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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들 01] 극예술에 대한 작은 고민

좋은 극이란 무엇이며, 관객의 존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by 현일


지난 글에서 필자가 공연예술에 관심을 가진 계기 및 이를 어떤 방식으로 보는지에 대해 적어본 바 있다. 이 채널의 주된 목적은 필자가 본 공연들의 후기 및 분석을 공유하는 것이지만, 더 많은 작품들을 살펴보기 전에 하나의 문제를 더 다루고자 한다. 이는 필자가 가장 많이 소비하는 공연의 형식이자 대중적인 접근성 또한 상대적으로 좋은 극예술에 대한 문제이다. 공연예술이 결국은 현실과 구분되는 특수한 사건이나 허구, 혹은 이를 현실로부터 분리시키는 매체라는 점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내게 극예술은 그것의 물질적인 구성요소들이 속해 있는 현실과 구분되는 허구의 세계, 말하자면 ‘가상현실’을 만드는 것으로 여겨진다는 점에서 특히 관심의 대상이 된다. 실제로 필자는 다양한 공연예술 장르들을 보려고 노력하고는 있으나 돌아보면 결국 연극과 뮤지컬, 무용극 등 극 장르를 가장 많이 소비하게 되는 것 같다. 대한민국 공연의 메카라고 불리며 1년 내내 다양한 공연이 올라오는 대학로에서도 극예술 장르가 주를 차지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 목적이 오락이든 취미든, 혹은 특별한 경험을 위해서이든 간에 극예술은 공연예술의 인상에 큰 비중을 차지할 것으로 보인다.

극예술은 분명 대중적으로 생산 및 소비되고 그런 만큼 허구를 흥미롭게 보여주는 매체로서 쉽게 받아들여질 수 있지만, 막상 그것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수용되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면 상당히 복잡함을 알 수 있다. 이와 관련해서, 오래 공연을 봐 온 관객이자 관련된 이론을 연구하는 학생으로서 항상 하게 되는 고민이 있다. 사실 굉장히 단순한 고민이다. 그 질문들은 다음과 같다: 잘 만든 극예술이란 무엇일까? 어떤 공연이 잘 만들어졌는지, 아닌지에 대해 평가하는 것은 가능할까? 가능하다면 어느 정도까지 가능할 것인가? 모든 예술 분야에 적용될 수 있는 문제이겠지만, 공연예술은 그 종합예술로서의 성격과 현대 공연 문화의 다양성 및 장르 초월성, 그리고 제작자 및 관객이 추구하는 바의 차이에 의해 그 완성도를 평가하기 가장 어려운 분야 중 하나가 되었다. 특히 공연예술의 현장성은 그 생산과 수용을 고정 불가하게 만든다. 공연예술은 움직임을 근간으로 하기에 아무리 고정된 대본이 있고 연출적으로 고정된 부분들이 많다고 해도 배우들의 컨디션이나 사소한 움직임의 차이, 관객들의 반응 및 분위기 등에 따라 매 순간 달라질 수 있다. 특히 지금, 여기에서 펼쳐지며 현실에 버금가는 활동성을 가지고 있는 공연예술은 분석을 위한 객관적인 기록이나 저장을 어렵게 할 뿐 아니라, 하나의 시점을 제공하지 않고 한 번에 수용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정보를 한 번에 제공한다는 속성으로 인해 초점을 어디에 맞추고 어떻게 조합해 해석하는지에 따라 관객 개개인에게 완전히 다른 경험을 제공할 수 있다. 같은 작품을, 같은 날 보았더라도 앉은 자리, 평상시의 관심, 주로 본 무대의 위치나 인물에 따라 관객의 해석과 평가는 상이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연예술은 다른 어떤 예술과 마찬가지로 평가의 대상이 되며 이에 따라 그것이 구현될 수 있는 가능성도 달라진다. 창작자들은 대본을 공모전에 내고, 공연에 대한 아이디어들을 정부 지원 사업에 제출한다. 이를 바탕으로 작품의 의의, 예술성, 혹은 상업적 가치를 근거로 투자자들을 설득할 수도 있다. 그리고 어떤 공연에 대한 관객 반응이 좋을수록 그것은 더 발전되어 재연으로 돌아올 가능성이 높아진다. 공연에 대한 SNS나 관련 커뮤니티에서의 반응들, 후기들도 무시할 수 없다.

