다. 나와 아버지가 쓴 침실에서 본 전경은 아찔할 정도였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면 경찰서를 마주보았고, 고개를 돌리면 교도소도 보였다. 짐을 대충 정리한 뒤 마트에서 장을 보고 와서 바로 저녁을 해 먹었다. 메뉴는 소 등심과 양 우둔살 스테이크였다. 총 600g이나 되었지만, 채 30달러도 되지 않았다. 유튜브를 보고 대충 구웠음에도 맛은 충분히 좋았다. 특히 양고기가 정말 맛있었다. 방목한 소와 양을 신선하게 유통할 수 있는 환경 덕인 걸까. 더욱이 양에 대한 낮은 접근성은 정말 부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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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표반찬의 명이절임과 깻잎이 느끼함을 잡아주는 데 톡톡한 역할을 했다 | 교도소 뷰 침실 | 석양을 등진 마블 스타디움과 경찰서

 저녁을 해 먹자마자, 나와 아버지는 곧바로 호주 오픈을 보러 갔다. 경기장까지 대회 기간 무료로 운영되는 70a번 트램은 서울의 지옥철을 연상시켰다. 경기가 시작하기 전 일반 코트들과 부가 시설들을 둘러보고, 기념품점에서 수건과 후드집업을 샀다. 수많은 인파와 테니스 공 소리로 경기장에 들어가기 전부터 화끈한 열기를 느낄 수 있었다. 먼저 여자 단식 16강 경기가 진행되었는데, 시비옹텍이 리스를 단 1시간 만에 제압했다. 무자비하다 느껴졌을 정도로 힘의 차이가 느껴졌다. 남자와 여자가 대결하는 기분이었다. 경기가 지루해 졸음이 쏟아지는 참에 경기를 일찍 끝내주어 외려 고마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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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당하게 롤랑 가로스 티셔츠를 입고 입장했다 | 지붕을 닫고 진행된 프리쇼 | 자리가 가깝진 않았지만 선수들의 괴성은 생생했다

 이어서 드 미노와 미첼슨의 남자 단식 16강 경기가 시작했다. 절반 정도는 비어있던 관중석이 그제야 가득 채워졌다. 사실 16강 마지막 날의 Night Session이라 조코비치가 나올 것으로 예상했지만, 호주 사람인 드 미노가 대신 배정되어 실망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2년 전 파리에서 조코비치 경기를 직접 봤던 것을 위안으로 삼았다. 1세트는 날래면서도 견고한 드 미노가 압도했지만, 2·3세트는 긴장이 풀린 미첼슨이 분전하여 치열했다. 기량이 올라온 미첼슨이 타이브레이크까지 가면서 드 미노를 위협하자 호주 사람들의 응원도 덩달아 커졌다. 노란 축구 유니폼을 입고 초록 머리를 한 6명의 열성 팬들이 응원을 주도했다. 'Let's go, Demon!', 'Come on, Demon!' 등의 구호를 외치고, 유명한 응원가들을 불렀다. 하도 불러대니 내 귀에도 익기 시작해서, 가끔은 따라 응원해 보았다. 나와 Aussie들의 응원에 힘입어 드 미노가 3:0으로 이겼다. 사람들로 붐빈 것에 너무 오래 있어서 머리도 띵하고 피곤했었는데, 덕분에 자정 전에 숙소로 돌아갈 수 있었다. 건너편 다리에서 애처롭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과거의 아픔을 뒤로하고 직접 현장에서 분위기를 몸소 느껴 정말 후련했다. 아직 못 가본 그랜드 슬램이 딱 하나 남았다; 임용 후 착실히 돈을 벌어 US 오픈에도 가야 비로소 퀘스트가 완료된다. 그곳에서는 바지를 사서 그랜드 슬램 깔맞춤을 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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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브 연습 중인 알렉스 드 미노 | 바글바글하면서도 때로는 고요했던 로드 레이버 아레나
원본: Let's Go Dodgers
Aussie, Aussie, Aussie, Oi, Oi, Oi


