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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ll The Rests Oct 22. 2023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는 자신의 소리를 내지 않는다.

아시시 순례 에세이: ⑥ 다시 생각해 본 리더십

나는 순례지에서 예상치 못했던 미셀과의 갈등 상황을 통해 순례 코디네이터 마가렛과 쥴리의 부드러운 리더십에 새삼 감탄하게 되었다. 낯선 장소에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모여 갑자기 24시간을 내내 같이 지내는 동안 어떤 갈등이나 혹은 돌발 상황이 발생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그게 더 이상한 일일 것이다. 예상치 못한 문제들에 공동체가 흔들리지 않도록 조용히 문제를 다루고 또 갈등을 조정하고 해결할 수 있도록 지혜롭게 이끄는 두 리더가 든든했다. 그 두 사람이 순례 여정 내내 보여준 공정성, 다양성에 대한 포용력과 인내심은 내가 꼭 배우고 싶은 덕목들이었다. 순례기간 동안 그들은 순례자들에게 그 어떤 것도 강요하거나 혹은 목소리를 높인 적이 없었다. 그렇다고 순례자들의 다양한 요청들에 원칙 없이 휘둘리지도 않았다. 마가렛과 쥴리는 언제나 모임 시간 전에 모임 장소에 먼저 와서 순례자들을 맞이하고 사람들이 다 모였건 그렇지 않건 간에 정확한 시간에 모임을 시작하고 마쳤다. 매일 몇 차례 있는 나눔의 시간에는 순례자들 각자가 자발적으로 마음을 열고 나눌 수 있도록 침묵가운데 기다려주고 나눔 자체를 모두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간혹 식사시간 혹은 이동 중에 옆자리에 있을 때 어떻게 잘 지내고 있는지, 어떤 마음의 감동이 있는지 슬쩍 순례자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물어보며 순례자들이 하나님과 더 깊은 관계 안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계속 응원하고 기도해 주었을 뿐이다. 그런데 그것으로 이미 충분한 거라고 생각됐다.


Whoever wants to become great among you must be your servant. ― Matthew 20:26

 

아시시의 마을 전경 (2013년 9월)


여기서 순례 첫날 순례자들이 방을 배정받고 체크인하면서 순례자들 안에 흘렀던 어떤 미묘한 긴장감에 대해 나눠야 할 것 같다. 우리가 순례여정 내내 묶은 수녀원안의 숙소는 건물 중앙 복도를 중심으로 절반은 남쪽으로 창이난, 아름다운 아시시의 전경을 만끽할 수 있는 방들이었고 나머지 절반은 북쪽 도로변으로 창이 난, 조금 어둡고 거리의 소음과 함께 지내야 하는 방들로 나뉘어 있었다. 나는 내심 아름다운 아시시 풍경을 즐길 수 있는 조용하고 밝은 방을 기대했지만 아쉽게도 내 방은 가장 낮은 층 북향의 방이었다. 나는 짐을 풀면서 방배정의 원칙이 나이 순인지 혹은 어떤 직분의 위계질서에 따른 것인지 갑자기 궁금해졌다.


그날 아니나 다를까 저녁식사 시간에 애니가 자기 방에서 보이는 풍경이 너무 아름답다고 이런 방에서 11일간 지낼 수 있다는 것이 마치 꿈을 꾸는 것 같다고 흥분해서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그렇다. 애니는 심지어 테라스까지 있는 가장 좋은 방을 배정받은 순례자였다. 전망이라고 할 것이 딱히 없는 북향방에 배정받은 사람들 몇몇이 애니를 부러워하며 순례자들에게 어떤 원칙으로 방이 배정된 것인지 궁금해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마가렛이 웃으면서 방배정 원칙에 대해 우리 모두에게 명쾌하게 설명해 주었다. 아시시 순례에 참여하겠다고 단체에 신청한 그 순서대로 방이 배정되었다는 것이다. 그 논리라면 사실 나는 순례자들 중 가장 마지막에 순례에 참여하겠다고 결정한 사람으로 북향 중에서도 가장 안 좋은 방을 배정받아야 한다. 그러나 가장 열악한 방이라고 볼 수 있는, 사람들이 들고 나는 건물 현관문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계속 들리는 건물 입구 쪽, 북향의 방은 마가렛이 사용하고 그 옆방을 쥴리, 그리고 쥴리의 옆방이 내방이었다. 한국적 상황이었다면 의전을 중시하며 아마도 무리를 이끄는 리더들이 제일 높은 층 가장 아름다운 전망을 가진 방을 사용했을 것 같은데 마가렛과 쥴리는 수녀원 측에서 순례팀에게 제공해 준 방들 중에서 가장 안 좋은 두방을 택하고 다른 좋은 방들을 순례자들에게 제공했다. 순간 순례지에 와서 전망 좋은 방에 대한 욕심을 잠깐이라도 품었던 나 자신이 부끄러워 얼굴이 빨개졌다. 그리고 내가 '참 멋진 리더들과 함께 하는구나’ 라는 어떤 안도감과 기쁨, 감사함이 밀려오며 마음이 순식간에 포근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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