이처럼 평가의 어려움은 공연예술 전반에 존재하는 문제지만 극예술의 경우 더욱 복잡해지는데, 이는 한편으로는 극예술을 그것의 고정된 부분을 바탕으로 평가할 수 있다는 믿음과 공연의 현장성이 충돌해 온 역사와 관련된다. 잘 만든 것으로 여겨지는 극예술에 대한 평가에는 흔히 대본의 서사적 완성도에 대한 긍정적인 반응이 따라붙는다. 사회적으로 유의미한 메시지를 가지고 있는 공연도 이와 유사하게 대본의 완성도나 소위 '작품성'에 근거한 평가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잘 쓰인 대본’에 근거한 평가 기준을 일반적으로 받아들이면서도 관객들은 본능적으로 그들 앞에서 무대가 진행되며 이에 대한 해석이 유동적일 수 있다는 점, 즉 실연과 관련된 요소들을 즐기는 것처럼 보인다. 흔히 볼 수 있는 반응은, 어떤 작품을 (흔히 서사적 완성도에 근거해) ‘못 쓰인’ 작품으로 칭하면서도 흥미로운 연출이나 배우의 연기, 해석 차이에 따라 즐기고 있는 모습들이다. ‘연뮤’[연극, 뮤지컬의 줄임말] 관련 커뮤니티에서는 오히려 이런 공연들이 자타공인 잘 만들었다는 공연들보다 더 큰 호응을 이끌어 내는 것도 볼 수 있다.




이처럼 극예술에 대한 평가가 대본, 즉 텍스트에 대한 평가와 연출 및 무대화와 관련된 평가, 그리고 관객 개개인의 평가로 나뉘게 되는 것은 극예술이 문학과 가져 온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로부터 이해할 수 있다. 현장의 공연성이 확실한 주축을 가지고 있는 다른 공연예술 양식들에 비해 극예술에 대한 논의와 연구에서 희곡 텍스트의 중요성은 항상 큰 비중을 차지했고 여전히 차지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이런 문학과 공연(상연)의 문제는 격렬한 대립구도를 발생시켜 왔다는 점에서 쉽게 하나의 장르로서 생각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무대의 구현과 관련된 ‘장경’은 부차적인 요소라고 주장했으며 비극을 정의할 때 플롯의 구성을 그 무엇보다 강조했다. 이에 대한 해석으로부터 보다 엄격한 규칙들을 발전시킨 프랑스 고전주의 연극은 관객에게 원활히 수용될 수 있는 ‘사실임직함(vraisemblance)’의 규칙들을 발생시켰다. 이런 규칙들은 <시학>에서 발견되던 플롯의 구성에 대한 논리적인 기준들을 넘어 사회적이고 윤리적으로 적합하게 여겨지는 기준들을 포함하게 되었다.

이처럼 극예술에서 텍스트가 중심적인 지위를 가질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보자면 모방행위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가 기저에 있다는 해석을 할 수 있다. 플라톤의 예술 비판이 한편으로는 부정적인 대상에서도 쾌를 느끼도록 하는 모방적 행위의 특성, 다른 한편으로는 모방은 불완전하기에 진리에 도달할 수 없다는 점에 근거한다면, 아리스토텔레스를 필두로 강조되는 플롯의 규칙들은 이에 반해 예술의 가치를 주장한다. 따라서 플롯을 중심에 두는 극예술의 주장은 논리에 기반함으로써 극예술이 보편적인 것에 대해 말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함과 동시에 불완전한 모방에 해당되는 상연의 과정들을 본질적이지 않은 요소로 축소시키는 경향을 나타낸다. 고전주의의 엄격한 규칙들에 저항하며 극 상연의 조건들을 강조하는, 혹은 텍스트 자체를 거부하는 연극도 그 비판성에도 불구하고 연극의 내용 (흔히 대본, 텍스트. 다른 한편으로는 주제나 진리로도 확대될 수 있다)과 무대에서의 상연 사이에 존재하는 불일치를 해소하려는 경향을 가진다는 점에서는 이런 흐름을 이어가고 있다. 연극을 현실의 행위를 면밀히 들여다볼 수 있는 수단으로 여기며 극도로 섬세하게 현실을 모방하는 사실주의적 실천들, 현실의 표면적인 모방을 거부하며 비사실적인 성격을 갖는 아방가르드 연극, 그리고 사건으로서의 예술을 추구하는 퍼포먼스적 실천들은 결국 형식, 시각적 사실성, 감각적 현재성 등을 중심으로 텍스트를 대체할 수 있는 통일성을 얻고자 했다는 점에서 그렇다. 하지만 극예술에 대한 평가의 다양성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이런 완전한 통일성, 즉 예술로서의 내적 완결성은 성취되지 않았으며, 다양한 극예술의 실천들이 혼재되어 특정한 예술운동의 특성을 갖지 않는 오늘날에는 그런 추구가 가시화되지 않을 수도 있다.