둘째 날

퀸 빅토리아 마켓 - Nobbies Centre - 펭귄 퍼레이드

 여행을 떠나고 처음으로 늦잠을 잤다―사실 그래 봤자 9시였다. 전날 사둔 과일로 아침을 때우고, 아버지와 같이 차를 빌리러 갔다. 우리는 대기업이면서 가격이 저렴한 Sixt를 선택했는데, 여러 지점들 중 Southern Melbourne 지점을 이용했다. 숙소 바로 옆에 Melbourne City 지점이 있음에도 굳이 걸어서 30분이나 걸리는 이곳을 이용한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운영 시간이 더 길었고 한적한 도로에서 운전을 시작하면서 좌측통행에 익숙해지기 위함이었다. 우리가 받은 차는 친숙한 Kia의 Rio였다. 차를 움직이기 전 우선 우측 운전석에 대해 철저히 분석했다. 크게 다를 건 없었지만, 깜빡이와 와이퍼 레버가 서로 반대에 있는 것이 유독 낯설었다. 일단 아버지가 먼저 운전대를 잡으셨다. 좌측통행에는 금방 적응하셨다. 출국 전 공부를 많이 하셨고, 특히 좌회전 우회전을 할 때마다 '좌작우큰'―유튜버 '아재여행'에게 감사의 말을 전한다―을 중얼거리며 운전하셨다. 그럼에도 두 가지 어려움을 느끼셨다: 핸들 레버들과 비보호 우회전. 깜빡이를 넣을 때 무의식적으로 와이퍼 레버를 사용하기 일쑤였다. 강렬한 햇살을 와이퍼라도 막아주길 바라는 마음이라 합리화하기에도 다소 무리가 있었다. 사실 와이퍼는 혼자 창피하면 그만이었지만, 좁은 시내에서 비보호 우회전을 잘못하면 다른 차들에게 피해를 주게 되어 바짝 긴장했다. CBD에 들어서서 처음으로 우회전했을 때 성급하게 끼어들었는데, 바로 맞은편 차가 경적 소리를 울리며 잘못을 일깨워 주었다. 삐질삐질 식은땀을 흘리긴 했지만, 어쨌든 무사히 숙소 주차장에 잘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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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짝 긴장하신 아버지 | 우리의 이틀은 책임져준 리오

 그제야 막 정오가 되었다. 점심으로는 간단하게 바질 페스토 파스타를 요리했다. 교환학생 시절부터 꾸준히 다져온 요리 솜씨가 진가를 발휘한 순간이었다. 시판 바질 페스토에 마늘과 양송이버섯과 방울토마토만 넣었다. 과장이 아니고 이번 호주·뉴질랜드 여행에서 먹었던 파스타들 중 가장 맛있었다. 설거지를 하고 나서도 아직은 출발하기에 일러, 잠깐 퀸 빅토리아 마켓에 다녀오기로 했다. 걸어가는 길은 뜨거운 햇살 때문에 힘들었지만, 다행히 마켓 내부에는 지붕이 있었다. 유명하지만 맛은 그저 평범했던 도넛도 사 먹고, 끊어질 듯 절대 끊어지지 않던 벌집도 시식한 뒤, 남은 기간 아침으로 먹을 과일과 기념품도 조금 사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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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erican Doughnut Kitchen | 알록달록 싱그러운 채소들 | 웍 하나로 파스타 4인분을 만드느라 다소 힘들었다

 숙소에 다시 돌아온 뒤 드디어 필립 아일랜드로 출발했다. 2시간 남짓 조수석에서 아버지의 운전을 지켜보며 이미지 트레이닝을 했다. 호주 본토에서 섬으로 넘어가니 길가에 나와 있는 야생동물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당당하게 무단횡단을 하는 검은 거위들―교양 있는 카이스트 거위들이 횡단보도를 건너는 것과 비교된다―과 깡충깡충 뛰어가는 왈라비도 보았다. 중간에는 해변에 잠시 내려 서핑하는 사람들도 구경하고, Nobbies Centre에 가서 짙푸른 바다도 감상했다. 자연경관도 멋있었지만, 이곳에서 무려 펭귄과 뱀과 왈라비도 보았다! 이곳이야말로 사람과 동물이 공존하는 자연친화적인 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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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가지 없는 호주 거위들 | 정말 짙은 호주의 남해
주차장 옆 언덕에 멀뚱멀뚱 서 있는 왈라비

