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시 순례 에세이: ⑩ 아시시를 순례지로 만든 성프란치스코와 성클라라
소란과 개혁의 중세시대를 살았던 프란치스코는 지금까지도 가톨릭과 비 가톨릭, 기독교인과 비 기독교인 모두에게 사랑받고 있는 인물이다. 기독교인들은 문자 그대로 복음, 즉 말씀에 따라 생활했던 그의 순전한 믿음과 열정 때문에 그를 사랑하고, 불교 승려들은 떠돌아다녔던 거지 수도승 프란치스코에게서 자신들과 닮은 꼴의 생활 방식을 발견하며 유대감을 느낀다. 힌두교 산야신이나 유교 혹은 도교의 현자들, 수피파와 유대교 신비주의자들도 모두 그를 추앙하는데 그것은 그의 지식 혹은 교리가 아닌 그가 살아낸 "실제적 삶" 그 자체 때문이다.
중세시대 유럽의 한 작은 마을에서 태어나고 죽은 왜소한 한 남자가 왜 지금 21세기까지 우리에게 영감을 주는 것일까? “나에게 있어 성 프란치스코는 사람의 본분을 다한 인간의 표본이다. 시련 또한 평화로운 투쟁으로 이겨내 인간으로서 가장 아름답고 숭고한 의무를 실천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윤리나 진리 또는 아름다움보다도 더 지고한 차원의 것, 곧 우리 인간의 근원적인 의무일 것이다.” 현대 그리스 문학을 대표하는 소설가이자 시인인 니코스 카잔차키스(Nikos Kazantzakis)가 프란치스코의 삶을 배경으로 쓴 소설의 서문 일부이다.
아시시는 프란치스코(St. Francis, 1181-1226)와 클라라(St. Clara 1194-1253)가 태어난 곳으로 이 두 인물이 이탈리아 중부에 위치한 인구 3만의 작은 언덕 마을 아시시를 전 세계인들이 사랑하는 순례지도 만들었다. 아시시 순례기를 마무리하며 프란치스코와 클라라의 삶에 대해 간단히 소개한다.
프란치스코는 부유한 비단상인 아버지와 프랑스 귀족이었던 어머니 밑에서 태어나 젊은 날 다른 귀족 청년과 다를바 없이 낭비하고 노는 일로 인생을 보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꿈에서 십자가로 낙인이 찍힌 군사 무기로 가득 찬 놀라운 궁전을 보고 그 환상의 의미를 하나님께 묻게 된다. 하나님은 그 궁전이 프란치스코와 그의 기사들을 위한 것이라고 그에게 설명했는데 당시 프란치스코는 자신의 삶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정확히 깨닫지 못하고 그 꿈이 일종의 세상적인 성공을 말하는 것으로 착각한다. 프란치스코는 그 꿈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기사 작위를 받기 위해 군입대를 결심하고 1202년경 페루지아에 대항한 군사 원정에 가담하는데 전쟁 중 그는 콜레스 트라다에서 포로로 잡혀 1년을 포로로 보내고 병을 얻어 1203년 아시시로 돌아온 프란치스코는 태평한 생활로 되돌아간다. 그러다가 다시 브리엔 백작 발터 3세의 군대에 입대하기 위해 아풀리아로 떠나는데, 스폴레토(Spoleto)에 잠시 머물던 프란치스코는 다시 꿈을 꾼다. “하나님과 종, 누구를 섬기는 것이 더 나은 것이냐?” 이번에는 꿈속에서 하나님이 프란치스코에게 단도직입적으로 질문을 하신다. 그는 “물론 주님입니다.”라고 대답하니, 하나님께서 “그럼 너는 왜 내가 아닌 종을 섬기려고 하느냐?”라며 그를 도전하신다. 이에 “주님, 그럼 제가 무엇을 하기를 원하십니까?” 프란치스코의 질문에 하나님은 “고향으로 돌아가거라. 그러면 네가 해야 할 일을 알게 될 것이다”라고 지시하신다.
하나님은 꿈을 통해 십자군 전쟁에 참여하려던 프란치스코에게 그가 전쟁에 참여하지 않았으면 하는 분명한 뜻을 전달하셨다. 이 특별한 체험은 프란치스코에게 그가 인생을 통해 해야 할 일의 방향성을 대전환케 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고, 이후 그는 기도하면서 종종 하나님의 선하심을 경험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은 길에서 문둥병자를 만났는데 그의 냄새나고 흉측한 외모에도 불구하고 프란치스코는 말에서 내려와 그를 안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이후 다른 문둥병자는 물론 사회에서 철저히 외면된 이들을 보다 적극적으로 돕기 시작한다.
1205년 무너진 산 다미아노 예배당(Church of San Damiano)에서 기도하던 프란치스코는 마침내 그의 전 인생을 통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알게 된다. 예배당에 걸려있던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의 아이콘이 그에게 “허물어져 가는 내 집을 고쳐라”라고 말씀하신 것을 들은 것이다. 이것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어 그는 모든 옛 생활을 청산하고 이때부터 허름한 농부의 옷을 입고 버려진 산 다미아노에서 들은 말씀 그대로 교회를 수리하며 마을의 가난하고 아픈 사람들을 돌보는 일에 전념하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글자 그대로 허물어져 가는 성당을 고치라는 뜻으로 받아들였던 프란치스코는 산 다미아노, 포르치운쿨라, 성베드로 성당들을 차례대로 고쳐 나가는 과정을 통해서 자신의 소명이 “교회의 외적 모양이 아닌 신도의 내적인 삶에 봉사하는 것”임을 깨달아갔다.