정리하자면, 극예술에 대한 평가에서 텍스트나 극이 현실과의 관계로부터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생각이 여전히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결국 모방적 예술인 연극이 그것이 근거한 (혹은 전달하고자 하는) 현실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에 대한 문제의식이 계속된 것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문제가 다양한 시도들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다면, 오히려 현실과 연극 사이에 존재하는 모순을 그 경험의 핵심적인 요소로 보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이런 시각은 특히 관객에게서 나타나는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연극의 본질적인 경험으로 다룰 수 있도록 하며, 연극의 효과를 어떠한 불일치로부터 어떠한 반응이 이루어지는지에 따라 확인할 수 있게 한다.

첫 글에서 필자는 본인이 주목하는 연극의 핵심적인 특성을 그것의 가상성, 즉 그것이 필연적으로 실재와 부재의 관계를 상기시키고 후자의 경험 가능한 형태를 추구함에 따라 현실과 경쟁한다는 데서 설명한 바 있다. 연극이 현실적인 논리에 완전히 부합할 필요가 없으며 관객의 해석을 통해서 다양하게 존재 및 경험될 수 있는 것도 이와 관련된다. 극예술에서 컨텐츠와 그것의 무대 위 구현 사이에 존재해 왔던 갈등으로 인해 그것의 일관된 평가가 어려워지고 관객의 문제가 중요하게 되는 이유는 실재와 부재 사이의 관계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적극적으로 동원되는 작용이 다름아닌 상상력이며, 그 점에서 극예술을 관람하고 해석하는 행위는 실재하되 그것이 가리키는 대상과 일치하지 않는 사물 및 존재를 가상적 존재를 가리키는 의식적인 구성물로 전환시키는 과정으로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은 플롯도 인위적인 구성물이며, 말하자면 보이지 않는-추상적인-작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무언가의 구체적이고 물질적인 구현물로서 사건 그 자체 혹은 사건의 완전한 모방과 구분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으로부터 발전된 규칙들 및 이에 대한 엄격하고 제도적인 역사는 플롯이 납득 가능한 사실성에 근거한 것으로 생각하도록 하지만, 플롯은 이런 유형으로 한정될 수는 없다. 오히려 삶 속의 거친 소재들과 작가의 본능이 어떻게 구체화되는지에 대한 질문을 제기할 필요가 있다. 이 또한 연극이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지에 대한 질문과 직결된다.

따라서 극예술의 구성 및 그것의 성공 여부는 그것이 어떻게 실재와 부재 사이의 관계를 형성하기 위한 장치들을 발전시키고 있으며, 그것이 관객에게 닿을 수 있는지에 따라 확인되어야 할 것이다. 말하자면 플롯은 비합리적이거나 부재하는 소재와 합리적, 사실적 구조의 만남을 동반하며, 보이지 않는 현상이나 아이디어에 대한 작가의 재구성과 편집을 요구한다. 그리고 이런 구조로서 다가오는 극예술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를 바라보는 관객의 시선을 통해서 존재할 수 있다. 이런 극예술의 특성은 소설이나 영화와 같이, 허구를 다루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는 다른 매체와 비교할 때 더욱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이는 기본적으로 관객의 시점이 어디에 위치하는지와 관련된다. 소설의 경우 작가는 다양한 시점을 취할 수 있으며 이로부터 인물과 독자의 관계가 형성된다. 이 관계는 인물에 대한 다양한 내적이고 외적인 정보를 얼마나 제공하는지에 달려 있다. 이 정보를 조합해 독자는 인물과 사건에 대한 본인의 그림을 그려간다. 영화의 경우 카메라를 통해 시청자의 시점을 조절할 수 있으며, 사건 속 인물의 시점을 공유할 수도 있다. 이 경우 관객의 시점은 기술에 의해 결정되며 그는 내부자의 시각을 사실적으로 가질 수 있다.