 아직 펭귄 퍼레이드가 시작하려면 한참 시간이 남아 저녁을 먹으러 다시 동쪽으로 이동했다. 드디어 내 차례가 왔다! 설렘 반 걱정 반의 마음으로 좌측통행 길에 들어섰다. 이미지 트레이닝을 충분히 한 덕분에 손을 파르르 떨 정도로 긴장되진 않았다. 누구 아들 아니랄까 나 또한 와이퍼를 수시로 켜긴 했지만, 차선을 맞추는 등 다른 데에는 어려움이 없었다. 동생이 찾아둔 해산물 식당에 도착했으나 아쉽게도 문이 닫았다. 다시 돌아오는 길에 구글맵 평점이 좋은 Woolamai Pizza에 들러 피자를 포장해 갔다. 펭귄 퍼레이드 Visiter Centre 구내식당에서―음식 가격이 터무니없이 비싸지만 외부 음식 반입이 가능하니 포장해 오는 것을 강력 추천한다―천천히 피자를 먹고 입장했다. 펭귄들이 출몰하는 해변가까지 데크길 위로 걸어갔다. 중간중간 거위와 왈라비, 그리고 집 안에 숨어있는 펭귄을 볼 수 있었다. 사실 이 펭귄은 먹이를 찾으러 출근하지 않은 게으른 펭귄이다. 얼굴만 빼꼼 내밀고 있는 모습이 너무 귀여워 처음에는 모형으로 착각할 정도였는데, 이 펭귄이 생업에 소홀한 덕에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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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왕 펭귄 인형 | 먹이 찾는 데 열중인 왈라비 | 바닷바람의 추위도 잊게 만드는 귀여운 펭귄

 해가 질 때까지 하염없이 바닷바람을 맞으며 기다렸다. 기어코 하늘이 어둑어둑해지자 귀여운 펭귄들이 하나둘 바다에서 걸어 나왔다. 모래톱에 포진한 갈매기 형님들이 무서워 쉽사리 올라오지 못했다. 하지만 일여덟 마리씩 무리를 짓더니 줄지어 올라오기 시작했다. 영차영차, 느리지만 한걸음 한걸음 전진했다―퍼레이드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깜찍했다. 구경하는 사람들 모두 한마음 한뜻으로 응원했다. 이렇게 서너 무리가 언덕 위로 올라오는 것을 보고, 다시 데크길로 돌아갔다. 길 아래에는 자기 집을 향해 아장아장 걷는 펭귄들을 구경했다. 자식을 헷갈려 서로 싸우는 펭귄들도 있었다. 이들을 보며 직주근접의 중요성을 새삼 느꼈다; 집밖으로 멀리 나가면 돌아오는 것도 그만큼 힘든 일이 된다. 코앞의 사람도 잘 안 보이는 캄캄한 밤에야 퇴근한 펭귄들을 축하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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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 가서 직관 1열에 차지했다 | 슬슬 자리를 잡기 시작한 갈매기 형님들

 거의 모든 것이 완벽한 하루였다. 종일 화창했던 햇살이 몸에 남아있던 한국 겨울의 한기를 완전히 떨쳐 주었고, 드넓은 바다는 속을 뻥 뚫어 주었으며, 야생동물들은 귀여움으로 내 마음을 녹여 주었다. 자연을 소중히 보호하는 호주의 노력에 진심으로 경의를 표한다. 덕분에 필립 아일랜드에서 정말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셋째 날

Memorial Arch - 아폴로 베이 - 12사도 바위 - Loch Ard Gorge

 예전에 호주에 왔을 때 가장 좋았던 장소는 다름 아닌 그레이트 오션 로드였다. 투어 버스에서 내리는 족족 입이 쫙 벌어질 만큼 경치가 너무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곳에 꼭 다시 오고 싶었고, 두 번째인 만큼 이번에는 직접 차를 몰며 감상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그 소망을 드디어 이루게 되었다. 하지만 신은 모든 것을 주지 않는 법; 전날과 달리 하늘은 흐렸다. 그래도 오후에는 날이 갠다고 하니 크게 불평하지 않고 출발했다.

 숙소 주차장부터 Loch Ard Gorge까지 전부 내가 직접 운전했다. 지루한 M1 고속도로를 타고 질롱을 거쳐 Memorial Arch로 갔다. 도착하기 30분 전부터 갑자기 빗방울이 후드득 떨어졌는데, 운이 좋게도 주차하고 나니 바로 잦아들었다. 그레이트 오션 로드의 시작을 알리는 동시에 제1 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던 용사들을 기리는 이 아치는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었다. 당시에 찍었던 셀카와 비교해 봐도 변한 건 나뿐이었다. 아직 가야 할 곳이 많았기에 사진만 후딱 찍고 아폴로 베이까지 갔다. 중간중간 마음에 드는 곳이 있으면 망설이지 않고 내려 경치를 감상했다. 아폴로 베이에서는 피시 앤 칩스로 점심을 해결했다. Apollo Bay Fishermen's Co-Op라는 식당에 갔는데, 큰 플레이터에 생선 튀김과 더불어 오징어 튀김, 조개, 새우 등 어러 해산물도 담아 주었다. 갓 튀겨 바삭하고 따끈따끈한 생선 튀김도 맛있었지만, 처음 보는 특이한 샐러드도 제법 마음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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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morial Arch | Android Auto 덕분에 운전이 조금 더 수월했다 | 2인분 플래터와 1인분 플래터