이렇게 하나님에 붙잡혀 180도 변화해 급진적으로 살고 있던 프란치스코의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여기 저기서 그의 주위에 모여들어 3년 후엔 프란치스코의 추종자가 11명이 되어, 이들은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Innocentius III)에게 새로운 수도회 결정을 허가받기로 결심하기에 이른다. 흥미롭게도 이 즈음 하나님의 간섭하심으로 교황이 프란치스코를 만나기 전에 프란치스코에 관한 꿈을 꾸게 되는데 이는 그가 곧 무너질 라테란 대성당(로마의 공식 대성당)이 무너지지 않도록 눈에 띄게 지탱하는 꿈이었다. 이 꿈으로 인해 교황은 프란치스코와 11명의 동료들을 만나자마자 그들의 사역을 전격적으로 인정하고 이것이 ‘작은 형제회’, 곧 프란치스코회의 시작이 되었다.
프란치스코와 함께 아시시를 특별하게 만든 또 한 명의 성인은 클라라이다. 클라라도 프란치스코와 마찬가지로 1194년 아시시의 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사람이다.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기도 생활에 열심이었는데, 18세가 되던 해 우연히 루피노 성당(Cathedral of San Rufino)에서 듣게 된 프란치스코의 설교가 그녀를 다른 귀족 여성과는 전혀 다른 삶, 구도의 삶으로 초대했다. 그녀는 프란치스코의 제자가 되어 그처럼 가난을 ‘그리스도인의 특전’이라 여기며 완전한 가난에 자신을 맡김으로써 Poor Ladies, 프란치스코회 전통을 따르는 여성들의 수도회인 성 클라라 수도회를 창설한다. 프란치스코가 있었기에 기도에 헌신한 클라라라는 위대한 영적 리더가 나올 수 있었다. 그러나 한편 동시대에 기도에 자신의 인생을 헌신한 제자 클라라가 있었기 때문에 프란치스코의 작은 형제회 사역이 열매를 맺을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많은 이들이 자신의 삶의 의미, 절대자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면 직접 듣고 자신이 가야할 길을 구체적으로 알기 원한다. 그러나 그 절대자가 나에게 원하는 그 길이 내가 원하는 것과 다를 때 과연 나는 내 욕망을 내려놓고 그 부름에 기꺼이 응답할 수 있을까? 프란치스코는 꿈을 통해 하나님이 그가 십자군 전쟁에 참여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된다. 당시 젊은 청년이 전쟁에 참여해서 공을 세우는 것은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부, 안락한 삶, 명예와 평판과 매우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길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 모든 성공과 명예, 부를 이루고자 하는 욕망을 내려놓고 하나님이 그에게 말씀하신 그대로 살기 시작했다. 이는 클라라의 삶도 예외가 아니었다. 부유한 귀족 신분이었던 그녀는 프란치스코의 제자가 된 이후 항상 허리를 끈으로 묶는 허름한 수도복을 입고 사시사철 맨발, 삭발한 머리엔 흰 두건과 검은 수건, 잠은 춥고 누추한 맨바닥 방에서 나무토막을 베개 삼아 자고, 식사는 대개 하루 한 끼, 주일과 성탄절에 때만 두 끼, 주로 빵과 채소를 먹으며 계란이나 우유가 생기면 병자들에게 나눠주며 산 다미노 수도원에서 기도하며 일평생 살았다고 한다. 하나님을 사랑했고 그분과의 그 사랑의 관계가 너무 소중했기에 지금 우리는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그런 혁명적인 삶을 그들은 살아냈다.
Start by doing what's necessary; then do what's possible; and suddenly you are doing the impossible. ― St. Francis
프란치스코와 클라라는 현대의 이기적인 소비주의 한가운데서의 나눔과 검소, 성적인 문란함 가운데서의 순결, 극단적 개인주의 한가운데서 공동체로의 헌신과 순종으로 우리를 부르고 있다. 무엇보다 지나친 환경 착취와 파괴 속에서 피조물들을 사랑으로 돌보는 것과 끊이지 않는 전쟁의 재앙 속에서 평화를 이끌어내야 할 거룩한 의무를 프란치스코는 지금도 생생하게 우리를 일깨우고 있다. 현대를 사는 지금 우리가 어떻게 이런 놀라운 사랑의 삶을 살아낼 수 있을지 궁금한가?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프란치스코의 삶의 배경으로 한 소설에서 "교리가 아닌 은혜, 지적인 이해가 아닌 영혼 깊숙한 갈망, 학습하는 듯한 말씀 읽기가 아닌 신음하는 듯한 간절한 기도 속에서, 명료함이 아닌 어두움의 한가운데에서, 인간이 아닌 하나님께 진지하게 묻고 답을 구해야 한다"고 조언하고 있다. 그들의 삶이 오늘날의 순례자들에게 던지는 질문은 아마도 이런 것은 아닐까.
“여러분은 어떤 존재입니까? 지금 어떤 꿈을 꾸고 계신가요? 여러분이 심긴 곳에서 어떤 꽃을 피우실 건가요?”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11일간의 순례여행은 막을 내렸다. 나는 나의 익숙한 삶의 자리로 다시 돌아왔다. 내가 태어나고 자라 너무나 잘 아는 도시에서 내가 잘 아는 사람들과 삶을 살아가고 있다. 순례 마지막 날의 전체 묵상 주제가 "끝과 시작(Endings and Beginnings)" 이었는데 이 얼마나 탁월한 선택인가. 아시시 순례에서 내가 만난 프란치스코와 클라라, 이들의 정신을 지키고 살았던 아시시의 사람들, 그리고 순례를 함께 했던 동료 순례자들에게 배운 모든 것들은 바로 "여기 지금(here and now)" 내 전 삶으로 '그 삶이 무엇이다'라고 보여주어야 하는 진정한 순례는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