하지만 연극의 경우 관객은 정보의 제공량 및 방식과 별개로 언제나 인물 및 사건의 외부에 존재하게 된다. 특히 공연을 보기 위해 관객은 눈앞의 사람 혹은 사물이 그 자체가 아닌 가상적인 인물 혹은 대상이 될 수 있음을 전제해야 하는데, 이는 관객이 속한 현실과 무대 위 현실 사이의 간극을 발생시킨다. 따라서 관객의 현실은 물질적인 측면에서 무대의 현실과 닿아 있는 것처럼 보이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으로 여겨지면서도, 그렇게 미치는 영향력은 연극이 전달하고자 하는 가상과는 별개의 것이라는 인식이 존재할 수 있다. 말하자면 관객이 연극의 진행에 개입하거나, 예기치 않게 소란을 일으킨다 해도 극적 상황은 이와 별개로 진행되며, 그것이 방해되거나 멈춰질지라도 이는 극의 가상적 현실이 아닌 무대 위의 물질적 현실을 방해한 것이라는 이해가 존재할 수 있다. 심지어 배우가 관객에게 말을 걸고, 관객이 참여할 수 있는 연출이 존재할지라도 관객은 가상적인 현실과 거리를 두며 자신이 참여할 수 있는 상황과 그렇지 않은 상황 사이를 본능적으로 구분한다. 극적 시공간과 객석을 분명히 구분하는 ‘제 4의 벽’*, 혹은 배우의 시선을 관객의 몰입을 방해하는 것으로 거부하는 정도의 분명한 구분이 아닐지라도, 관객은 그들이 보는 것이 현실 그 자체가 아니라는 인식을 경험하며 현실 혹은 가상으로서 존재할 수 있는 극적 경험에 상황에 맞춰 협조한다. 관객으로서 흔히 경험할 수 있는 사례를 들어 생각해 볼 수 있다. 공연을 보다 보면 정면에 있는 배우와 눈이 마주쳤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배우가 어떤 가상적인 상황과 인물을 연기하고 있는 이상, 관객은 실질적으로 그 상황에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배우와 관객이 ‘물리적으로’ 눈이 마주쳤다 할지라도, 이는 극적인 협의에 따르면 ‘정말로’ 마주친 것은 아니라고 취급된다.

*제 4의 벽: 디드로가 주장한 개념으로, 연극에서 객석을 향한 가상의 벽을 가리킨다. 이에 따르면 배우들은 관객을 의식하지 않고 실제 방에 있는 것처럼 연기를 할 수 있으며, 한쪽 벽은 관객이 볼 수 있도록 제거된 것에 불과하다. 배우는 관객의 존재를 의식하지 않고 연기해야 한다는 연기론의 기반이 되어 스타니슬랍스키가 강조한 개념이기도 하다.


결국 소설이나 영화에서와 달리 공연은 항상 외부성, 그리고 불러내려는 환영과 일치하지 않는 물질적 현실과의 공존을 전제한다는 점에서 현실과 환영의 대립구도를 해소하지 못한다. 연극의 물질적인 상태는 그것이 관객과 함께 존재한다는 점 자체로 인해 절대 완전한 허구적 대상이 될 수 없으며, 그러면서도 관객은 이를 자신의 외적 현실로서 새롭게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영화 비평가이자 리얼리즘 연극운동에 큰 영향을 미친 앙드레 바쟁은 영화가 실재의 ‘방해되는 현존’을 피하는 데 더 유리하다는 점에서 연극과의 차이를 강조한 바 있다. 이에 따르면 영화는 연극과 같이 현재 일어나는 행위에 대한 강한 느낌을 줄 수 있으나 이를 위해 실제 사물들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현실과 가상 사이의 모순이 두드러지지 않는다. 반면에 공연은 그것이 부재하는 대상을 가리키는 것으로 수용될 수 있도록 하는 관객에 대한 설득의 과정을 필요로 하며 이는 그것을 구성하는 다양한 요소들의 협력을 통해 가능해진다.