 배를 든든히 채우고 12사도 바위까지 쭉 달려갔다. 비록 운전하느라 바깥 경치를 눈에 온전히 담을 수 없었지만, 화사한 분위기로부터 그 그 아름다움은 충분히 전해졌다. 오전에는 흐렸던 날씨가 다행히 오후에는 맑아졌다. 하지만 먹구름은 여전히 남아있어 운전하는 내내 신기한 형태의 하늘을 볼 수 있었다. 내 왼편으로는 쾌청한 하늘 아래 옥색 바다와 하얗게 철썩대는 파도, 그리고 바위와 모래가 다채로운 조화를 이루는 천국이 보였다. 반면 오른쪽에는 잦은 산불로 인해 앙상하게 뼈대만 남은 나무들 위로 짙은 먹구름이 드리운 지옥이 있었다. 우리 가족은 그 경계를 따라 이동하고 있었다. 이렇게 신기하고 멋진 자연 속에서 꼬불꼬불 길을 따라 운전하니 탐험하는 느낌도 들었다. 주변에 차도 별로 없으니 자연이 다 내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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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금엉금 차도를 가로지르는 고슴도치와 그를 가엽게 여겨 길가로 몰아주는 사람 | 그레이트 오션 로드의 도로 번호는 B100이다

 한참을 운전한 끝에 드디어 12사도 바위에 도착했다. 기억하던 대로 정말 멋있었다. 맑고 무한한 바다와 거센 바닷바람과 파도에 굴하지 않고 서 있는 바위들도 다 그래도였다. 특히나 이날은 바람이 심하게 불어, 인물 사진을 건지기엔 어려웠지만 그만큼 파도 소리는 아주 청량했다. 먼 길을 따라 차를 타고 와 생긴 멀미가 도저히 남아있을 수 없을 법한 시원함을 주었다. 마지막으로 5분 거리에 있는 Loch Ard Gorge에 들렀다. 산사태로 인해 아래로 내려가진 못했지만, 위에서 보는 광경도 충분히 멋있었다. 이곳에서 5년 전 친구들과 찍었던 단체사진을 나 홀로 회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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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월 10일의 12사도 바위 | 2025년 1월 22일의 12사도 바위

 돌아올 때는 아버지께 운전을 맡겼다. 4시간 동안이나 운전한 나는 5분도 못 버티고 곯아떨어져 버렸다. 우리 집에서 3시간 남짓 걸리는 친가까지 힘든 내색 없이 운전하셨던 아버지가 새삼 대단하다고 느껴졌다. 런던 브리지까지 가지 않은 덕에 차량 반납을―17시에 문을 닫아 길가에 차를 대고 보관함에 열쇠를 넣기만 하면 되었다―마쳤을 때도 태양은 여전히 머리 위에 떠있었다. 체력이 아직 남아있어 동생이 좋아하는 Honeycomb맛 젤라또를 먹으러 갔다―나와 아버지가 호주 오픈을 보러 갔을 때 이미 다녀왔었다고 한다. 꿀의 단 맛과 아몬드의 고소함이 조화롭게 섞인 새로운 맛이었다. 멜버른에서의 마지막 날에 처음 간 것이 아쉬울 정도로 마음에 들었다. 숙소에 돌아와서는 라면을 기갈나게 끓여 먹었다. 역시 여행 중 먹는 라면은 산 정상에서 먹는 라면 다음으로 맛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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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버른에 왔다면 이곳에서 Honeycomb맛 젤라또를 꼭 먹어보길 추천한다 | 이번 여행에서 처음 끓여 먹는 라면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벌써 호주에서의 일정이 끝나 버렸다. 닷새 동안 기대 이상으로 즐거웠다. 5년 전에 흘려둔 기억의 조각들과 남겨둔 아쉬움들을 주웠다. 또 맛있는 음식들도 배불리 먹었다. 물론 여전히 아쉬운 점들이 남아는 있지만, 미련이 남아야 그것이 진짜 여행 아니겠는가. 이제 마음을 정리하고 초심자로서 뉴질랜드로 떠나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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