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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준팔 Jan 10. 2024

엄마의 사랑은 77,000원

사실은 더 하다

"내일 잠깐 자취방 좀 들를게~"

밤 11시 30분이 넘은 시각에 듣는 말이다. 집 정돈이 안되어있거나 친구를 초대해서 노는 중이었다면 청천벽력같은 말이지만, 다행히도 둘 다 아니었다. 엄마는 은퇴 후로 자주 자취방에 묵으러 오신다. 게다가 지금 딸이 백수이니, 얼마나 놀러오기 편하실까? 대학가에 위치한 집 앞 식당에서 같이 밥 먹다 창문을 보니, 정작 내가 대학다닐 때는 이렇게 못 만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난 지금 여유가 없다. 여유가 없을 수록 아무것도 안하는 병이 재발하기도 했다. 가고 싶은 회사 필기시험을 눈 앞에 두고 엄마가 집에 온다는 것이 그리 반갑지 않았다는게 솔직한 내 마음이다. 어차피 엄마 안계실 때도 아무 것도 안하고 누워있으면서, 엄마와 보내는 시간은 아깝다고 생각하는걸까? 이를 아빠에게 말하자, 이럴 때일수록 엄마를 이용하라며 공부하는 중에 밥 차려달라고 하고 장도 같이 보라고 하셨다. 하지만 막상 엄마를 마주대하니 엄마카드로 장보고 싶단 말이 안떨어졌다. 죄송한 마음도 들고 이용한다는 말이 너무 이상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엄청난 불효를 저지르는 것 같았다. 하지만 수입이 없으니 생활비를 아끼느라 홀쭉해지는 냉장고를 생각하니, 결국 밤에 겨우 말을 꺼내버렸다. 엄마, 같이 장보자!


사진은 일부만 담겼다


그 자리에서 쇼핑 목록을 만들었다. 죄송했던 마음은 어디로 갔는지, 이것도 필요하고 저것도 먹고 싶다, 사야할 품목이 술술 나왔다. 내친김에 어떻게 요리해서 먹어야하는지 레시피도 물어보았다. 참기름은 불에 닿으면 안좋다는 말이 있는데 나는 그냥 처음에 넣고 볶아, 아욱은 박박 씻어서 초록물을 많이 빼야해, 생마늘은 키친타올하고 같이 통에 보관해, 이제 이 지식은 내 것이 되었다.


장보러 나가며 하시는 말씀이 자식한테 쓰는 돈은 안아깝다더니 진짜라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들으니 조금 슬퍼지려고 해 조용히 마트로 향했다. 식재료 고르면서도 신중에 신중을 가했다. 잘 안 먹을 것 같으니 목록에서 뺀 것도 있었고, 비싸서 사기 망설이던 것도 있었다. 엄마는 내 마음을 알았는지 이럴 때 사라며 마구마구 담아주셨다. 고기도 사라고 하셔서 삼겹살이나 목살을 보는데, 엄마가 한우를 고르셨다. 생각보다 비싼데, 엄마는 어떻게 생활비를 쓰고있나, 아빠는 요새 수입이 괜찮나 짧은 순간에 여러가지 생각이 스쳤지만 너 소고기 좋아하잖아라는 말에 한 팩 집었다.


그렇게 나온 최종 금액은 7만7천원이었다. 엄마의 사랑은 7만7천원이었네. 묵직한 장바구니를 들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영화 아이언맨에서 '3천만큼 좋아해'가 의미있는 말인 것처럼, 나한테도 77,000원이 꽤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헤어지기 전에 엄마는 언제 알아챘는지 나한테 기운내라고 말씀하셨다. 의욕 없음 병이 겉으로 티나버린 것이 조금은 민망하니까 알겠다고, 고맙다고만 말하고 긴 말은 하지 않았다. 엄마는 나를 잘 안다. 그래서 힘이 없어 보이니 고기를 꼭 사주고 싶으셨을지도 모르겠다.


오랜만에 보는 엄마 손글씨


오늘 저녁은 고기다! 내일은 순두부찌개, 모레는 아욱된장국, 알배추도 구워먹어야겠다. 냉장고가 가득 차니 먹고 싶은 요리가 머릿속에 떠다닌다. 엄마의 사랑으로 내 마음도 찼으니, 이 마음을 의욕으로 바꾸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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