따라서 극예술의 특징은 그것이 관객이 물질적인 실재를 그것과 다른 비실재로서 인식할 수 있도록 하는 소통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관객은 이런 극예술을 온전히 경험하기 위해 현실과 거듭 부딪치며 보이는 것 이상을 믿으려 해야 하는데, 이전 글에서 언급했던 아르토가 연극은 현실적인 체계나 한계가 무너짐에 따라 성립하며 연극은 관객에게 낯선 것으로서 의미를 가진다고 주장함으로써 현실과의 대비를 강조한 것도 이런 의미에서 해석될 수 있다. 실제로 연극의 전통을 보면 그것이 다루는 이야기들이 현실적인 정도나 가능성을 벗어나는 경향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고대 그리스의 비극은 그것이 과도한 정서와 행위를 다루며 이에 따라 관객들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으로 인해 비판되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런 과도한 감정을 통해 부정적인 정서를 방출하는 카타르시스적인 효과를 가진다고 주장되었다. 그 외에도 많은 공연은 현실에서 직접 경험하기 힘든 갈등, 일반인은 감수하기 어려운 영웅적 행위를 그린다. 아르토가 연극을 현실에 종속되지 않은 꿈과 같은 것, 그리고 자신의 가장 취약하고 예외적인 측면을 발견하기 위해 가는 곳으로 여긴 것도 비슷한 믿음을 반영한다. 특히 이런 연극은 불가능한 일을 가능한 것으로 믿게 만드는 특수한 마력을 가진 것이었다.

따라서 극예술의 이런 특성을 고려할 때 소재나 플롯의 현실적인 적합성 혹은 논리성은 그 자체로 결정적인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있으며, 오히려 연극은 믿기 어려운 것이 관객에게 그 순간 중요하고 믿을 수 있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도록 하는 소통의 기술들을 중심으로 작동하게 된다. 극예술이 소재의 윤리성 측면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울 수 있으며 이에 대한 파격적인 연출이 가능한 것도 연극이 결국 낯섦과 거리를 전제하고 있음과 관련될 수 있다. 그럼에도 극예술의 소재와 관련된 윤리적인 문제는 여전히 제기되고 있기는 하다. 흔히 들을 수 있는 비판들은, 요즘 시대에 이런 고루하거나 부조리하거나 부적절한 소재를 다루는 것이 적합한지에 대한 관객들의 부정적인 인식이다. 하지만 설사 인정하고 싶지 않더라도 극예술 관람의 즐거움에서 폭력성, 심지어 타인의 불행을 관음하고자 하는 욕망을 배제할 수 없음을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연극이론가 에릭 벤틀리는 드라마에 대한 관객의 취향이 삶이 드라마틱하기를 바라는 마음에 있으며, 우리 삶에 부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폭력을 보고자 하는 욕망이 존재함을 주장한다. 그런 점에서 극은 마치 꿈과 같은 위치를 가지며, 꿈 속에서 강렬한 갈등과 행위는 눈을 뜨는 순간 끝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삶으로부터 기인하기에 그 느낌이 남아 삶에 영향을 미친다. 이런 드라마와 관련된 모방의 본능은 우리가 잊기 쉬운, 동물적인 본능이나 야성적인 삶을 회복하는 데 적절한 매체로서 연극을 고려하도록 만들며, 연극에 관해서만은 평이함보다 과격함을 선택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결국 극예술은 그것이 기반한 현실과 끊임없이 경쟁해야 하며, 이를 통해 보이지 않는 것의 경험을 가능하게 한다는 것으로부터 큰 의미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극예술을 경계지을 수 있도록 하는 독특한 성격은 그것이 허구적 세계를 창조해내기 위해 사실적인 인간 존재 및 대상물들을 활용함으로써 현실을 재현해내는 인상을 준다는 것이되, 이 이중적인 구조는 결코 하나로 해소될 수 없다는 점이다. 결과적으로 연극은 완결된 구조가 아니라 항상 유동적인 소통 과정, 즉 현실과 환영의 접점을 발생시킨다. 이는 극예술의 완결되지 않은 속성, 모순으로부터 발생하는 해석의 가능성을 인정할 근거를 제공하며, 연극기호학은 연극 텍스트를 ‘구멍’이 가득한 것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우리가 어떤 작품을 비판할 때 구멍투성이라고 하고 그것을 메우기 위해 배우나 연출을 이용하는 경향을 문제시하면서도 그런 구멍이 경우에 따라서는 해석의 여지와 이에 따른 즐거움을 발생시킬 수 있는 것은 이런 연극의 특성을 가리킨다. 연극에서 배우의 연기가 중심적인 역할을 가지는 것으로 여겨지는 것도, 배우의 행위가 어떤 상황, 사물, 사람 등이 가상현실에서 갖는 의미를 지시하는 가장 중심적인 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연극이론가 마틴 에슬린은 연극에서는 “진짜 인간인 배우들이 고도로 양식화되었거나 추상적으로 재현된 생활환경과 믿음이 가게끔 교감할 수 있다”는 점을 연극의 대표적인 역설로 보았으며, 이처럼 배우의 행동이 공간이나 상황에 대해 존재하는 모순을 해소하는 경향을 배우와 행동의 최우선 원리라고 보았다. 이에 따르면 행동은 이미지를 창조하며 공간의 경계를 정해주기에 배우가 공연을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필연적이다. 그리고 관객은 배우가 어떤 대상, 무대의 시공간, 그리고 다른 인간 존재를 바라볼 때 그가 보는 대로 그 대상을 인식하도록 하는 믿음을 발휘해야 한다. 실제로 그 배경을 분명히 보여줄 그 어떤 소품이나 근거가 없을지라도 배우의 눈이 성을, 들판을, 바다를 본다면 관객은 이를 따라갈 수 있다. 심지어 그가 컵을 두고 우물이라고 부른다 할지라도 관객은 최소한 이를 믿으려는 마음가짐을 가지고 극장에 가게 된다. 그리고 이런 경향은 관객이 극예술의 관습이나 태도에 익숙할수록 더욱 극대화될 수 있다.

이처럼 다른 허구적 예술 형식들과 비교했을 때 연극의 특성이 완결되지 않음으로부터 발생하는 소통이고 연극이 완전한 서사와 예술적 형식을 추구하는 것으로서는 다른 예술을 능가할 수 없다면, 공연을 볼 때 던질 수 있는 흥미로운 질문은 그것이 왜 영화, 소설과 같은 다른 예술 형식이 아니라 극예술의 형태로 실현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것이다. 필자는 해당 공연이 어딘가 부족한 면이 있거나 서사적으로 구멍이 발견된다 할지라도 이를 만족할 경우 유의미한 작품으로 여기곤 한다. 극예술은 안일함으로부터 발생하는 구멍을 남겨 둬서는 안 되겠지만, 그 구멍이 무대와 극예술이라는 전제로부터, 의도를 가지고 만들어진 것이라면 이는 오히려 공연 관람의 핵심이 될 수 있다. 관객은 과연 이를 구분할 수 있을 것인가? 극예술이 보이지 않는 것, 비현실적이거나 믿기 힘든 것을 보도록 하는 과정들을 발생시킨다면 이런 과정들에 따라갈 수 있는 개인의 잠재성을 새롭게 발견하는지의 여부가 성공적인 극 경험을 특징지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극예술의 평가와 경험에 대해 여전히 모호한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는 점이 아쉽기도 하지만, 극예술이 현실에 분명히 존재함으로 인해 오히려 발생시킬 수 있는 상상력과 감정적 교류가 주는 독특한 즐거움이 있는 것도 분명하다. 관객으로서 자신이 극이라는 매체의 빈 구멍들을 어떻게 채우고 있는지, 그것이 어떻게 무대 위에 실재하는 요소들과의 소통으로부터 인도되고 있는지에 대해 생각해 본다면 훨씬 풍성한 관극 경험이 되지 않을까.



Eric Bentley. The Life of the Drama. Applause Theatre Books. 1991.

마틴 에슬린. 극마당: 기호로 본 극. 김문환 외 역. 현대미학사. 1993.

앙드레 바쟁. "사진적 이미지의 존재론". 사유 속의 영화. 이윤영 편역. 문학과지성사.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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